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 여러분이
한 그루 졸참나무가 되기를 바라면서
지난 늦겨울.
이 책을 만들고, 이 책의 그림을 그린 언니 오빠들과 함께 정안 스님이 밟았던 그 길을 다녀왔습니다. 우리는 정안 스님이 다녔던 학교에도 가 보고, 정안 스님이 능금이를 만나던 정선의 눈 덮인 초록강도 보았습니다. 아랫마을에 흉년이 들면 열매를 많이 단다는 앙상한 졸참나무도 보고 왔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웠는지요.
눈 쌓인 그곳을 떠돌면서 한없이 웃기도 했습니다. 우리 모두 어린이 여러분의 나이로 돌아간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글을 읽으면서 우리가 느꼈던 우리 산과 우리 강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여러분, 혹시 여러분도 저처럼 눈물 없이 떠나가 눈물짓게 하던 친구가 있나요? 혹시 여러분도 정안 스님처럼 눈물지으며 떠나가 눈물짓게 하던 희진이 같은 친구가 있나요? 혹시 여러분도 정안 스님처럼 그렇게 가슴 아프도록 고운 할머니가 있나요?
《졸참나무처럼》은 이처럼 눈물 없이 떠나가 눈물짓게 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쓰여졌고, 그려졌고, 만들어졌습니다.
부디 여러분이 어릴 때 읽은 이 한 편의 동화를 두고두고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부디 여러분의 마음이 한 그루 졸참나무처럼 곱디곱기만을 바랍니다.
우봉규
졸참나무숲
해지는 초겨울 저녁.
월곶산 기슭, 나뭇잎이란 나뭇잎은 모두 떨어졌습니다. 나뭇잎들이 수북이 떨어져 쌓인 산길, 이제 사람들은 아무도 보이지 않습니다. 노스님은 큰 바랑, 정안 스님은 작은 바랑을 등에 지고 산을 오르고 있습니다. 두 사람의 등 뒤로 햇볕이 부서져 내렸습니다. 하얗게 삭아 내렸습니다.
그림 이승민
“다리 아프지?”
노스님의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집니다.
그렇지만 아홉 살 정안 스님은 말이 없습니다.
노스님이 너무 무서웠습니다. 말을 붙이기도 싫었고, 대답을 하기도 싫습니다. 될 수 있으면 얼굴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애를 썼습니다. 노스님과 함께 살지 않는 방법은 없을까? 정안 스님은 늘 그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노스님은 언제나 정안 스님을 데리고 다녔습니다. 정안 스님은 노스님이 안 계신 곳이 바로 극락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조금이라도 싫은 표정을 지으면 당장 불호령이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정안 스님은 노스님과 있을 때는 늘 말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노스님은 자꾸 말을 붙입니다.
“네 얼굴에 다리 아프다고 써 있다.”
“......”
그 사이 머언 아래편 소금집 사이로 작은 기차 하나가 지나갑니다. 하얀 소금을 싣고 말입니다. 노스님도, 정안 스님도 물끄러미 기차를 바라보았습니다. 마지막 햇볕, 올망졸망 아래 마을들이 그 햇볕 속에 졸고 있습니다. 정안 스님은 힐끗 노스님의 얼굴을 바라보았습니다. 얼굴에 수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검은 점, 거기다가 웬 주름살은 그리 많은지, 노스님의 얼굴을 보면 만화영화에 나오는 마녀 같은 얼굴입니다. 정안 스님은 자기도 모르게 긴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여기서 좀 쉬었다 갈까?”
정안 스님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산새들이 어디론가 훌훌 날아갑니다.
노스님은 혼자 묻고 혼자 대답하였습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그렇지만 정안 스님은 어디로 가는지조차 묻지 않습니다. 그냥 무조건 따라가면 될 일입니다.
노스님과 정안 스님은 강원도 가리왕산 불암사에서 길을 떠났습니다. 언제나 그랬듯이 느닷없이 노스님은 정안 스님에게 보따리를 싸라고 하였습니다. 정안 스님은 불암사의 주지스님과 공양주 아주머니께 마지막 인사도 하지 못했습니다. 날이 밝기도 전 길을 재촉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정안 스님은 짐작했습니다. 다시는 불암사에 오지 못한다는 것을. 간밤에 노스님과 주지스님이 하는 얘기를 들었던 것입니다.
“누가 제일 보고 싶으냐?”
그렇지만 정안 스님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합니다. 엄마가 보고 싶은데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정안 스님의 한 쪽 눈가에 눈물이 맺혔습니다. 정안 스님의 오른쪽 눈은 아주 오래전 아기였을 때 이미 고장이 나버렸습니다. 정안 스님은 애꾸눈입니다. 그래서 검은 안경을 쓰고 있습니다.
정안 스님은 자신의 눈이 왜 그렇게 되었는지, 언제 그렇게 되었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누구에게도 그것을 묻지 못했습니다. 그냥 사람만 만나면 죄지은 것 없이 고개를 숙였습니다.
이제 엄마의 얼굴은 기억나지 않습니다. 네 살 때인가, 다섯 살 때 불암사 산골짜기에 자신을 두고 울며 떠난 엄마의 뒷모습만이 희미하게 남아 있습니다. 엄마 꿈을 꿀 때면 항상 그 마지막 뒷모습만 보였습니다.
“남자는 세상에 태어나서 딱 두 번 울어야 한다.”
“......?”
“세상에 태어날 때 하고, 부모님 돌아가셨을 때 하고.”
정안 스님은 또 고개를 푹 숙입니다. 노스님 말씀대로라면 이제 자기는 다시는 울 일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세상에 태어났고, 부모님은 한 분도 안 계시기 때문입니다. 정안 스님은 툭하면 혼자서 울었습니다. 해가 질 때쯤이면 아무도 없는 곳을 찾았습니다. 사형스님들한테 혼나면 울었고, 얼굴도 모르는 엄마 아버지가 보고 싶어서 울었습니다. 그러나 가장 슬픈 일은 울지는 않았지만 아이들에게‘애꾸눈 까까중’이라고 놀림을 당할 때였습니다.
“다른 때는 절대로 울어서는 안 된다.”
정안 스님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습니다.
“약속해야지?”
“네.”
정안 스님은 마지못해 대답을 합니다. 그러나 그 약속을 지킬 자신이 없습니다.
“나도 이 세상에서 가장 보고 싶은 사람이 우리 엄마 아버지다.”
그제야 정안 스님이 고개를 들었습니다. 노스님의 말씀이 믿어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너만 부모님이 있는 거 아니다. 나도 엄마 아버지가 있었지.”
“정말요?”
정안 스님이 비로소 말문을 엽니다.
“그럼. 이 녀석아 난 엄마 아버지 없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줄 알았느냐?”
“진짜로 노스님도 엄마 아버지가 보고 싶어요?”
정안 스님의 눈이 동그래졌습니다.
“나는 너보다 더 우리 엄마 아버지가 보고 싶어. 그분들이 돌아가신 지가 반 백 년이 지났는데도 말이다......”
노스님은 끝까지 말을 잇지 못합니다. 노스님은 자꾸 기침을 하였습니다. 한번 시작하면 몇 번이나 계속되는 기침입니다.
“그렇지만 전 이제 아무도 보고 싶지 않아요.”
노스님이 껄껄 웃었습니다.
“정말 그럴까?”
“전 혼자가 좋아요.”
정안 스님은 누구에게도 엄마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그냥 혼자 있고 싶었습니다. 정안 스님은 다시 입을 꼭 다물었습니다. 노스님은 그런 정안스님을 물끄러미 쳐다봅니다. 노스님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습니다.
노스님이 다시 길을 재촉했습니다. 노스님도 정안 스님도 앞만 보고 걷기만 합니다.
해는 이미 월곶산을 꼴딱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작은 나무 표지판이 보입니다.
포리암.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흙 계단을 지나 ㄱ자로 터를 잡은 월곶산 아래의 조그만 암자, 바다가 보이는 곳, 두 개의 바위가 결 고운 산맥을 물동이처럼 이고 있는 곳, 포리암은 졸참나무숲속에 조용히 앉아 있습니다.
“이제 우리 여기서 사는 거다.”
정안 스님은 까닭 없이 울컥 목이 메었습니다.
노스님이 정안 스님의 등을 쓸어주었습니다.
그림 이승민
“이 나무가 무슨 나문지 아느냐?”
노스님이 이파리가 다 떨어진 어린 졸참나무 가지를 붙잡고 물었습니다.
“참나무.”
그러나 노스님이 고개를 흔듭니다.
“이 나무는 졸참나무다. 참나무 중에 가장 작은 나무지. 그렇지만 졸참나무는 저 아랫마을에 흉년이 들면 스스로 열매를 많이 단단다. 먹을 양식이 없는 사람들이 굶지 않게 말이다. 그래서 나는 이 나무를 부처님 나무라고 한다. 절 사람들은 모두 이 졸참나무를 닮아야지.”
댕댕댕.
포리암 처마 끝에 매달린 풍경이 웁니다.
12월 졸참나무숲으로 서서히 땅거미가 내려오고 있습니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