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월(慧月)2  - 천진불 혜월 - 

혜월은 항상 어린애 같았으며 철없는 아이와 같아 ‘천진불’이라 불렸다. 그러나 혜월은 글을 전혀 모르는 까막눈이었다. 평생 글을 배우지 않은 것이다. 그가 무식한 자신을 얕보던 자들을 골탕 먹인 적이 있었다. 어느 날 강원에 나타난 혜월은 죽비를 장판 위에 힘껏 굴리면서 강사들에게 물었다.

“장판 위에 죽비 구르는 글자가 무엇이오?”

그러나 강사들은 아무리 궁리하여도 수수께끼를 풀지 못했다. 혜월은 지그시 웃었다.

“이 사람들아, 그렇게 쉬운 글자도 모른단 말인가? 임금 왕(王) 아닌가?”

“어째서입니까? 어째서 장판 위에 죽비가 굴러가는데 그것이 임금 왕 자입니까?”

“땅 위에 한 일(一) 자가 누웠으니 임금 왕이지. 땅이면 흙 토(土)이고, 흙 토 위에 한 일 자면 임금 왕 자니까. 자네들 유식하다고 잘난 체들 하지 말게. 자네들이야말로 임금 왕 자도 모르는 까막눈들이니까 말이야.”

혜월이 부산 선암사에 있을 때 칼에 미친 헌병대장이 혜월이 천하의 명검을 갖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왔다. 그는 검을 보여 달라고 조르는 헌병대장의 뺨을 갈겨 버렸다. 섬돌 아래로 떨어진 헌병대장은 화가 치밀었는데 혜월은 그를 일으켜 주며 말했다.

“이것이 내가 갖고 있는 천하의 명검이오. 당신을 때려 떨어뜨린 손은 당신을 죽이는 칼이고, 당신을 부축하여 일으켜 세운 손은 당신을 살리는 칼이오.”

혜월은 평생 무소유의 삶을 철저하게 지켰다. 평생 손에서 괭이와 지게를 놓은 적이 없었다. 혜월은 하루에 2시간 이상 잠을 자지 않았는데 그중 가장 열심히 했던 일은 땅을 파고 농사를 짓는 일이었다. 항상 가는 곳마다 거친 땅을 일궈 혜월은 ‘개간 선사’라 불리기도 했다. 그야말로 혜월은 11세의 어린 나이로 동진출가하여 평생 11세 나이 그대로 천진을 간직한 천진불이다. ‘귀신도 천진불 혜월은 속이지 못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남의 말을 그대로 믿어버리는 무심도인(無心道人) 혜월.

그가 선암사에 머무르고 있을 때였다. 어느 날 시내에 볼일을 보기 위해 산을 내려가던 혜월은 지친 발걸음을 쉬어가기 위해 산 밑 오막살이에 들르기로 하였다. 이 오막살이는 절 오르는 길목에 있었고, 절에 딸린 밭을 과부가 부치고 있었다. 하여 절 식구들과는 무관하지 않은 사이였다. 과부가 절의 허드렛일도 봐주었기 때문이었다. 툇마루에 앉아 쉬던 혜월은 무심코 방문을 열었다. 그러자 이상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대낮인데도 방안에는 이불이 깔려 있고, 벌거벗은 부목(負木)과 과부가 나란히 누워있는 장면과 맞닥뜨리게 된 것이다. 그 부목은 선암사에서 고용하고 있는 일꾼으로 몸이 건장하고 일도 열심히 해 혜월의 신임을 받고 있었다. 마침 그날 아침에는 그 부목이 소를 끌고 장에 가 물건을 사 오기 위해 일찌감치 절을 나섰다. 물건을 사러 새벽 일찍 절을 나선 부목이 과부의 집 안방에 벌거벗은 채 누워 있고, 과부 또한 평소에는 밭에 앉아 김을 매고 있을 대낮에 그처럼 벌거벗고 누워있던 것이다. 그 모습을 보고 놀란 혜월은 다음과 같이 물었다.

“자네는 소를 끌고 장을 보러 나갔는데 장에는 안 가고 왜 여기 있는가?” 

그러자 부목은 엉겁결에 거짓말을 하였다. 

“장을 보러 가다 갑자기 배가 아파 이 집에 들렀습니다. 스님, 너무나 배가 아파 꼼짝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벌거벗고 누워있는 것입니다.”

“자네는 배가 아파 그럴 수 있다지만 과부댁은 왜 밭에 나가 있지 않고 대낮에 방문을 닫고 누워 있는가?”

과부도 할 수 없이 대답했다. 

“저도 배가 아파 누워 있는 것입니다. 큰스님.”

“야단났군.” 

방문을 닫은 혜월은 시내로 가려던 것도 잊고, 다시 절로 돌아오며 연신 중얼거리고 있었다.

“야단났다. 두 사람이 배가 아파 야단났다. 야단났어!”

헐레벌떡 선암사로 되돌아온 혜월은 절문을 들어서기 무섭게 공양주를 불렀다. 공양주가 부엌에서 뛰어나오자 혜월은 급히 말했다.

“빨리 흰죽을 쑤게!”

영문을 모르는 공양주가 혜월에게 물었다. 

“갑자기 흰죽을 쑤라니요. 어디 편찮으십니까?”

그러자 혜월이 대답했다.

“내가 아픈 게 아니라 부목이 아파 죽을 쒀서 갖다 줘야겠다.”

“부목이 배가 아프다니요? 아침까지 멀쩡하던 사람이요?”

공양주의 물음에 혜월이 걱정스런 얼굴로 대답했다. 

“부목만 아픈 게 아니다. 아랫마을 과부댁도 배가 아프다. 그래서 두 사람이 벌거벗고 함께 누워있다. 빨리 두 사람에게 흰죽을 쒀서 갖다 줘야겠다.”

그제야 혜월의 말을 듣고 있던 대중들은 혜월이 아랫마을 과부 집에서 무엇을 보고 왔으며 과부 집 안방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던가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들은 모두 입을 씰룩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건장한 부목과 과부댁 간의 심상치 않은 소문은 이미 절 사람들도 다 알고 있는 터였다. 대중들은 웃음을 참느라 야단법석이었다. 공양주는 억지로 웃음을 참으면서 죽을 쒔다. 곁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기다리던 혜월은 죽이 다 되자 죽 그릇을 들고 직접 산길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행자를 시키면 되지만 너무 아파 벌거벗고 누워있던 두 사람의 모습이 너무 불쌍해 자신이 직접 죽을 날라주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산길을 반쯤 내려가는데 배가 아파 과부와 함께 누워 있던 부목이 소를 몰고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그런데 부목의 얼굴은 멀쩡했다. 부목은 오히려 혜월에게 물었다.

“큰스님 어딜 가십니까?”

“자네한테 가고 있는 중이네.”

“아니 왜요?”

“자네와 그 젊은 과부가 배가 아프다고 하기에 죽을 쑤어 가지고 가네.”

부목은 순간할 말을 잊었다. 

“자네 배는 다 나았나? 과부댁은 어떤가? 배가 아프면 흰죽을 먹어야지. 여기서라도 훌훌 마셔두게.”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모두 믿어 버리는 천진불, 혜월. 그 자신은 한 번도 남에게 거짓말을 해본 적이 없으며 ‘거짓말’이라는 낱말의 의미조차 모르는 무구(無咎)의 성인, 그의 이름이 바로 혜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