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밭의 허수아비를 먹어치운 소2
-경봉스님의 바랑
그림 정윤경
소 고삐는 아이가 잡았습니다. 아이는 경봉 스님을 따라 산길을 걸었습니다. 법인 스님이 뒤따라오면서 경봉 스님에게 물었습니다.
“스님, 튼튼한 황소를 놔두고 왜 이 조그만 암소를 사셨습니까?”
“아이가 좋아하니 됐다. 더 무엇을 생각하겠느냐.”
“밭을 일구려면 황소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법인아, 부처님이 계신다면 어떻게 행동하시겠느냐. 황소를 사서 밭을 일구시겠느냐, 암소를 사서 아이를 기쁘게 하겠느냐.”
“아이를 기쁘게 하겠습니다.”
“아이를 기쁘게 하는 것이 극락에 가는 길이다.”
경봉 스님의 이 한 마디에 법인 스님은 크게 깨달았습니다. 극락암으로 돌아온 아이는 집으로 갈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아이의 아버지가 찾아와 데리고 가려 했지만 아이는 암소와 함께 살겠다고 말했습니다. 할 수 없이 아이아버지는 극락암을 떠났고 아이는 머리를 깎고 동자승이 되었습니다. 동자승은 암소에게 풀을 먹이는 일만 했습니다. 경봉 스님은 아이에게 아무 일도 시키지 않았습니다.
“너는 소만 키우면 된다.”
암소는 겨울을 나면서 무럭무럭 자랐습니다. 황소처럼 힘이 세졌습니다. 아이가 산속을 다니면서 부지런히 마른 풀을 구해 와서 먹인 덕분이었습니다. 봄이 되자 소는 개간한 콩밭을 갈았습니다. 젊은 스님들이 일하는 몫보다 몇 배를 더 했습니다.
하늘에 구름장이 몰려와 봄비를 뿌리려고 했습니다. 경봉 스님은 젊은 스님들을 모두 불러 모았습니다. 법인 스님은 바구니에 담아 온 콩을 젊은 스님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젊은 스님들은 콩알을 한 줌씩 호주머니에 넣었습니다. 콩밭 두둑에 묻을 콩알이었습니다. 동자승은 밭가에서 밭을 가느라고 힘들었던 암소의 등을 쓰다듬어주고 있었습니다. 경봉 스님이 말했습니다.
“콩알은 대여섯 개씩 묻어라. 너무 깊이 묻지 말고 콩알이 보일락 말락 하게 살짝 흙을 덮거라.”
동자승이 물었습니다. 동자승은 경봉 스님만 보면 묻고 싶은 것이 많았습니다.
“큰스님, 아까운 콩알을 왜 대여섯 개씩 묻습니까?”
“산비둘기나 꿩이 먹을 것까지 묻는 거지. 산비둘기나 꿩이 콩알을 보면 얼마나 먹고 싶겠느냐. 아무리 아까운 콩알이라 하더라도 나눠 먹을 줄 알아야 수행자라고 할 수 있어.”
“산비둘기나 꿩이 다 파먹지 않을까요? 큰스님.”
“욕심은 사람이 많지. 산비둘기나 꿩은 콩알을 다 먹지 않아. 콩알은 한 곳에 한두 개만 있어야 더 잘 자라지. 콩잎이 무성하면 콩은 많이 열리지 않거든.”
밀양에서 태어나 농사를 지어본 경봉 스님은 모르는 일이 없었습니다. 수행만 잘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젊은 스님들이 경봉 스님 앞에서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봄비를 맞은 콩알은 며칠 뒤 싹이 텄습니다. 그러자 산비둘기나 꿩들이 더 이상 콩밭으로 날아오지 않았습니다. 콩잎이 콩밭을 파랗게 덮자, 이제는 암자에서 키우는 소가 말썽을 부렸습니다. 동자승이 한눈을 판 사이에 소가 콩밭으로 들어가 한쪽 이랑을 덮은 콩잎을 먹어치워 버린 것입니다.
법인 스님은 경봉 스님이 알까 봐 조마조마했습니다. 젊은 스님들도 간이 콩알만 해졌습니다. 동자승은 아예 징징 울고 다녔습니다. 법인 스님은 젊은 스님들에게 말했습니다.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소?”
“큰스님께 솔직하게 말씀드려야지요.”
“그래요. 숨길 일이 아니오. 누가 말씀 드리겠소?”
아무도 나서지 않았습니다. 할 수 없이 법인 스님이 경봉 스님 방으로 들어가 털어놓았습니다.
“스님, 소가 콩밭으로 들어가 한쪽 이랑의 콩잎을 다 뜯어먹어버렸습니다.”
“허허허. 그래도 한 이랑만 뜯어먹은 것이 다행이구먼.”
뜻밖에도 경봉 스님은 야단을 치지 않았습니다. 마치 콩잎을 뜯어먹은 소 편을 드는 것 같았습니다.
“소가 잘 먹었으면 됐네. 어찌하겠는가.”
“앞으로는 소를 잘 단속하겠습니다.”
“콩깍지 안에 콩알이 들게 되면 소보다는 산비둘기나 꿩들을 지켜야 돼.”
경봉 스님의 말씀은 지혜로웠습니다. 콩이 여물면 산비둘기나 꿩들이 날아와 먹어치울지도 모르기 때문이었습니다.
“스님, 동자승이 콩밭을 지키게 할까요?”
“소는 누가 보고?”
“그럼, 젊은 스님들이 돌아가면서 보게 할까요?”
“젊은 스님들도 하고 싶은 공부 해야지.”
경봉 스님이 말한 공부란 염불이나 참선, 경전 읽기나 기도 등이었습니다. 경봉 스님은 무엇을 강요하지 않고 자신에게 맞는 공부를 하라고 당부했습니다.
“방법이 하나 있네. 법인은 내 말대로 하게.”
“스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따르겠습니다.”
“억새나 갈대를 꺾어 허수아비를 만들게. 모자만 씌워 놓으면 산비둘기나 꿩들이 날아오지 못할 거네.”
법인 스님은 당장 억새풀로 허수아비를 만들어 콩밭에 꽂았습니다. 모자는 여름 내내 쓰다가 챙이 찢어져 골방 한쪽에 밀쳐둔 밀짚모자를 이용했습니다. 콩밭 가운데 허수아비가 서 있자, 조그만 산새들이 무서운 듯 가까이 다가오지 못했습니다. 밤에만 나타나는 노루나 고라니도 콩밭으로 넘어오지 못했습니다. 콩밭을 제 집처럼 들락거리던 산비둘기나 꿩들도 허수아비가 무서운 듯 날아오지 않았습니다. 법인 스님은 올 콩농사는 풍년이겠구나 하고 안심했습니다. 다른 스님들도 같은 생각을 하면서 콩밭을 지나칠 때마다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또다시 소가 큰일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외양간에 매어둔 고삐가 풀어져 소가 마음대로 콩밭을 누빈 것이었습니다. 달이 뜬 한밤중에 일어난 일이어서 누구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아침에 보니 콩밭은 물론 허수아비까지 먹어치운 상태였습니다. 법인 스님은 놀라 쓰러질 정도였습니다. 동자승은 암자를 떠나 부모에게 돌아가겠다고 울었습니다. 젊은 스님들도 낯빛이 변한 채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경봉 스님도 아침 산책길에 쑥대밭이 된 콩밭을 보았습니다. 경봉 스님은 말없이 암자로 돌아와 법인 스님에게 젊은 스님들을 불러오도록 지시했습니다. 젊은 스님들이 발걸음 소리를 죽이며 경봉 스님 방으로 들어왔습니다. 동자승은 맨 나중에 들어와 방 한쪽에 앉아서 훌쩍거렸습니다. 이윽고 경봉 스님이 나직이 입을 열었는데, 젊은 스님들에게 꾸중을 하는 것이 아니라 소를 칭찬했습니다.
“공부할 때는 우직해야 한다. 콩밭을 짓밟고 허수아비까지 먹어버린 소처럼 맹렬하게 공부해야만 한다. 그래야 뜻을 이룰 수 있다.”
불벼락이 내릴 줄 알았던 법인 스님은 한 번 더 놀랐습니다. 허수아비까지 먹어치운 소를 칭찬하고 있으니 그럴 만도 했습니다. 경봉 스님의 말씀에 동자승이 울음을 그쳤습니다. 경봉 스님은 손뼉을 치며 하하하 웃기까지 했습니다.
“공부할 때는 산짐승이나 새처럼 허수아비를 의심하지 말거라. 자기 신념을 믿어라. 나아가 콩밭을 짓밟고 허수아비를 먹어버린 소가 되거라. 그것이 공부하는 수행자의 굳은 자세다. 걱정하지 마라. 콩농사야 내년에 잘 지으면 되지 않겠느냐.”
경봉 스님의 한 마디에 젊은 스님들은 공부할 결의를 꾹꾹 다졌습니다. 모두 우직한 소가 되어 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이후 법인 스님은 콩밭을 맹렬하게 짓밟은 소처럼 무섭게 공부했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통도사 주지스님이 되었고, 동국대학교 이사장이 되었습니다.<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