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
방학이 시작되어도 정안 스님의 생활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새벽 5시에 일어나서 저녁 10시에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더구나 노스님께서는 자리에 누워 계시는 시간이 점점 많아졌습니다. 어떤 땐 밤새도록 기침을 하실 때도 있었습니다. 정안 스님은 노스님 곁을 떠나지 못했습니다.
포리암에는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노스님께서 외부 사람들을 만나지 않기로 한 것입니다. 포리암은 사람들이 사는 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았지만 적막하기 짝이 없습니다. 오히려 깊은 산속의 가리왕산 불암사보다 사람이 오지 않았습니다. 올해는 유난히 눈이 많이 내렸습니다. 낮은 졸참나무숲은 항상 눈으로 덮여 있습니다.
“얼른 일어나셔야지요?”
“보살님, 오래된 고물차는 언제 어디서 멈출지 몰라요. 멈추기 전에 여기저기 고장이 많지요.”
“스님은 고물차 아닙니다.”
“흐흐흐! 고물 사람이지요. 내가 올봄까지 살아있을꼬.”
할머니는 두 손으로 눈물을 찍었습니다.
그러나 노스님은 웃었습니다.
“이번 설날엔 고향에 가신다고 하시구선.”
“내가 못 가면 우리 정안이가 대신 가면 되지요. 보살님, 우리 고향 위치나 잘 알려줘요. 거기 가면 옛날 옛적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 아버지 어머니......”
“그만하세요.”
“눈이 많은 해에 가면 관세음보살님 만날 수 있다고 하던데......”
노스님은 웃으면서 이야기하셨지만 얼굴은 너무 창백했습니다.
“내가 노스님을 20년 동안 모셨는데.. 이렇게 편찮으신 것은 처음이에요.”
공양주 할머니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태세였습니다.
“보살님. 내 걱정 할 것 없어요. 괜찮으시다면 정안이 데리고 불암사 좀 다녀오세요. 방학인데 정안이도 가고 싶지 않겠어요?”
“작은 스님은 노스님 두고는 한 발짝도 안 움직여요.”
할머니가 정안 스님의 말을 대신하였습니다.
정안 스님은 혼자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가고 싶기는 하였습니다. 그렇게 죽도록 싫었는데 막상 그곳을 떠나보니 그곳이 그리웠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첩첩산중, 입김을 얼려버릴 것 같은 추위, 파도 같은 바람 소리, 특히 함께 생활하던 사형 스님들이 그리웠습니다.
아마도 틀림없이 부엌에 앉아서 불을 때며 자기의 얘기를 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말을 듣지 않는다고 벌을 세울 때는 죽도록 미웠지만, 보고 싶었습니다. 떠나올 때 인사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이 후회가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 그곳으로 갈 수는 없습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정안 스님은 예불 때마다 부처님께 빌고 또 빌었습니다. 노스님의 병을 낫게 해달라고 비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학교에 가지 않게 해달라고 빌었습니다. 노스님은 아침저녁 예불도 드리지 못했습니다. 정안 스님 혼자 목탁을 치고 염불을 외웠습니다.
벌써 개학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정안 스님은 방학숙제는 하나도 하지 못했습니다. 불암사 스님들도 학교 숙제를 안 했다고 정안 스님을 혼내지는 않았습니다. 정안스님도 방학 숙제에는 관심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노스님은 달랐습니다.
“이놈, 절 공부 따로 있고 학교 공부 따로 있는 줄 알아!”
노스님은 정안 스님을 무섭게 혼냈습니다. 불암사에서보다 몇 배나 더 많은 매를 맞았습니다. 정안 스님은 시간이 갈수록 노스님이, 포리암이 싫어졌습니다. 멀리멀리 다른 절로 가고 싶습니다.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먼 곳으로.
눈부신 겨울 햇볕.
이름도 알 수 없는 산새들이 절 마당에 내려와 짹짹거렸습니다. 정안 스님은 고드름이 녹아떨어지는 요사채 처마 밑에 쪼그리고 앉아 있습니다. 어디론가 가고 싶습니다. 누군지 알 수는 없지만 사람이 보고 싶습니다. 또 고드름에 매달린 물방울처럼 정안 스님의 눈에도 눈물방울이 매달렸습니다.
정안 스님은 알고 있습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의 햇빛이 어떻게 변하고, 어떻게 다른가를. 그렇지만 그중에서도 겨울 볕이 가장 따뜻했습니다. 그건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겨울 햇볕 속에 동그마니 앉아 있으면 공연히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희끗희끗 눈을 뒤집어쓴 졸참나무숲이 바람에 일렁이고 있습니다. 정안 스님이 늦은 겨울 볕에 앉아 생각에 잠겨 있을 때 할머니가 살며시 다가왔습니다. 손에 무언가를 들고 말입니다.
“작은 스님?”
정안 스님이 물끄러미 할머니를 쳐다보았습니다.
“이게 노스님 고향 주소에요.”
“예?”
“노스님이 신신당부하셨어요......”
할머니는 또 눈물을 글썽였습니다.
“제가 또 뭘 잘못했나요?”
할머니가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이번 설날에는 꼭 작은 스님 손을 잡고 고향을 가시고 싶다고 하셨는데......”
“저하고요?”
너무 뜻밖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아무래도 못 가실 것 같애요. 스님 혼자 다녀오시래요.”
“혼자요?”
“노스님이 작은 스님은 이 세상 어디든 혼자 갈 수가 있대요.”
노스님이 시키면 일이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정안 스님이었습니다. 무서웠기 때문입니다. 정안 스님은 곰곰 여러 가지를 생각했습니다. 노스님과 처음 불암사에서 만났을 때, 그리고 포리암을 오면서 나누었던 이야기들을. 할머니가 내준 종이에는 다음과 같은 글씨가 씌어있었습니다.
경북 문경시 산양면 은학리.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