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李) 씨 조선의 수도 서울. 서울이 이 나라의 중심으로 자리 잡으면서 우리는 적은 것을 얻었다. 그러나 우리는 얻은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잃었다. 먼저 외관으로 살펴본다면 우리의 터전이 한반도 일원으로 국한되었고, 우리의 역사는 밖으로 눈을 돌리지 못한 채 내부의 권력 다툼으로만 치달았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사실은 깊고 넓은 불교철학 대신 지극히 편협하고 현실적인 유교의 속박을 스스로 짊어졌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우리 민족만이 가지고 있던 고유의 사상체계를 잃어버린 것이다.

현실을 풍요롭게 하는 이상이 사라진 자리에는 우리를 왜소하게 만드는 사대주의가 들어앉았다. 그래서 조선의, 아니 서울 6백 년은 한편으론 대견한 일이면서도 한편으론 부끄러운 일이다. 한 번도 밖으로 날아오르지 못한 좌절의 서울 시대. 6백 년의 긴 세월을 가리켜 안타깝게도 남의 눈치만 보고 살아온 가난의 세월이었다고 하면 잘못된 말일까?

그러나 그것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아무도 탓할 수 없다. 역사는 결코 우연에 의해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손톱만 한 자신들의 이기만을 위해 내달린 우리 선조들의 그릇된 입신양명 의식이 끈질기게도 ‘작은 중화(中華)’ 이씨 조선 6백 년을 잘도 지탱해 준 것이다. 몇몇의 아주 극소수 사람들이 그 허망한 인습의 벽을 깨기 위해 깃발을 흔들었으나 그것은 언제나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청계사(淸溪寺)를 찾는다. 우리의 머리를 덧씌운 멍에를 거침없이 벗어던진 이. 우물 안 개구리가 되어 모두 올망졸망 자신들이 바라보는 동그란 하늘만을 전체 하늘이라고 탁상공론할 때 결코 저것만이 하늘이 아니다 일갈하며 좁은 우물 속을 뛰쳐나온 이, 경허! 그가 처음 출가삭발을 한 곳, 청계사다.

시흥시에서 가는 길, 그러니까 서울과는 반대 방향이다. 서울, 과천, 성남으로 갈라지는 안양의 인덕원 사거리를 지나 서울구치소를 조금 벗어나자 버스의 종점 청계에 이르렀다. 청계산. 서울시와 경기도의 경계를 따라 걸쳐있는 높이 618미터의 산. 서쪽에 위치한 관악산과 함께 서울의 남쪽 방벽을 이루는 산이다. 청계산은 망경대와 국사봉, 옥녀봉, 청계봉 등 여러 산봉우리로 이루어져 있다. 원래 산정에서 청룡이 승천하였다고 하여 청룡(靑龍)산이라고 불렸다. 그 청룡을 경허(鏡虛) 라고 생각하면 어떨까? ‘우리 시대의 마지막 전설’, 오래전 성철 종정의 입적 때 모든 신문은 이런 표제를 달았다. 그렇다면 경허는 ‘우리의 마지막 전설’로 불려야 한다. 불가에서는 잊을 수 없는 이름, 지울 수 없는 이름, 초인 경허의 출가초행 흔적을 찾기 위해 청계산을 오른다.

‘성철 종정의 삶이 어째서 그리 많은 사람들의 반향을 불러일으켰을까?’라는 의문을 가진 사람이면 반드시 경허의 삶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시대는 다르지만 성철, 경허 모두 ‘굵은 삶(生), 빈손(無所有), 불타는 구도열(勇猛精進)’에 있어 한 치의 다름이 없다. 경허가 처음 출가삭발을 한 곳이 청계산의 청계사다. 물론 지금의 청계산은 기록으로는 모두 시흥의 관악산으로 되어있다.

石路千崖盡 

香煙一室淸 

客來求煮茗 

僧坐自飜經 

樹老何年種 

鍾殘半夜聲 

悟空人事絶 

高臥樂無生 

돌길은 일천 언덕에 다 이르고

향 연기는 방안에 맑게 피어오른다.

객이 찾아와 차 끓이기를 구하고

스님은 앉아 스스로 경전을 뒤적인다.

나무는 늙었으니 어느 해에 심었는고.

종은 쇠잔하니 한밤중의 소리로다.

공을 깨달아 인사를 끊었으니 

높이 누워 무생함을 즐거워하노라.

              - 제청계산행상인원(題靑溪山行上人院)

조선 초 뛰어난 시인이었던 변계량(卞季良)이 청계산을 찾아 남긴 시다. 그러나 당연히 돌길은 없다. 겉보기에는 맑아 보이는 계곡의 물들은 꽁꽁 언 채 숨을 죽이고 있다. 나무들도 모두 죽은 것만 같다. 봄은 아직 우리들의 가슴속에만 있는지도 모른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