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서경 박사 특별기고] 한학자 김두만 선생에게 ‘초의차의 제다법’을 묻다
“우리 전통적인 제다법에 현대기술을 가미시켜 세계 최고의 차 맛 만들어야”
다신전과 동다송, 초의 선집 등을 번역해 차의 고전을 세상에 드러나게 한
한학자 김두만 선생에게 초의차의 제다법을 묻다.
그리고 그의 제자 백련 윤재혁에게 김두만 선생의 品과 格을 듣다.
차 고전 번역에 앞장선 김두만 선생. 1994년 발간 김대성 선생의 <차문화유적답사기>인터뷰 당시 사진.
김두만 선생. 그가 있었기에 차의 고전을 통하여 초의의순의 다풍을 읽수수 있었다.
김대성 선생(金大成, 1942~ 壬午生, 현재 75세)이 쓴 <차 문화 유적답사기>는 1994년에 발간되었다. 3권으로 구성이 되어 있는데 그 중에 (중)에 해당되는 책은 대부분 전라도를 무대로 현장 조사와 유적조사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 이 기록에서 응송 박영희(應松 朴暎熙, 1892~1990)는 대둔사의 제다법과 초의차의 종법손으로서 초의차의 구술자로 등장한다. 이런 배경에는 응송스님의 장수도 크게 작용했으리라 생각된다. 응송스님이 초의차를 전수했다는 이야기는 이 조사에서만 언급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기 발표했던 필자의 글에서 그 내력을 찾아 밝혔다. 그리고 응송스님이 초의 의순의 생가터를 찾기 위해 전남 무안을 방문한 이야기가 생생하게 전해진다. 그 바로 뒤편 229쪽에는 [草衣스님의 얼이 서린 一枝庵과 小癡가 화실로 쓰던 雲林山房, 一枝庵․雲林山房]에서 일지암을 3번 찾았던 기억, 일지암이라는 띠집의 설명, 초의선사(草衣 意恂, 1786~1866)가 만보전서를 만나게 된 사유, 그리고 다신전을 등초한 이유, 수홍이라는 제자의 차 솜씨, 그리고 다신전의 등초 과정에 대한 자세한 분석 등을 다루고 있다.
다신전은 일부에서 창작이 아니라는 이유로 대수롭지 않게 평가하고 있으나 <우리 차의 재조명>을 쓴 최계원(崔啓遠, 1929~1991)선생은 “<다신전>은 일부에서 지적하듯 중국 청나라 때 모환문이 지은 <다경채요>에서 따온 것은 사실이다. 중국의 경우는 이미 明代부터 <다경채요>의 차 제조법인 잎차를 대종으로 삼고 있었다. 이 방법으로 한 제조과정이 쉬운데도 唐의 육우(陸羽)가 쓴 <茶經>의 단차법을 고수하고 있던 우리나라 사찰에 차 제조의 신기원을 이룩하도록 한 초의의 공을 인정해야 한다”는 의견을 역설한다. 그리고 그 내용을 김대성 선생은 그대로 싣고 있다. 이어 10여 년 후에는 정조(正祖)의 사위인 해거 홍현주(海居 洪顯周, 1793~1865)로부터 ‘다도를 알고 싶다’는 부탁을 받고 유명한 <동다송>이 태어나게 되었고, <동다송>을 두고 <조선의 茶經>이니 <동국다도의 聖典>이니 하고 높이 평가하고 있는 측이 있는 반면, 이에 조심스레 반대하는 입장을 보이는 측도 있다고 소개하고 있다.
이에 초의선사의 차에 대한 설이나 시를 많이 인용했고 전문적인 다서를 짓겠다는 욕망보다는 해거 홍현주의 부탁으로 지은 것 등이 <동다송>을 높이 평가하지 않는 측의 주장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높이 평가를 하든 지나친 과대평가라고 하든 우리나라 차가 맛이나 그 약효면에서 결코 중국의 차보다 뒤지지 않는다고 예찬한 초의선사의 우리 차에 대한 높은 안목과 차에 관한 그의 탁월한 경지는 높이 평가받아 마땅하다. 그리고 초의선사는 차를 따는 것과 만드는 과정 또 물과 우려내는 법을 크게 강조하고 형식적인 번거로움을 싫어했다고 전하고 있다.
차 고전 번역으로 고전다서 세상에 내놓다.
평생 한학만 공부한 외고집 인생.
다음으로 이어지는 내용은 김두만(倉岡 金斗萬, 1909~2001) 선생이 번역한 동다송의 마지막 구절이 소개된다. 그리고 일지암의 복원에 관한 이야기와 소치와의 만남에 관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1762~1836), 초의 의순(草衣 意恂, 1786~1866),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 소치 허련(小癡 許鍊, 1808~1893) 등은 하마터면 끊어질 번한 우리나라 차의 맥을 뚜렷하게 이어준 조선조 후기의 거목들이라고 소개한다. 그리고 운림산방의 이야기로 전개된다. 그런데 여기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동다송>을 번역한 김두만 선생의 인터뷰이다. [茶 고전 번역에 앞장선 金斗萬씨, 전통적 제조법에 현대기법 가미해야~] 라는 제목이다. 김두만 선생은 당시 77세, 김대성 선생이 김두만 선생을 만난 것은 1983년으로 추정된다. 이후 <차 문화 유적 답사기>는 10여 년 후인 1994년에 발간되었다. 이 책의 저자 김대성 선생께 2016년 11월 6일 연락을 해서 물었다. 기억이 가물가물 하지만 김두만 선생을 처음 만난 것은 1983년 경 쯤이라고 한다. 그 후로 자주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고 인터뷰 기사를 싣게 되었다는 기억도 보태 주었다.
응송스님 소장 다신전과 동다송을 번역하여 출간.
초의선집 1권과 초의전집 총 5권.
차의 고전 유작 육필원고.
두륜산과 대둔사의 역사와 문화가 남아 있는 자료집 번역 중 별세.
여기에서 김두만 선생은 당시로 12년 전부터 <다신전>과 <동다송>을 처음으로 번역해 지상에 발표하였고, <초의집> 육우의 <다경> 등 주로 차의 古典을 번역해 왔다. 이 책의 번역 이후부터 지금까지 줄곧 차의 고전만을 붙들고 늘어지고 있으며 차의 멋과 맛에 깊이 심취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자신이 알고 있는 제다법에 대해 구술하고 있다.
“찌거나 덖고 말리기를 많이 할수록 좋다는 구증구포(九蒸九曝)는 적어도 차에서만은 들어본 일도 없고, 손으로 비비면 비빌수록 맛과 향이 더욱 좋아진다는 구절은 지금까지 어느 고전에서도 읽어 본 바 없다. 다만 찻잎을 딸 때부터 손이 닿으면 그 질이 떨어진다고 해 대나무로 만든 집게를 손가락 끝에 끼워서 차를 따라고 했는데, 그 잎을 찌거나 덖으면서 손으로 싹싹 비빌수록 좋다는 것은 수긍할 수 없는 현대식 방법이다. 찻잎도 제대로의 차를 만들려면 영발아를 따라고 했다. 영발아란 봄에 줄기와 이파리 사이에서 움이 나오고 그 움이 자라 가을이면 또 줄기와 이파리가 자란다. 가을에 그 줄기와 이파리 사이에서 자란 움이 그 다음해 봄이면 싹을 피우는데 그 싹이 바로 영발아라고 되어 있다. 솥에 차를 찌거나 덖을 때는 손을 쓰면 안 된다고 주의를 하고 있다. 덖을 때 쓰는 도구는 젓가락처럼 가늘게 자란 솜대(竹)를 묶어 만든 솔로 젓도록 되어 있다. 솥바닥의 뜨거운 열이 솜대에서 절로 진이 나오게 되어 있고 그 진과 차의 향이 합쳐져야 한다. 덖는 것도 이파리가 타는 것은 절대 금물이며 너무 익지도 설익지도 않았을 때 솥에서 끄집어 내 바로 식혀야 한다. 한 번에 제대로 익히는 것이 좋고 뜨거운 솥에 3~4번을 덖는 것은 좋은 차가 못 된다. 이렇게 어려우니 <다경>이나 <다신전>에서도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고 해 두었다. 손으로 비벼야 차 이파리가 돌돌 말린다고 요즘은 말하고 있으나 잎을 딸 때의 영발아는 참새 혀나 매 부리같이 이미 오그라지는 형태라 뜨거운 기운만 가면 절로 오그라드는 법이라 했다”
그는 더불어 차나무의 식생에도 언급하였다.
“차나무는 야생을 시키면 2천년을 살 수 있는 교목(喬木)이다. 한 해에도 봄․가을 3~4회씩 고르게 깎아내니 40년 밖에 더 살 수 없는 것 아니냐? 인삼에 비료를 주면 인삼이 썩어버리듯 차나무에 비료를 주면 찻잎은 잘 자라는 대신 그 잎은 독성이 강해진다고 옛 문헌에 쓰여 있다. 굳이 거름을 주려면 낙엽 등 자연의 퇴비 이 외에는 금물이다. 결국 차의 고전에서 기술하고 있는 방법대로 차를 만들어야 한다면 量産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제대로 만들어진 차라야 차라고 할 수 있고 옛 사람들은 이 같은 차를 신비의 음료니, 천연의 향, 불로초라 했다. 오늘날 量産해 낸 차를 마시고 겨드랑이에 바람이 나 하늘을 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판단 착오이다.”
그러면서 김두만 선생은 한마디를 덧붙인다.
“야생버섯을 흉내 내 만든 것이 재배버섯 아니냐? 재배버섯은 손쉽게 사 먹지만 야생버섯의 효능을 기대할 수는 없다. 손으로 덖고 비비기를 아홉 차례 했다며 언필칭 전통적인 제법에 따라 만들었다는 차가 시중에 활개치고 있는 게 요즘이다. 이 나라의 인삼이 이웃 땅에 가면 무가 되고, 이웃 땅의 무가 이 나라에 오면 인삼이 될 정도로 우리 땅의 기후와 토질은 세계적인 것으로 증명되고 있는 요즘 아니냐? 재배나 제조과정에서 허점을 보여 그렇지 차나무만은 이 땅의 것이 세계에서도 최고이다. 이웃나라 제조방법을 비판 없이 따를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전통적인 방법에다 현대의 기술을 가미시켜 세계 최고의 차 맛을 만들어내야 할 것이다. 차의 대중화를 부르짖기 이전에 모든 사람이 믿고 마실 수 있는 분위기 조성이 우선 되어야 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기록을 바탕으로 김두만 선생은 자신이 수많은 차 관련 책들을 탐독하고 번역하면서 차의 고전에서 언급하고 있는 우리차 제다법의 실체를 밝혔다. 그리고 해남에서 나고 자란 해남 그리고 대둔사의 제다법을 정리하기도 했다. 김두만 선생은 93세 별세 때까지 차살이를 했다. 김두만 선생의 장수도 차의 효능과 작용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예컨대 초의차 연구를 위한 이번 현장조사에서 만난 구술자들이 거의 90을 넘긴 年齒을 자랑했고, 70이상 80세의 경우가 많았다. 각설하고 김대성 선생의 현장 조사에서 김두만 선생은 “김봉호씨가 응송스님이 소장하고 있는 <다신전>과 <동다송>을 들고 와 번역을 해보자 하기 전까지 차를 몰랐지라”고 회고 한다.
제자 백련 윤재혁 “김두만 선생은 차생활의 전범 보여준 품격 갖춘 차인”
김두만 선생의 제자 서예가 백련 윤재혁 선생.
김봉호(友鹿 金鳳皓, 1923~2003) 선생이 차문화 부흥을 위해 활동하면서 김두만 선생에게 자료 번역을 의논한 것은 1960년대 말로 추정된다. 하지만 해남다인회에서 활동 중인 어르신들의 구술에 따르면 1960년대 중반부터 차를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고 차의 고전 등도 관심을 보였다고 전한다. 특히 그의 제자 백련 윤재혁(白蓮 尹在赫 1952~ 壬辰生)선생의 구술에 의하면 차를 직접 채다하여 만들고 음다생활을 통한 차인의 전범을 보여주었다고 전한다. 아주 검소하고 담박한 차살이를 한 것으로 여겨진다. 해남에서 대를 이어 표구점을 운영하고 있는 2남 김 홍(金 弘, 1950~ 庚寅生 현재 67세)선생과 안해(李勝子 1955~ 乙未生)씨를 만났다. 부친으로서 시아버지로서 일러주신 제다법과 차생활을 함께 한 기억으로 그의 차살이를 들을 수 있었다.
김두만 선생이 남긴 고전 자료들.
처음 차를 따러 갈 때는 해남 옥천 탑동으로 다녔다. 아주 이른 시기에 땄다. 3월 중순경으로 기억한다. 한 해 야생차를 따러 가는데 어찌나 찻잎이 작아서 손가락으로 집어지지도 않아 애를 먹었다. 차를 따 와서 덖어서 차를 만들었는데, 부친은 설명하고 어머니(洪庚心, 己未生 1919~1996)가 주로 덖었다. 아버지와 열 살 차이여서 더 젊었기 때문에 차를 만들 때는 엄마가 많이 덖고 만들었다. 덖을 때는 맨손은 너무 뜨거워서 나무 주걱을 사용했다. 대솔을 사용한다는 것을 들을 적은 있는데 본 적은 없는 것 같다. 물을 친다거나 하는 경우는 없었다. 유념할 때는 양손을 모으고 차를 비볐다. 더러는 돗자리에서 비비는 경우도 있었다. 부친께서는 대둔사 승려들의 제다법이라고 차를 덖고 비비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는데 주로 손바닥 사이에서 세게 비비는 것은 차의 강성을 누그러뜨리는 효과가 있다고 했다. 건조할 때는 아랫목에다 뜨뜻하니 해서 창호지에다 말렸다.
김두만 선생의 아들 김홍 씨. 표구 일을 하고 있다.
김홍 씨.
며느리 이승자 씨.
일지암에 있는 용운스님이 부친을 자주 찾아와 차에 대한 논의도 하고 고전 번역에 대한 문의도 많이 했다. 같이 차를 마실 때도 많았다. 당시 부친께서는 차의 고전 뿐 아니라 동의보감이나 의서들도 번역하여 참고하고 섭렵하고 실생활에 응용하고 계셨기 때문에 몸에 좋다는 한방 처방을 많이 해서 스스로 몸을 챙기셨다. 자부는 80년대 시집왔을 때 일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민간요법을 많이 활용하신 분이다. 끈끈이 풀 같은 것도 다려서 환으로 만들어 드시기도 하고, 반짝 반짝한 산돌 흰색을 주워다가 끓여서 그 물을 마시기도 하였다. 들에 나는 재래종 국화 산국이나 감국도 따다가 차로 마시기도 해서 향그러운 차를 많이 마셨다.
김두만 선생은 평생을 검박하게 살았다. 욕심이라고는 없었다. 그저 있다고 하면 책을 모으는 일이었다. 늘 일찍 일어나 늦은 밤까지 책과 씨름하는 모습 외에 다른 모습을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다. 가족 건사에 대한 걱정도 당신한테는 별로 없었던 것 같다. 한학 공부에 큰 뜻을 두고 살았기 때문에 해석이 어려운 책이나 글귀를 들고 찾아 온 사람들도 많았다. 제자들도 많았지만 워낙이 외고집이었기 때문에 아무나 제자로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한학에 대한 식견이나 견해는 따를 자 없을 만큼 대단한 실력을 겸비한 분이었다. 꼿꼿하고 정의로운 성품 탓에 평생 소신을 굽히지 않고 올곧은 정신으로 고전 번역에만 힘썼다. 김두만 선생의 2남은 부친의 자료들을 다 내 놓으면서 눈 밝은 사람들이 보고 연구도 해야 한다면서 몇 보따리를 싸 주신다. 번역중인 작업이나 육필 원고에서 차 고전의 이야기들이 많았다. 천천히 하나씩 면밀히 살펴 볼 자료들이다. 김두만 선생의 손 때 묻은 자료들을 훑어보면서 당시의 당신 삶을 편린으로나마 유추해 볼 수 있었다.
김두만 선생이 필사한 다산의 걸명소.
골동품 가게에서 다산 선생의 걸명소가 팔려나갈 때 필사했다던 당시의 김두만 선생(왼쪽).
문헌 자료를 탐구하다 초의의 기일이 음력 8월 2일이라는 것도 밝혀 낸 인물인데,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고 지역의 차인회 식구들이나 차 관련 인사들에게 크게 꾸중을 한 일화도 유명하다. 젊은이들의 잘못된 행동이나 예의 없는 행위를 볼 때면 따끔한 일침도 마다 않는 지역의 참 어른이었다. 다산 선생이 아암 혜장스님에게 보낸 <걸명소(乞茗疎)>가 김두만 선생의 번역으로 공개되기도 하였다. 젊은 나이에 골동품 가게에 갔는데 아주 오래된 문건 자료가 팔리는 것을 보고 어떤 자료인지 궁금해서 물어 보았는데 다산 선생의 편지 글이어서 그 자리에서 필사해 두었다가 차 관련 자료로 공개한 것이다.
내가 요새 차에 걸신이 들려 차를 약으로 하고 있다오.
다서 중에 중요한 것은 육우의 <다경> 3편에 능통해야 하고
병든 주제에 꿀떡꿀떡 노동의 일곱 잔을 다 마시고 있소
비록 정력이 가라앉고 기력이 없어진다는 기모경의 말을 잊지 않고
소화를 돕고 기미가 없어진다고 해서 이찬황의 버릇만 생겼소
아침에 일어났을 때 맑은 하늘에 구름이 두둥실 떴을 때
낮잠에서 깨어났을 때, 밝은 달이 시냇가에 떠 있을 때
한 잔의 차가 목 마르다오
바람 부는 산, 등잔 밑 따끈한 차 한 잔은 자순의 향이요
물을 긷고 불을 지펴 마당에서 달인 차는 白免의 맛이지요
화자 홍옥잔의 사치는 부호 노공에 미칠 수 없고
돌솥에 푸른 연기 지피는 검소는 한비자를 따를 수 없소
게 눈이니 고기 눈이니 하는 옛 사람들의 완호는 부질없고
궁궐의 용단 봉단은 너무 심한 사치라오
땔감 나무조차 하지 못할 깊은 병이 들어
부끄러움을 무릎 쓰고 차를 얻고자 할 뿐이오
살짝 훔쳐 듣건대
고해의 다리를 건너는 데는 스님들의 보시가 제일이고
명산의 고액인 서초의 우두머리인 차를 살짝 베풀어 주시는 것이라 했소
목마르게 바라노니
부디 그 은혜를 아끼지 마옵소서
참 현대 사회에서는 보기 힘들고 아름다운 교유가 이렇게 멋 난 詩로 표현되고 있다. 누구든 본인 스스로 만든 차가 제일 맛있고 향기롭고 훌륭하다고 자랑하는 현대 차인들에게 하나의 지혜가 되고 지침이 되고 통찰의 시간까지도 허락하는 한 편의 걸명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