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암(漢嚴)3 

자식 같은 제자

한암은 50세 되던 1925년 서울 근방의 봉은사(奉恩寺)의 조실 스님으로 있었다. 그러나 그는 곧 차라리 천고에 자취를 감춘 학이 될지언정 상춘에 말 잘하는 앵무새의 재주는 배우지 않겠노라 맹세하며 다시 오대산에 들어갔다. 그 후 27년 동안 그는 동구 밖도 나오지 않은 채 76세의 나이로 일생을 거기서 마쳤다. 그때 그의 법랍은 54세였다. 그는 오대산에 처음 들어올 때 소지했던 단풍나무 지팡이를 중대(中臺) 뜰 앞에 꽂았다. 그림자를 재어보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그 지팡이가 꽂힌 자리에서 잎사귀와 가지가 돋아나와 하나의 훌륭한 정자나무가 되었다.

한암은 경허의 마지막 제자이며 애제자였다. 경허가 북방으로 자취를 감추기 전 함께 떠나기를 권유했으나 한암은 간곡히 거절했다. 누구에게도 동행하기를 권유한 적 없는 경허. 그런 그가 한암에게만은 동반을 요구했다. 무언가 달랐던 것이다. 그 걸출한 제자들 중에서도 한암만은 스승 경허에게 달랐던 것이다. 경허가 한암과의 이별을 아쉬워하며 전한 아래의 전별사에 그 까닭이 숨어있다.

“나는 천성이 인간 세상에 섞여 살기를 좋아하고 겸하여 꼬리를 진흙 가운데 끌고 다니기 좋아하는 사람이다. 다만 스스로 삽살개 뒷다리처럼 너절하게 44년의 세월을 보냈는데 우연히 해인정사에서 한암을 만나게 되었다. 그의 성행(性行)은 순직하고 학문이 고명하여 한 해를 같이 지내는 동안에도 평생 처음 만난 사람같이 생각되었다. 그러다 오늘 서로 이별하는 마당을 당하게 되니 실로 아침의 굴뚝연기와 저녁 무렵의 구름이 멀리 혹은 가까이 산과 바다로 흩어지는 모양이 맞이하고 보내는 회포를 뒤흔들지 않는 것이 없다.

하물며 덧없는 인생은 늙기 쉽고 좋은 인연은 다시 만나기 어려운즉 이별의 섭섭한 마음이야 더 어떻다고 말할 수 있으랴. 옛사람이 말하기를 “서로 알고 지내는 사람은 천하에 가득하지만 진실로 내 마음을 아는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되랴?”하지 않았는가. 과연 한암이 아니면 내가 누구와 더불어 지음(知音: 마음이 통하는 친한 벗)이 되랴? 그러므로 여기 시 한 수를 지어 뒷날에 서로 잊지 말자는 부탁을 하노라.”

이 전별사를 쓴 사람은 이미 예전의 무도(無道) 경허가 아니었다. 그 잔잔함, 그 부드러움 그리고 함께 할 수 없는 제자에 대한 안타까움. 경허는 어쩌면 한암을 속세 육친의 자식처럼 사랑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언제나 한없이 그리워만 하는 대상으로. 그리고 다음의 한 수를 한암에게 보낸다.

捲將窮髮垂天翼       

向槍楡且幾時              

分離尙矣非難事          

所慮浮生杳後期 

볼모지의 변방장수가 철익을 갖추어 입은들

그 언제 창을 꼬나 잡을꼬.

이별은 늘 있는 일이어서 어려운 일 아니련만

떠도는 삶 묘연하니 어찌 뒷날을 기약하랴.

경허의 전별사를 받은 한암은 스승을 따라나서지 못하는 면구함을, 그 송구함을 천대를 가도 변치 않을 이별시로 준비했다. 쓸쓸한 길 위에서의 만남, 아니면 두 개 구름으로 한 번의 만남. 그래서 그들이 만나면 천둥이 치고 비가 왔다. 아니 벼락이 쳤다. 그리고 가슴 아픈 작별.

霜菊雪梅過了         

如何承侍不多時         

萬古光明心月在       

更何浮世謾留期        

서리 맞은 국화 눈 속의 매화 이미 져버렸는데

어찌하여 많은 시간을 모실 수 없을까.

만고의 밝음이 마음속 달인 듯 있거늘

어찌 부질없는 세상의 기약을 남기리오.

그리고 한암은 스승 경허와 헤어졌다. 그리고 경허는 제자 한암과 헤어졌다. 부질없는 세상, 일말의 기약마저 남기지 않은 채.(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