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정안 스님은 뒷산으로 올라갔습니다.
뉘엿뉘엿 해가 지고 있었습니다. 한눈에 보이는 마을, 집집마다 연기가 타올랐습니다. 정안 스님은 추운 줄도 모르고 쪼그려 앉아 동구 밖을 내려다보았습니다. 물감을 풀어놓은 것보다도 더 푸르른 저수지, 앙상한 미루나무.
정안 스님은 오지 않는 할머니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단 하룻밤을 같이 보냈을 뿐인데도 너무나 할머니가 그리웠습니다. 많은 이야기를 나눈 아버지와는 달랐습니다. 할머니의 주름진 얼굴은 정안 스님의 가슴에 박혀있었습니다.
정안 스님은 목소리를 가다듬었습니다. 그리고 큰소리로 외쳤습니다.
“할머니!”
“할머니!”
그러나 그 목소리는 메아리로 되돌아올 뿐이었습니다. 할머니는 끝내 그 저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또다시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습니다. 이윽고 밤하늘에 별이 나타났습니다. 정안 스님은 터벅터벅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림 이성민
아침을 먹은 것밖에 없는데도 배가 고프지 않았습니다. 정안 스님은 마루에 불을 켰습니다. 방에도 불을 켰습니다. 그리고 부엌으로 들어갔습니다. 얼마 남지 않는 나무를 아궁이에 밀어 넣고 불을 지폈습니다. 불암사에서도, 포리암에서도 불 당번은 항상 도맡아 하였던 정안 스님이었습니다.
하루 중에 아궁이 옆에 앉아서 불을 피울 때가 가장 좋았습니다. 얼굴도 몰랐던 엄마, 아버지의 얼굴을 떠올려보고, 그동안 지냈던 절에서의 즐거운 생활도 생각하는 시간이었습니다. 활활 타오르는 불을 보고 있으면 공연히 가슴이 훈훈해졌습니다.
정안 스님은 할머니가 쓰던 반질반질 윤이 나는 부지깽이를 들고 불 옆에 앉았습니다. 바람이 부엌문을 덜컹이고 지나갔지만 정안 스님은 조금도 무섭지 않았습니다. 정안 스님의 머릿속엔 오직 할머니 생각뿐이었습니다.
봄이 오는 길목이기는 하지만 은학리의 바람은 거셌습니다. 집을 날려버릴 듯이 세차게 불었습니다. 정안 스님은 방으로 들어갈 생각도 하지 않고 언제까지나 부엌에 앉아 있었습니다. 결국 정안 스님은 부뚜막에 앉아 그만 살포시 잠이 들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얼마나 많은 시간이 지났을까.
타박타박.
타박타박.
밖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렸습니다. 워낙 잠기가 밝은 정안 스님은 번쩍 눈을 떴습니다. 발자국 소리는 마당에 와서 멈췄습니다. 정안 스님은 그 발자국 소리의 주인공이 할머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얼른 문을 열었습니다. 그러나 마당에 서 있는 사람은 뜻밖에도 웃절 적멸암의 스님, 더 정확하게 말하면 아버지였습니다.
정안 스님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스님을 쳐다보았습니다.
“어린 스님 아직 안 가셨군요?”
정안 스님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습니다.
“혹시나 해서 들렀습니다.”
“할머니가 나가셔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정안 스님은 간단하게 대답하였습니다.
적멸암 스님이 고개를 끄덕거렸습니다.
“아마 할머니는 오시지 않을 겁니다.”
적멸암 스님의 얼굴은 아주 편안했습니다.
정안 스님은 다시 부뚜막에 앉았습니다. 그리고 무심히 부지깽이로 다 꺼진 아궁이의 불씨를 해쳤습니다. 적멸암 스님이 조용히 부엌으로 들어왔습니다. 정안 스님은 아무런 할 말이 없었습니다. 어서 적멸암 스님이 절로 돌아가 주기를 바랐습니다.
“난 할머니가 가신 곳을 알고 있습니다.”
“......?”
정안 스님이 고개를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그곳을 어린 스님께 가르쳐드릴 수는 없지요. 할머니가 그것을 원하지 않을 테니까요.”
정안 스님은 다시 고개를 숙인 채 듣고만 있었습니다.
“내가 오늘 어린 스님과 함께 여기서 하룻밤 묵고 갈까 하는데 괜찮겠지요?”
정안 스님은 두 발로 부엌 바닥을 파고 있었습니다.
밤새가 울었습니다.
바람이 불었습니다.
나란히 자리에 누운 정안 스님도, 적멸암 스님도 말이 없었습니다. 정안 스님은 떠나간 할머니만 생각하였습니다. 밤은 점점 깊어 가는데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적멸암 스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정안 스님은 가슴이 울렁거렸습니다. 거센 밤바람소리가 끊임없이 끝말랑이집 앞마당을 휩쓸고 지나갔습니다.
“내일 가야지요?”
억지로 적멸암 스님이 말을 꺼냈습니다.
그러나 정안 스님은 대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할머니가 올 때까지 언제까지나 기다리고 싶었습니다. 이제 끝말랑이집은 낯선 집이 아니었습니다. 정안 스님은 어제와는 달리 아주 편했습니다. 할머니의 냄새가 곳곳에 배어있었습니다.
“이제 이곳에 다시는 오지 마세요?”
적멸암 스님은 다시 타이르듯 말했습니다. 그래도 정안 스님은 말이 없었습니다. 정안 스님은 적멸암 스님의 말을 듣지 않고 있었습니다. 정안 스님의 귀는 오직 마당으로만 가 있었습니다. 혹시나 할머니가 돌아오시지 않을까 하는 바램뿐이었습니다. 사각사각 가랑잎 구르는 소리가 났습니다.
적멸암 스님이 긴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정안 스님은 죽은 듯 꼼짝 않고 있었습니다. 미리 군불을 많이 땐 탓으로 방안은 더웠습니다. 불에 달궈진 장판 냄새와 흙냄새가 코를 찔렀습니다. 정안 스님은 여태 잠깐씩 묵었던 어떤 절에서도 이렇게 편하지 못했습니다. 이곳은 냄새조차 달랐습니다.
“내 말 듣고 있어요?”
적멸암 스님이 자꾸 말을 붙였습니다. 그렇지만 정안 스님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냥 가만히 지난 일을 생각하고 싶었습니다. 불암사와 포리암, 그리고...... 학교에서 마주쳤던 많은 친구들......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보던 아이들과 선생님들...... 그러자 괜스레 눈물이 흘렀습니다.
“부처님 법을 공부하는 것은 정말 어렵고도 힘든 일이지요. 그러자면......”
그때 정안 스님이 적멸암 스님의 말을 가로막았습니다.
“할머니가 어디 가셨는지 가르쳐주세요?”
정안 스님은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적멸암 스님이 다시 한숨을 쉬었습니다.
“아까 말했잖아요. 그건 알려줄 수 없다고. 그건 할머니에게나 어린 스님에게나 소용없는 일이에요. 내일 아침에 포리암으로 가요. 거기서 학교 부지런히 다니고, 부처님 공부도 열심히 하고......”
“전 부처님 공부하기 싫어요!”
정안 스님은 자기도 모르게 아주 큰소리로 말했습니다.
이번에는 적멸암 스님이 입을 다물었습니다.
“저는 절에서 살고 싶지 않아요. 노스님도 싫고, 공양주 할머니도 싫어요. 저도 머리를 기르고 아이들과 운동장에서 놀고 싶어요. 어려운 한문도 싫고 목탁도 싫어요. 전......”
그러나 정안 스님도 더 이상은 말하지 못했습니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산처럼 쌓여있는데도 그것은 말이 되어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습니다. 다른 아이들처럼 엄마 아버지가 살고 있는 집에서 살고 싶다는 그 말은 하지 못했습니다. 다른 아이들과 똑같이 눈 두 개가 올바로 달린 모습으로 살고 싶다고 이야기하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속은 아주 후련했습니다. 그 누구에게도 하지 못했던 말을 적멸암 스님에게 한 것입니다.
적멸암 스님은 새벽이 올 때까지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정안 스님도 더 이상 할 말이 없었습니다. 아랫마을에서 닭 우는소리가 들렸습니다. 경운기 소리도 들렸습니다. 어느새 뿌옇게 날이 밝아오고 있었습니다. 그때야 비로소 정안 스님은 잠이 들었습니다. 가물가물 하얗게 머리가 센 할머니의 얼굴을 그리면서.
정안 스님이 눈을 떴을 때는 날이 환하게 밝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옆자리는 비어 있었습니다. 그래도 이상하게 아무런 느낌이 없었습니다. 정안 스님은 천천히 일어나 앉았습니다. 지난밤이 마치 꿈같이만 여겨졌습니다. 이제 언제 만날지도 모르는 아버지, 정안 스님은 적멸암 스님의 얼굴을 그리면서 벽에 기대었습니다. 그리고 무심히 방문을 열었습니다. 쏟아지는 햇볕은 이미 겨울이 멀리 갔음을 알렸습니다. 하나도 슬프지 않은데 눈물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한 장의 편지를 주워들었습니다. 적멸암 스님이 써놓고 간 편지였습니다.
정안 스님.
난 머리를 깎고 출가한 후 처음 마을에서 잠을 잤지. 아마 앞으로 내 평생 동안 마을에서 잠을 자는 일은 없을 거야. 정안 스님이나 나나 모두 부처님 법을 공부하는 불제자, 우리가 할 일이 무엇인지는 노스님에게 배워 잘 알고 있겠지.
난 옆에서 누워 쌔근쌔근 잠을 자는 정안 스님을 보면서 밤을 새웠지. 한순간이었지만 다시 절로 돌아가기 싫었지. 정안 스님을 데리고 마을에서 함께 살까를 생각했지. 정안 스님의 코에서 나오는 고소한 냄새를 맡으면서 난 정안 스님의 엄마를 생각했지. 정안 스님 엄마는 정안 스님이 세 살 때 세상을 뜨고 말았어. 어쩌면 정안 스님은 그렇게도 엄마를 닮았는지.
정안 스님.
내가 정안 스님을 노스님에게 맡기고 출가를 한 것은 정안 스님의 엄마를 만나기 위해서야. 난 오늘도 내일도 간절히 기도를 해. 이다음 세상에 꼭 정안 스님 엄마를 만나게 해달라고. 부처님께는 죄송하지만 난 정안 스님 엄마를 위해 지금도 산에 살고, 앞으로도 절에서 살 거야.
이렇게 마지막 인사를 편지로 대신하는 것은 내일 아침이면 도저히 정안 스님을 두고 떠날 수 없을 것 같아서 지. 이제 내가 정안 스님을 만날 일도, 정안 스님이 날 만날 일도 없을 거야. 그렇지만 언젠가는 모두 만나게 되겠지. 내가 바라는 불국토는 정안 스님 엄마와 정안 스님, 그리고 내가 세세생생 함께 살 수 있는 곳이야. 아미타 부처님도 좋고, 미륵 부처님도 좋고, 석가모니 부처님도 좋아. 우리에게 그런 날을 만들어줄 수 있는 부처님을 난 기다리고 있지.
정안 스님이 내 말을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정안 스님과 내 등 뒤에는 언제나 정안 스님 엄마가 있어. 눈물을 약으로 삼고, 슬픔을 힘으로 삼으면 머지않아 정안 스님은 훌륭한 불제자가 되겠지. 또 며칠을, 아니 몇 년을 정안 스님의 얼굴을 그리면서 수행을 하지 못할 것 같군. 은학리는 우리 할아버지 할아버지의 땅. 그렇지만 이제 다시는 정안 스님이 이곳으로 오지 않기를 바래. 언젠가 아주 늠름한 모습의 불제자가 되었을 때 본모습 그대로 이곳의 바람과 구름을 바라볼 수 있도록.
적멸암 스님이.
그린 이성민
정안 스님은 편지를 읽고서도 눈물을 흘리지 않았습니다. 학교에서 책을 읽는 것같이 그냥 줄줄 읽어내렸습니다. 따스한 햇볕, 적당한 바람. 아지랑이가 오르는 먼 들판을 바라보면서 정안 스님은 노스님과, 어머니, 그리고 할머니와 적멸암 스님의 얼굴을 떠올렸습니다. 그리고 이제 이곳 은학리를 떠나, 은학리뿐만 아니라 졸참나무숲을 떠나 어디론가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