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왕근 불교담론] 현대불교에서 깨달음의 의미①- 깨달음이란?
“아인슈타인이 상상실험을 하듯, 싯다르타도 고요하게 집중했을 것”
깨달음 논쟁에 적극적으로 나서 자신의 견해를 개진했던 김왕근 붓다로살자 편집장이 '현대불교에서 깨달음의 의미'를 주제로 자신의 담론을 펼친다. 이에 <미디어붓다>는 김왕근 편집장의 글을 게재하기로 했다. 단 김왕근 편집장의 견해가 미디어붓다의 논지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음을 알려둔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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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불교에서 깨달음의 의미
1, 깨달음이란?
2. 브라만교의 깨달음
3. 싯다르타의 깨달음
4. 대승불교의 신비주의
5. 현대 불교의 깨달음
1. 깨달음이란?
한국불교의 ‘신비주의’
20세기, 한국 불교는 ‘신비주의’가 지배했다.
당대 최고의 선승(禪僧)으로 평가되던 진제(眞諦) 스님은 2009년 조선일보 최보식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몸뚱이란 숨 한번 들이쉬지 못할 때 주인공이 딱 나가버리면, 사흘 이내 썩어 화장하고 묻어버려요. 뼈와 살은 흙으로, 대소변은 물로, 호흡은 바람으로, 따뜻한 기운은 불로 돌아갑니다. 본고향으로 돌아가면 아무것도 없거든. 하지만 주인공인 '참나'는 우주가 생기기 전에도 있었고, 우주가 멸(滅)한 후에도 항시 여여(如如)하게 있습니다. 이를 바로 보아야, 진리의 도가 그 가운데 다 있습니다." 기자가 "지금 육신이 없어지면 저 자신도 소멸되니, 저의 '참나'는 오직 여기 앉아 있는 이 모습입니다"라면서 '참나'의 정체를 재차 묻자 스님은 “'참나'는 심안(心眼)이 열려야 보게 됩니다."라고 했다.
진제 스님은 2012년에 조계종 종정(宗正)으로 추대됐고, 기자는 2013년(10월 29일자)에도 같은 질문을 했다. 다음은 당시 인터뷰 발췌다.
―여기 앉아 있는 저는 '참나'입니까, 아닙니까?
"하하하, '참나'와는 거리가 멀지요."
―종정께서는 가짜 최모(某)와 인터뷰를 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렇지요."
―'참나'를 얻으니 무엇이 달라졌습니까?
"마음이 항시 평온하고, 시기와 질투, 허세가 다 없어집니다. 미워하고 좋아하는 마음도 다툼과 지배도 있을 수 없습니다. "
―혹자는 '깨달은 부처도 외로웠고 슬픔이 있었다'고 하더군요.
"그건 무지한 사람들, 어리석은 사람들이 지껄이는 소리지요."
―세속적 욕망은 버려야 하는 것일까요?
"세상의 부귀공명도 지혜가 밝은 사람이 누리지, 어리석은 사람은 얻지 못합니다."
―현실에서 그걸 누리는 사람들은 지혜가 밝은 현자(賢者)가 아니지 않습니까?
"지금 그렇게 보이지 않아도, 전생에는 이미 복을 닦은 사람들이지요."
―제가 쭉 질문했지만 눈앞이 환해지는 답을 얻었다는 느낌이 없습니다. 혹시 제게 하실 말씀이 있습니까?
"참선을 잘해서 한번 깨달아보세요. 단맛과 신맛은 씹어 맛을 보지 않으면 모르듯이 이것도 증득해야 그 세계를 이해합니다. 언어로는 항시 태산이 가려서 안 통하지요. 참나를 찾는 수행을 돌아가실 때까지 열심히 하세요."
이 인터뷰를 읽고 있으면 의문이 생긴다. 참선을 잘해서 ‘참나’를 얻으면 정말로 미워하고 좋아하는 마음이 저절로 다 없어질까? 2600년 전에 깨달은 싯다르타는 정말로 외로움이나 슬픔이 없었을까? 만약 인간에게 그런 정서가 모두 없어진다면 그건 인간이 아니지 않을까? 현실에서 부귀공명을 누리는 부정의한 사람들을, 이미 전생에 복을 닦은 사람들이라고 치부해도 될까? 그렇다면 불교는 마르크스가 갈파한 것처럼, 부패한 현실을 인정하게 하는 ‘인민의 아편’이 되고 마는 것이 아닐까? 만약 일반인이 불교의 진리를 알기 위해서 죽을 때까지 참선을 해야 한다면, 그래도 ‘참나’를 얻지 못한다면, 크게 양보해서 죽기 직전에 도를 깨닫는다고 해도, 그것이 현실에서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만약 ‘언어’로는 전달할 수 없는 것이 불교의 진리라면, 그것은 인간의 ‘문명’과는 다른 어떤 신비로운 진리란 말인가?
진제 스님의 인터뷰가 드러내고 있듯이 한국의 불교는 ‘신비주의’에 싸여 있다. 도저히 21세기 과학 문명과 어울릴 수 없는 진술들이 승려들의 입에서 나오고 있다. 도대체 우주가 생기기 전에도 있었고, 우주가 멸한 후에도 있는 ‘참나’란 무엇인가? 그걸 볼 수 있다는 심안(心眼)은 또 무엇인가? 지금 내가 ‘나’라고 알고 있는 이 ‘나’는 정말 별 의미도 없이 사는 허깨비 같은 존재인가? 지금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 삶과 별도로 ‘나’라는 존재가 내 안에 있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그것은 2600년 전에 브라만교에서 주창하던 인간 영혼으로서의 ‘아트만’이 아닌가? 조계종 종정인 진제 스님은 현대 과학 문명으로 무장된 기자에게 2600년 전의 신화를 강요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한 시인이 2015년 1월 17일 법보신문에 보도된 성철 스님 다비식 장면에도 한국 현대 불교의 ‘신비주의’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1993년 11월12일 오후, 성철 스님의 습골(拾骨)이 시작됐다. 성철은 생전에 “사리만 나오면 뭐하나. 살아서 부처님 가르침에 맞게 살았는지가 중요하지”라며 사리를 거두어 법력을 과시하는 풍토를 경계했다. 그럼에도 세속의 관심은 온통 사리에 집중되었고 이날 모두 110과의 사리가 수습됐다. 성철의 사리가 일반인에게 공개되자 이를 친견하려는 사람들이 날마다 1만 명 넘게 몰려들었다. 성철 스님의 장례식을 하는 동안 오렌지색 빛 무더기가 백련암 뒷산을 휘감는 ‘방광(放光)’ 현상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일타 스님은 ‘성철대종사 사리탑비명’에 이렇게 썼다. ‘7일 장중(葬中)에 수많은 사람들이 와서 모두 슬퍼하였고, 그 기간 동안 퇴설당과 백련암 뒷산에 걸쳐서 일곱 차례나 방광을 하시니, 그 이적에 사부대중은 모두 놀라워하고 감격했다.’ 성철이 이 광경을 보았다면 아마 이렇게 일갈하며 혀를 찼을 것이다. “미련한 곰들아, 살아 수행이 중요하지 죽어 사리가 무슨 소용인가. 아직도 사리 장사하고 있으니 참으로 딱하다. 왜 당신네 본 모습은 보지 않고 남의 사리를 구경하러 그 고생을 하는가”》
원래 사리란 인도 말로 ‘뼈’라는 뜻이다. 그것은 ‘고승(高僧)의 다비식(茶毘式, 장례의식)에서 나오는, 수행의 결과로서의 영롱한 광물 결정체’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부처님 진신 사리’라는 말은 ‘부처님의 몸을 구성했던 실제 뼈’라는 뜻이다. 2600년 전 부처님을 화장했을 때, 부처님 몸에서는 ‘영롱한 광물 결정체’로서의 사리는 한 과도 나오지 않았다. 부처님의 장례 모습이 적혀 있는 대반열반경에는 “이렇게 해서 세존의 유해를 다비했는데, 불가사의한 일은 유해의 겉살 속살 근육 관절즙 힘줄들이 모두 재나 그을음을 남기지 않은 채 완전하게 타 버리고 단지 유골만 남았던 것이다”라고 적혀 있다. 석가 세존 당시에 ‘불가사의’한 일에 해당하는 것은 단지 석가모니 붓다의 뼈를 제외한 나머지 살이 잘 탄 정도였다.
화장을 하는 것은, 그 뼈를 수습해서 이를 무덤에 묻기 위한 것이었다. 부처님의 제자들은 부처님의 뼈를 갈아서 네 항아리에 담아 부처님이 태어난 곳(룸비니), 깨달은 곳(보드가야), 첫 설법한 곳(사르나트. 녹야원), 열반한 곳(쿠시나가르) 등 네 곳(사성지 四聖地)의 무덤에 나누어 놓았다. 부처님의 죽음을 예감하고 “부처님을 어떻게 추억할 수 있느냐”며 애석해하는 제자들에게 석가모니는 “나의 흔적들이 이곳에 있지 않느냐”고 했었고, 제자들은 이 네 곳에 무덤을 세웠다. 이후 아소카 왕에 이르러 이 사리, 즉 ‘부처님의 뼛가루’들이 아주 소량으로 나뉘어 전국으로 이장되었다. 그렇게 해서 생긴 무덤들이 바로 탑(塔)이다. 다보탑이나 석가탑 등 우리나라에 있는 탑들도 결국 부처님의 뼈를 모신 무덤이라고 하겠다.
이렇듯 실제 부처님의 장례 모습을 보면 신화적인 요소는 별로 없다. 수행의 결정체, 영롱한 빛을 발하는 광물로서의 ‘사리’는 없으며 오직 진짜 몸을 구성하는 ‘뼈’가 있을 뿐이다. ‘사리’는 가짜고 실상은 ‘뼈’다. 그런데도 부처님 사후 2600년이 지난 한국의 스님 다비식에서 왜 ‘사리’가 수습되며 ‘방광(放光)’이 언급되고 이것이 ‘이적(異蹟)’으로 칭송되는가? 오늘날 스님들의 법력(法力)이 석가모니 붓다보다도 더 높다는 말인가?
법보신문의 기사는 그것을 어리석은 중생의 탓으로 돌린다. 그러나 중생들이 그렇게 믿는 것은 부처의 책임이다. 학교에서 학생의 성적이 나쁜 것은 일차적으로 학생의 책임이지만, 한 반의 성적이 다 나쁘다면 선생님을 의심할 필요가 있다. 대한민국의 불자들이 대부분 뜻도 모르고 경을 읽고 있다면 불교 교단 전체에 그 책임을 물어봄직하다.
이 땅의 스님들은, 나쁘게 말하면, ‘이적(異蹟)’에 기대어 자신의 권위를 세우려고 했다. 그들은 붓다의 가르침을 신비화하고 일반인들은 범접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들었다. 좋게 말해도 인도나 중국말로 된 부처님의 가르침을 일상어로 번역하는 데 게을렀다. 스님들이 외는 불교의 진언이나 경은, 일반인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것들이다. 절에서 모시는 제사 때 신도들은 뜻도 모르고 책에 있는 글자들을 읽거나 외는 데 그친다.
나라에 큰 일이 생기면 사람들은 대통령을 탓한다. 혹은 제도를 탓한다. 대한민국의 불교 현장에서 나타나는 이런 신비화의 현상과 관련해서는 누구를 탓해야 할까? 말할 것도 없이 대한민국의 불교를 세운 사람을 탓해야 한다. 그 사람은 누구일까? 누구나 성철을 떠올린다. 20세기 대한민국의 불교에서 성철만큼 철두철미하게 공부하고 정진한 이는 없을 것이다. 성철 스님이 1947년 청담 스님 등과 함께 한 봉암사 결사 이후, 해이해진 대한민국 불교의 풍토가 많이 바로잡혔다고 사람들은 평가한다. 지난 2013년 9월25일 서울 조계사 내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개최된 ‘육조혜능과 퇴옹 성철 그리고 한국불교’란 주제의 학술포럼에서 조계종 원로의원 고우 스님은 “2600년 전 부처님과 1300년 전 혜능 스님, 그리고 현대 성철 스님이 깨달은 내용은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이는 성철 스님이 중국 선종의 법통을 이어받았다는 말이다.
그러나 20세기 대한민국에서 최고로 존경받았던 ‘스타’ 스님이 1300년 전 중국의 혜능 스님과 같은 반열에 놓인 현실을 뒤집어보면, 이는 대한민국 불교의 후진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불교의 역사는 끊임없는 혁신, 즉 ‘자기 부정’의 역사였다. 붓다는 2600년 전, 인간에게 실체가 있다는 힌두교의 ‘아트만’을 부정하고 ‘무아(無我)’론을 펼쳤다. 또한 우주를 창조하고 일체를 지배하는 근본 원동력으로서의 ‘브라만’을 부정하고 ‘연기(緣起)’설을 주장했다. 이 세상에 ‘제1원인’은 없으며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는 ‘실체’가 없다는 진리를 설한 것이다. 그러나 석가모니의 사후에 제자들은 ‘연기(緣起)’에 ‘제1원인’을 덧씌우는 오류를 범했고 나가르주나는 공(空)의 이론으로 이를 물리쳤다. 이 공(空) 사상은 다시 허무주의, 혹은 단멸(斷滅)론에 빠졌고 이를 바로잡기 위해서 유식(唯識) 혹은 여래장(如來藏) 사상이 생겼다. 이 이론들이 매우 현학적이고 복잡화되어 일반인들이 범접할 수가 없게 되자, 그 벽을 넘기 위해 등장한 것이 중국의 선(禪)불교였다.
그런데 1300년 전의 혜능 스님에게서 대한민국의 불교는 멈춰버렸다. 혜능 스님의 화두가 오늘날 한국인들에게 의미가 있으려면 혜능을 넘어서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21세기 대한민국의 스님들은 1300년 전 중국 스님들이 쓰던 화두를 반복해서 우려내고 있다. 스님은 1000년도 더 전에 중국의 스님들이 했던 “뜰 앞의 잣나무니라”라는 화두를 되뇌지만 이 말을 듣고 뜰 앞을 내다보면 잣나무가 없다. “뜰 앞의 개나리니라”라고 응용할 법도 하지만, 스님은 책 속 곰팡내 나는 문구를 한 치의 창의적 노력도 없이 그대로 인용한다. 심지어 스님은 차를 주지도 않으면서 “차 한 잔 들게”라고 말한다. 10년 20년 넘게 강의 노트를 사용하는 교수는 지탄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법당 안의 스님은 1000년도 더 지난 남의 노트를 그냥 반복해서 써도, 이를 문제시하지 않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불가(佛家)에 유령처럼 떠있는 ‘신비화’ 덕분이다. 스님에게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물으면 법당 안에서만 쓰는 전문 용어를 써 가면서 “말로 해서 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깨달아야 알 수 있다”고 말한다. “불교의 오묘한 뜻은 깊은 수행을 하는 스님들 이외에 일반 재가 불자들이 알 수 없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말로 설명할 수 없다면 어떤 방법으로 그 뜻을 전할 것인가? 결국 스님의 세계와 일반 불자의 세계는 분리돼 있으며, 이는 대한민국의 불교가 살아있지 못함을 뜻한다.
불교 이론은 복잡하지만, 결국은 깨달음을 통해서 얻는 윤리적 실천, 인간 구원이 목표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불교는 윤리적 실천의 문제에로까지 나아가지 못한다. 기껏해야 영험하다는 불상(佛像) 앞에서 자녀들의 대학 입학을 기원하는 것이 오늘날 대한민국 불교가 가장 자주 목도하는 광경들이다.
이것은 불교의 타락이다. 대한민국의 불교가 이렇게 ‘타락’한 원인은 불교 내부에서 찾아야 한다. 대한민국 불교는 성철 스님이 8년간의 장좌불와(長坐不臥) 수행으로 내건 ‘깨달음’에 갇혀 있다. 대한민국 불교를 개혁하기 위해서는, 그래서 불교가 일반 생활인들에게로 침투되기 위해서는, 성철 스님의 불교 이론 안에 있는 모순을 바로잡아야 한다. 그것은 성철 스님의 업적이 그만큼 크고, 현재의 대한민국 불교 중 많은 부분이 성철 스님의 이론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는 살불살조(殺佛殺祖)의 정신이 어느 때보다 지금 절실한 것이다. 이는 성철 스님의 뜻이기도 하다. 성철 스님 자신이 “‘성철은 너 성철이고 나는 나다. 긴 소리 짧은 소리 무슨 잠꼬대가 그리 많으냐’ 하고 달려드는 진정한 공부인이 있다면 내가 참으로 그 사람을 법상 위에 모셔놓고 한없이 절을 하겠습니다”(백일법문(상) 41쪽)라고 한 바 있다.
깨달음의 의미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이는 불교에서만 쓰는 용어가 아니다. ‘열반(涅槃)’이나 ‘법(法)’, ‘공(空)’, ‘연기(緣起)’ 등은 불교를 비롯한 인도 철학에서 비롯된 단어들이어서 그런 측면에서의 설명이 필요하다. 그러나 ‘깨달음’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흔히 쓰는 말이고 큰 어려움 없이 이해되는 순 우리말이다. ‘깨달음’은 ‘깨닫다’의 명사형인데, ‘깨닫다’란 원래 ‘가 닿다’라는 말이 변형된 것이라고 철학자 윤구병 선생은 말한다. 내가 무엇을 깨닫는 것은 전에는 나와 관련 없던 어떤 대상에 ‘가서 닿을’ 때 혹은 ‘그 가장자리에 닿을’ 때 생기는 현상이다. 깨달음은 이처럼 일반명사이지 고유명사가 아니다. ‘부처’ 혹은 ‘붓다’라는 말이 일반명사인 동시에 고유명사인 것과는 다르다. ‘붓다’는 ‘깨달은 이’라는 일반명사이기도 하지만 2600년 전에 인도 땅에서 살다 죽은 한 인간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Buddha라고 대문자 B를 쓰면 고유명사가 되며 buddha라고 소문자 b를 쓰면 일반명사가 된다. 그러나 ‘깨달음’이란 고유명사일 수가 없다. 그 깨달음이 싯다르타가 이룬 구체적인 깨달음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다른 모든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는 깨달음일 뿐이다. 만약 그것이 공유될 수 없다면 그 깨달음의 의미는 없거나 있더라도 아주 희박할 뿐이다.
깨달음은 다 같은 깨달음이지 싯다르타의 깨달음이 다른 깨달음보다 더 우위에 있는 깨달음일 수는 없다. 불교에서는 싯다르타의 깨달음을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이라고, ‘위없는 깨달음’이라고 신성시 하지만 깨달음은 그냥 깨달음일 뿐이다. 씨름 선수 이만기가 얻은 ‘중심 이동의 묘(妙)’에 대한 깨달음이나 K팝스타에 출연한 가수 지망생들이 얻은 ‘발성(發聲)’에 대한 깨달음이나, 축구 국가대표 선수들이 “열심히 해야 하지만 열심히 해야 한다는 그 생각에 매이면 안 된다”는 의미에서 “경기를 즐기겠다”고 할 때 보이는 그 깨달음이나 보리수 아래서의 싯다르타의 깨달음이나 다 같은 ‘깨달음’일 뿐이다. 다만 싯다르타의 깨달음은 인간 존재와 우주에 대한 근본적인 진리의 깨달음이라는 점, 그리고 그 깨달음이 인간에게 혹은 언어에 내재돼 있는 근원적인 사고방식의 오류를 뛰어넘는 깨달음이라는 점 등이 다를 뿐이다.
깨달음과 관련해서, 우리의 불교계에서는 돈오돈수(頓悟頓修)가 옳은지 돈오점수(頓悟漸修)가 옳은지에 대해서, 이른 바 돈점논쟁(頓漸論爭)이 있었다. 성철은 고려시대의 국사(國師) 지눌이 주창한 돈오점수를 비판한다. 이는 돈수(頓修)와 점수(漸修) 사이에서의 논쟁이어서 ‘돈오(頓悟)’ 자체에 대해서는 이의가 없다. 불교 안에서는 돈오와 점오(漸悟)의 대립도 있지만, 이때의 점오란 “몇 번이나 생사를 반복하는 중에 수행의 공을 쌓아서 겨우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다”는 생각이며 현세를 그 최후의 단계로 보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현세를 기준으로 보면 돈오나 점오는 같은 말이다. 그러나 ‘깨달음’이란 것이 그렇게 수억 겁의 수행을 쌓아야 가능한 것이고, 그 바탕 위에서 ‘단박에’ 이루어지는 것이며 그렇게 ‘돈오(頓悟)’한 다음에는 불변하는 것일까? 이는 ‘깨달음’에 대한 우리의 상식과는 다른 주장이며, 싯다르타가 2600년 전에 얻은 깨달음과도 달리 매우 신비주의적인 주장이다. ‘중도’와는 거리가 멀어서 극단적인 이런 신화적인 ‘믿음’은 오히려 실생활을 오도(誤導)할 수 있다.
“현세에서는 성불할 수 없으니 몸을 바꿔”라며 타락의 길로 빠져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김성동이 1978년 쓴 소설 <만다라>를 보면 이런 ‘깨달음’의 어려움에 좌절하는 모습이 생생히 그려져 있다. 견성(見性) 성불(成佛)을 위해서 절과 거리를 방황하는 수도승 법운(法雲)은 스스로를 땡중이라며 자조(自嘲)하는 파계승 지산(智山)으로부터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몸을 바꾸는 수밖에는 없다”는 말을 듣는다. 어차피 부처라는 천재가 수억 겁에 걸쳐 이룬 것을 범인(凡人)이 한 생에 이루는 것은 불가능하니 이승에서 불법 깨치기는 포기하고 다음 생을 기약하라는 말이었다. 법운은 결국 자살한 ‘도반(道伴)’ 지산의 장례를 치러주지만, 그가 스승에게서 받은 화두, ‘병 속의 새’는 끝내 병 바깥으로 나오지 못한다. 이 땅의 수많은 스님들이 이 소설의 주인공처럼 좌절을 겪었다. 혹은 깨닫지 못하고 깨달은 것처럼 행세하는 ‘자기기만’에 빠져 있다. 이것은 모두 성철 스님이 주창한 ‘깨달음’에 갇힌 모습이다.
직관과 천착
‘깨달음’을 위해서는, 한 순간의 직관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 깨달음을 위해서는 직관 이전에 그리고 직관 이후에도 그 의미를 계속해서 천착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깨달음은 진화하는 것이며 진화해야 한다. 인류사에서 깨달음은 진화해왔다. 자연과학의 원리는 물론이고 인간이라는 복잡한 유기체의 ‘마음’과 관련한 인문학적 진리는 더욱 그렇다. 사실 싯다르타의 깨달음은 브라만교에 원래 있었던 ‘범아일여(梵我一如)’ 사상을 진화시킨 것이며, 불교의 역사를 통해서 계속해서 그 의미가 천착돼 왔다. 다만 여러 가지 이유들 때문에 그 의미가 신비화되고 왜곡돼온 측면도 분명히 존재했던 것이다.
2600년 전 싯다르타에게는 깨달음이 있었다. 그것처럼 기원전 3세기 그리스의 과학자 아르키메데스에게는 ‘부력의 원리’에 대한 깨달음이 있었고 현대의 과학자 아인슈타인에게는 ‘상대성 원리’에 대한 깨달음이 있었다.
아르키메데스가 ‘부력의 원리’를 목욕탕에서 깨닫고 “유레카(나는 깨달았다)”라고 외치면서 벌거벗은 채 탕 밖으로 뛰쳐나왔다고 할 때, 그 깨달음은 갑작스런 것으로 묘사된다. 왕의 금관이 정말 순금인지 아니면 은이 섞였는지를 고민하다가 ‘비중’에 대해서 그리고 ‘부력의 원리’에 대해서 한 순간에 깨달음이 왔다는 것이다. 대입 수험생들은 어려운 수학 문제를 며칠 동안 생각하다가 그 해답을 내는 방법이 한 순간에 떠오르는 경험을 하곤 한다. 시인이라면 어떤 시상이 갑자기 떠오른다. 그럴 때도 있지만, 그러나 그런 측면은 자주 과장된다.
중국에서 한시(漢詩)의 최고봉으로 이백과 두보가 꼽힌다. 두보(杜甫)는 한 자 한 자 글을 다듬는 스타일이고 이백(李白)은 시상(詩想)이 떠오르면 한 번에 일필휘지로 쓰는 스타일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런 일화도 있다. “한 번은 친구가 이백의 집에 놀러 갔다. 그랬더니 이백이 시 한 수를 보여주면서 ‘시상이 떠올라서 잠시 끄적거려 봤어’라고 했다. 그런데 이백이 뒷간에 간 사이에 친구가 벽장을 열어 봤더니 그 안에서 수많은 ‘습작’이 쏟아져 나왔다.” 시는 한 순간에 떠오르기도 하지만, 사실은 끊임없는 노력과 정진으로 가다듬어지는 것이라는 말일 것이다.
아르키메데스의 ‘유레카’ 전설도 사실과는 다를 가능성이 많다. “아르키메데스가 ‘왕의 금관에 섞여 있을지도 모를 은을 분별해내는 방법’을 고민하다가 부력의 원리를 발견했다”는 이 이야기는 아르키메데스의 삶에 극적인 요소를 가미하기 위한 후대의 창작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당시 유행했던 금관의 특징을 고려하면, 실제로 은이 금관의 색깔을 변화시키지 않을 정도로 섞였을 때 진짜 순금과 은을 섞어 무게만 같게 만든 가짜 사이의 부피 차이는 너무 작아, 그것을 넣은 용기에서 넘치는 물의 부피로 가짜 금관을 알아내는 일은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 또한 이 이야기가 아르키메데스 사후(死後) 200년이나 지나 갑자기 등장하고 있다는 것도 ‘후대인들에 의한 창작설’에 힘을 실어 준다. 사람에게는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뉴턴이 만유인력을 발견했다”는 식의 ‘이야기’에 끌리는 성향이 있다. 그러나 원리는 그에 대해서 집중적이고 깊게 사색할 때 발견되는 것이며, 사과가 떨어진다거나 목욕탕 물이 넘치는 것을 보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은 아니다.
아인슈타인이 상대성 원리를 발견했을 때도 같은 상황이었을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상상 실험’, 즉 자기 방에 앉아서 고요하게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 ‘상대성 이론’을 발견해냈다. 그러나 그가 이 이론을 처음 발견했을 때 그 깨달음은 그렇게 구체적인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것은 “아, 에너지와 질량은 결국 같은 것이겠다”라는 생각을 해낸 정도였을 것이고, 그것을 E=mc^2이라는 수식으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추가적인 ‘깨달음의 진화’가 필요했다.
우리는 싯다르타의 깨달음이 어느 날 갑자기 벼락 치듯 왔다고 의심 없이 믿는다. 그러나 싯다르타가 보리수 밑에 앉아서 깨달음을 완성하기까지는 3주가 걸렸다. 학자에 따라서는 7주가 걸렸다고 하기도 한다. 그의 깨달음이란, 우선은 “종래의 방법은 소용이 없었다”는 자각이었다. 그는 6년간의 처절한 고행 끝에 그 방법을 포기했다. 그 포기 자체가 “아, 이렇게 ‘아트만’, 즉 ‘영혼’을 찾아 헤매서는 인생의 문제, 구체적으로는 고(苦)의 문제를 풀 길이 없겠구나”라는 깨달음이며 선언이었다. 그것은 ‘위대한 포기’였다. 그 다음에 싯다르타는 자기 자신이 스스로의 힘으로 문제에 도전했다. 그것은 우리의 스님들이 매진하는 선정(禪定)의 방법도 아니었다. 싯다르타는 고행을 하기 전에 이미 선정의 최고 경지까지 가 보았으나, 그것이 인생의 고(苦)의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한다고 결론짓고 그 방법을 버린 바 있다. 그렇다면 3주 동안 혹은 7주 동안 싯다르타가 깨달음에 이른 방법은 무엇이었을까? 보리수 밑에서의 싯다르타 자신의 내면 상황에 대한 언급은 불교 경전에는 없다. 그러나 싯다르타도 아인슈타인이 상상 실험을 하듯, 고요하게 문제에 집중했을 것임은 짐작할 수 있다.
‘과정’으로서의 깨달음
일반적으로 ‘깨달음’에는 ‘직관’이 필요하지만 또한 ‘천착’이 필요하다. 천착의 결과, 어떤 ‘직관’이 온다. 그 직관은 그러나 계속 천착되지 않으면 안 된다. 모든 깨달음은 직관과 천착이 거듭되면서 공고해진다. 싯다르타의 깨달음도, 그것이 ‘깨달음’인 이상 당연히 그랬다.
싯다르타는 고행을 하기 전에 고(苦)의 문제를 자신이 풀어야 할 근본 문제로 설정했다. 문제를 풀기 위해서 고행을 시도했지만 효과가 없음을 알고 이를 버렸다. 이후에 보리수 밑에서 깨달았다. 깨달은 이후 처음에는 ‘전도’를 할지 말지 망설였다. 만약에 싯다르타의 깨달음이 다른 일반 사람들의 깨달음과는 달리 인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는 신령스러운 깨달음이었다면, 그 깨달음 이후에 싯다르타가 무얼 망설였다는 것은 이해되지 않는 일이다. 그러나 싯다르타는 망설였다. 망설임 끝에 결국 전법을 하겠다고 결심하고 나선다. 이후 초전법륜에서 다섯 비구를 이해시킨다. 그러면서 다시 깨닫는다. “아, 나의 깨달음은 사람들에게 이해 가능한 깨달음이구나.” 싯다르타의 제자 중에서 가장 먼저 콘단냐가 깨달았음을 확인한 싯다르타는 “콘단냐가 깨달았다”며 환호한다.
싯다르타의 깨달음은, 이렇게 보리수 밑에서의 ‘정각(正覺)’을 전후한 일련의 사태 모두를 포괄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돼야 한다. 사실은 깨달음 이후의, 45년 동안의 ‘전법(傳法)’이 깨달음만큼이나 큰 중요성을 갖는다고 해야 할 것이다. 싯다르타는 그 전법의 기간 동안에 자신의 깨달음을 계속해서 진화시켰을 것이다. 무엇보다, 싯다르타는 자신의 깨달음을 실천했다. 싯다르타 가르침의 핵심은 “‘연기법’을 기반으로 너의 삶을 용감히 살라”는 것이었다. 그런 가르침을 준 싯다르타 자신이 그 가르침에 맞는 삶을 살지 않았다면 그의 가르침이 오늘날에까지 전해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불법의 가르침과 이에 대한 깨달음은 실천으로 완성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