몬타폰의 달빛9
깊은 대화2
-빗방울 화두
(삽화=정윤경 작가)
허공을 덮은 먹구름은 비를 바로 뿌리지는 않았다. 마치 빌리에게 비를 피할 시간을 주기라도 할 것처럼 먹구름은 서서히 옅어졌다. 따라서 강은 어두워졌다가 다시 밝아졌다. 강물은 여전히 제 자리를 지키며 흘렀다. 강둑에 웃자란 잡풀들은 두려운 듯 미동도 하지 않다가 부드러운 표정을 드러냈다. 먹구름의 기세에 놀라 멀리 사라졌던 새들이 하나, 둘 나타났다. 그러나 빌리 옆으로 가까이 오지는 않았다.
빌리는 강과 하늘, 강둑의 풀과 새들의 표정이 바뀌는 순간 전율했다. 몸의 고통이 극한으로 치달았다가 겨우 진정을 되찾는 순간이었다. 몸은 병이 사라진 듯 편안했고 강은 더없이 고요했다. 따뜻한 기운이 빌리를 감쌌고, 강은 빌리에게 무슨 말을 걸어올 것처럼 고요했다.
그때였다. 빌리의 눈에 빗방울 하나가 보였고, 강물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가 들렸다. 주변이 고요했기 때문에 빗방울 소리는 소음과 섞이지 않고 온전했다. 오직 빗방울만의 소리로 고요한 공간을 채우는 듯했다. 빌리는 몸에서 병이 사라진 것처럼 편안했고, 강의 모든 존재들이 침묵했기 때문에 들을 수 있는 소리였다. 빌리에게는 단순한 소리라기보다는 명징한 음의 발견이자 음악 여행의 시작이었다.
빌리는 방금 들었던 빗방울 소리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빗방울 하나 속에 세상의 비밀이 다 들어있을 것만 같았다. 세상의 음악을 다 품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빌리는 자신이 왜 지금 서 있는 자리까지 걸어왔는지, 그 이유를 다 잊어 버렸다. 왜 더 이상 걸어가거나, 돌아가지도 못한 채 강둑에 서 있는지, 그 이유를 한 개의 빗방울에게 빼앗겨버린 듯했다. 빗방울 소리는 빌리를 무아(無我) 상태로 만들어 버렸다. 그렇다고 고립되거나 외롭지는 않았다. 오히려 강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과 연결된 것 같았다. 빌리는 자신이 사라져버린, 즉 무아가 된 대신에 전체가 된 충만한 느낌을 받았다. 어쨌든 허공에서 수직으로 떨어지는 빗방울이 평면의 강물에 부딪힌 순간 그 음은 멀리 퍼지기도 했고 깊이 잠기기도 했던 것 같았지만 빌리에게는 그 이상의 무엇이었다.
빗방울 소리는 빌리의 머릿속을 꽉 채웠다. 한 점에서 시작한 음이 점점 커지더니 빌리의 머릿속을 점령해 버렸다. 이제 빌리는 빗방울의 감옥에 갇혀버린 듯했다. 온전하고 순수하며 크리스털처럼 투명한 감옥이었다.
‘저 음을 다시 살려낼 수 없을까?’
‘언젠가 그렇게만 된다면 나는 지금처럼 행복할 것이다.’
어느새 옅어진 먹구름마저 흩어진 허공에는 밝은 날빛이 번지고 있었다. 드디어 돌아온 한낮의 햇살이 강물에 떨어져 반짝거렸다. 세상의 소리들이 좀 전의 적막을 깨고 들려오기 시작했다. 멀리 자동차가 달리고 새 떼가 인강으로 몰려왔다. 숨어 있던 바람이 불어와 강둑의 풀들을 흔들었다. 몬타폰으로 달리는 열차의 기적소리까지 들려왔다. 빌리는 세상의 온갖 소리에 자신이 불치의 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환기했다. 그는 죽음을 생각할 수밖에 없는 현실로 되돌아왔다.
그러나 빌리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선물을 하나 받은 것처럼 마음이 충만했다. ‘언젠가 나는 지금처럼 행복할 것이다’라는 확신에 어두운 마음속으로 빛이 하나 들어온 듯했다. 빌리는 병원으로 돌아가지 않고 인스부르크 기차역으로 향했다. 몬타폰 집으로 가기 위해서였다.
“집으로 돌아와 피아노 앞에 앉았습니다. 빗방울의 음을 찾기 위해 밤낮으로 피아노 앞에서 떠나지 않았지요. 어떤 의미에서 저의 음악 인생이 실제적으로 시작된 겁니다. 사실 저는 여섯 살쯤에 몬타폰에 살고 계신 음악선생을 찾아가 클라리넷을 배운 적이 있습니다. 당시에 그랜드 피아노를 가지고 계신 분이었어요. 나이가 드신 노인이셨는데 클라리넷을 가르쳐준 대로 불지 못하면 제 귀를 잡아당기는 벌을 주곤 했어요. 저는 개울가에 있는 그 선생님 댁을 가기 싫어 아버지께 말씀드렸지요. 그랬더니 그 이후부터 아버지께서 클라리넷은 물론 피아노, 바이올린까지 직접 가르쳐 주셨어요. 목수였지만 아버지께서는 작곡을 하실 만큼 음악적 재능이 뛰어난 분이었는데 저의 음악 교사였던 셈이지요.”
“빗방울 음은 어떻게 찾았습니까?”
“몇 달 만에 피아노 건반에서 찾았습니다.”
“그때 그 기분은 춤이라도 췄을 것 같은데요.”
“저는 먼저 제 불치병과 빗방울이 떨어지는 순간 인강의 고요함이 떠올랐어요. 감사의 기도를 했지요.”
“빌리 선생을 괴롭혔던 불치병에 감사했다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동양의 고승들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 자기 몸을 학대합니다. 그리하여 자기 성품을 발견하고(見性) 끝내는 크게 깨달음을 얻는다고(大悟) 합니다. 부처님도 위없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 6년 동안 고행했습니다.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당신의 몸을 학대한 이후 위없는 깨달음을 성취했습니다. 물론 부처님은 고행이 극단적인 방법이라는 것을 알고서는 깨닫기 전에 버렸고, 제자들에게는 권유하지 않았습니다. 빌리 선생의 경우 자신이 원한 것은 아니었겠지요. 어쨌든 빌리 선생의 불치병은 결과적으로 동양 선사들의 고행을 연상시킵니다.”
빌리 씨는 웃기만 했다. 그런 뒤 빌리 씨는 복도에 있는 피아노 쪽으로 가자고 손짓했다. 건반 앞 책상에는 메모 용지와 악보들, 볼펜이 가지런히 정돈돼 있었다. 정 작가는 그것들에서 빌리 씨의 섬세하고 깔끔한 성품을 짐작했다. 빌리 씨가 의자에 앉더니 바로 피아노 건반 하나를 길게 눌렀다.
“이 한 음으로는 빗방울 소리를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정 작가는 빌리 씨가 누른 건반에서 ‘도’ 소리를 들었다. 저음의 ‘도’는 빗방울이 강물에 떨어져 깊이 침잠하는 소리를 내는 듯했다. 빌리 씨는 또다시 다른 건반을 눌렀다.
“역시 이 한 음으로도 빗방울 소리를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이번에 빌리 씨가 누른 건반 소리는 한 옥타브 위의 ‘솔’로 들렸데, 조금 전과 달리 빗방울 소리가 강물 위를 퍼져가는 것 같았다.
“건반을 하나씩 칠 때는 빗방울 소리를 완벽하게 표현하지 못했는데, 지금 두 건반을 동시에 칠 테니까 들어 보세요. 이게 그때 제가 들었던 빗방울 소리입니다.”
정 작가도 두 개의 건반에서 합쳐지는 소리가 좀 전에 하나씩 쳤을 때와 다르다는 것을 이해했다. 소리가 공간을 채우고 있는 듯한 미묘한 차이였다.
빌리 씨는 다시 정 작가를 거실로 안내했다. 정 작가는 좀 전에 앉았던 의자에 앉았고, 권 회장은 통역을 계속했다.
“정 작가님께서 방금 들었다시피 건반 하나를 쳤을 때 그 음은 그때 제가 강에서 들었던 빗방울 소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음 하나로는 나타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지요. 마치 빗방울이 떨어져 튀어 나가 버린 듯했고, 흘러가 버린 듯했으니까요. 다른 건반을 함께 치자 상품으로 비유하자면 완성품이 됐어요. 그러니까 한 음은 아무것도 아니지요. 미완성품이니까요. 제 결론은 두 음이 함께해야 완성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빌리 선생의 음악 여행은 빗방울 소리의 의문에서 시작된 것이군요. 동양의 불교 수행자들은 그것을 화두라고 합니다. 화두 중에 대표적인 ‘이것은 무엇인가?’라는 것이 있습니다. 화두란 질문은 있지만 정해진 해답이 없습니다. ‘이것이 무엇인가?’라는 화두의 답이 각각 다르기 때문입니다. 또한 화두는 머리로 헤아려 답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빌리 선생이 빗방울 소리를 찾기 위해 밤낮을 잊고 피아노 앞에 앉아 있었듯 수행자들은 화두를 스승에게 받은 뒤 일주일, 몇 달 혹은 몇 년 동안 의문에 휩싸인 채 지냅니다. 그러다 보면 의문이 머리와 온몸을 지배하게 됩니다. 수행자 자신이 의문덩어리가 된다는 것이지요. 그런 차원에서는 낮에 움직일 때나 밤에 잠을 잘 때나 꿈을 꿀 때나 의문덩어리가 사라지는 법이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의문덩어리가 깨지는 것은 한순간이라고 합니다. 어떤 자극에 의해 수행자 자신이 의문덩어리에서 빠져나오게 되는데, 그 순간 화두의 비밀을 깨달아버린다고 합니다. 얼마나 통쾌하겠습니까? 그 순간에 기뻐서 춤을 추는 수행자도 있고, 대성통곡을 하는 수행자도 있다고 하니까요.”
“아, 맞아요. 학교에서 음악을 정식으로 공부해본 적이 없는 열일곱 살의 제가 빗방울 소리를 찾아낸 것도 그러한 과정을 엇비슷하게 거쳤던 것 같습니다. 기뻤던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고요.”
권 회장이 웃으며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두 분은 서로 다른 언어를 쓰시면서도 제가 통역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서로의 생각을 이해하시고 있네요.”
실제로 빌리 씨는 한국어를 모르고, 정 작가는 독일어를 모르는 처지였다. 그런데도 대화를 주고받는 동안 서로의 생각을 이해하면서 이견 없이 공감했다. 빌리 씨는 빗방울 소리에 이어 자연의 음을 악기로 표현하는데 자신의 경험을 더 이야기했다. 예컨대 피아노를 치면 70%쯤 표현할 수밖에 없지만 다른 악기로 부족한 점을 채울 수 있다는 것이었다. 첼로와 클라리넷, 비올라 등의 악기로 100% 표현할 수 있다고 말했는데, 클리어한 확실한 경험이라고 덧붙였다.
어느새 벽시계는 오후 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하루에 한 번만 식사하는 빌리 씨의 점심시간은 이때쯤인 듯했다. 빌리 씨가 일어나더니 주방으로 갔다. 정 작가는 고기가 빠진 빌리 씨의 채식 요리를 기대했다. 정 작가 역시 유럽 사람들이 좋아하는 소고기를 먹지 않기 때문이었다.<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