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국대 대학원 불교학과에서 철학박사(2014년)를 받은 이송곤 씨(現 불교방송 재직)가 새해 벽두부터 뜨겁게 달궈지고 있는 ‘깨달음 논쟁’ 가운데 한자경 이화여대 교수가 기고한 글에 대해 이견을 제시했다. 이른바 깨달음 논쟁이 저명한 학자들 사이의 논쟁에서 불교학계 전반으로 확산되는 분위기다. 이송곤 박사는 한자경 교수가 언급한 ‘이해와 깨달음은 지도보기와 등산하기’라는 주장에 대해 다른 견해를 밝혔다. 이송곤 박사는 미디어붓다로 보내온 글에서 “불교의 뿌리와 근거는 초기불교에서 살펴봐야 한다”며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이것을 치밀하게 생각하며, 이를 토대로 닦아 나아갈 때 ‘이해’가 되는 것이지, ‘이해’를 단순한 지도보기로 보는 것을 잘못”이라고 주장했다. 이송곤 박사가 보내온 글 전문을 소개한다. 편집자
사진=장명확
한자경 교수의 '이해와 깨달음은 지도보기와 등산하기'라는 주장에 대해
서양철학자 가운데 '생의 철학'으로 유명한 딜타이는 '이해'란 학문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고 하였다. 이것은 '이해'란 모든 학문의 기초가 된다는 의미를 갖는다. 그런데 '이해'는 단지 학문의 기초로서만 의의가 있는 것이 아니라 불교수행에서도 '이해'란 의미있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부처님의 육성에 가깝다고 말하는 초기불교 경전의 교설을 보더라도 교설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수행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해'란 경전의 말씀을 듣고 [문], 이에 대해 생각하고 [사], 마지막으로 닦는 [수] 과정에서 성립이 된다. 즉 이 세 가지를 모두 포함한 과정이 이해인 것이다. 그러므로 현응스님이 이런 과정을 생략하고 깨달음이란 경전을 읽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데에서 오해가 생겼다고 생각한다.
경전, 특히 초기불교 경전을 읽는 과정도 깨달음을 이루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다. 초기불교 경전속에는 ‘문(聞)’-‘사(思)’-‘수(修)’의 과정이 있기 때문이다. 이에 한자경교수가 '이해'란 지도보기라는 주장은 맞지 않다고 본다. 불교의 뿌리와 근거는 초기불교에서 살펴봐야 한다. '
깨달음의 논쟁'도 마찬가지이다.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이것을 치밀하게 생각하며[專精思惟], 이들을 토대로 닦아 나아갈 때 '이해'가 되는 것이지 '이해'를 단순히 지도보기로 보는 것은 잘못된 관점이다. 깨달음은 이러한 ‘문(聞)’-‘사(思)’-‘수(修)’의 이해의 과정속에서 얼마든지 되는 것이 가능하므로[후대 테라바다 불교에서도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이와 같은 ‘문(聞)’-‘사(思)’-‘수(修)’의 이해의 과정의 토대위에서 이루어진다.] 이해의 과정은 지도보기와 등산하기를 다 포함하는 것이다.
그리고 한자경교수가 예로 들고 있는 '어둠'과 '밝은 달'의 비유에서 '어둠'이 있어야 '밝은 달'이 가치가 있다는 말은 맞기는 하나, 그렇다고 '어둠' ='밝음'의 관계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어둠'이 밝아지지 않고 있는데 어떻게 '밝음'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러므로 '오염원'의 번뇌는 점진적으로 닦아 나아가야 청정의 경지인 '깨달음'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초기불교에서의 이러한 관점을 간과하고 한자경교수는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대승의 관점에서는 일견 '오염원'이 '깨달음'이 될 수 있다고 볼 수 있지만 초기불교의 관점에서는 '오염원'이 '깨달음'이 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이상 “이해는 지도보기이고, 깨달음은 등산하기”라는 한자경교수의 주장에 대한 異見의 論據로 나는 초기경전에 나타난 分別의 개념을 예로 들며 설명하면서 결론을 맺기로 한다. 초기불교에서의 分別의 개념은 사물을 해체해서 보는 것이 동전의 앞면과 뒷면을 보듯이 통찰지로 명확히 보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분별의 개념은 단순한 지도보기가 아니라 지도보기 뿐만 아니라 등산하기도 포함하며, 이로써 사마타와 위빠사나의 점진적 수행과정을 통해서 열반으로 나아가기 때문에 중요하기에 다음과 같이 예로 들어 설명하는 것이다.
부처님은 어떤 주제에 대해 설법할 때 분별을 강조하였다. 오온, 십이처, 십팔계로 나누어 설하신 것이 분별(Vibhanga)에 해당한다. 뿐만 아니라 부처님은 사성제, 십이연기 역시 분별을 통해 설하셨다.
빠알리니까야를 보면 다음과 같이 설한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에게 연기를 분별하여 설하겠다. 그것을 잘 듣고 잘 새기도록 해라. 내가 설하겠다."
이와 같이 부처님은 가르침에 대해 분별하여 설하셨고, 출가 제자들은 오온, 십이처, 십팔계, 사성제, 십이연기등의 가르침을 잘 듣고 분별하여 전정사유(專精思惟)함으로써 근접삼매와 본삼매를 거쳐 초선에서 사선에 이르기까지 선정을 닦고, 또한 위빠사나의 통찰지로 깨달음을 향해 나아갔다. 그러므로 이때 가르침에 대한 분별은 가르침을 올바르고 명확하게[vi;철두철미하게] 이해하는 것을 말한다. 즉 오온에서 십이처의 가르침에 이르기까지 명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실천수행에 앞서 필요하였다. 그런 점에서 한자경교수가 이해는 '지도보기'이고, 깨달음은 '등산하기'에 비유한 것은 적절치 못하다.
'분별'은 '禪'의 견지에서 볼 때 '생각덩어리'처럼 깨달음에 방해가 되는 좋지 않은 것으로 볼 수도 있으나 이때 '분별'은 해체하여 보는 것, 그것도 정확히 해체해서 낱낱이 아는 것이므로 오히려 깨달음에 도움이 된다. 그러므로 이해는 비유하면 깨달음이라는 정상에 오르기 위해 지도를 보고[분별을 통해 명확하게 가르침을 이해하는 것] 등산도 하는 것[사마타와 위빠사나를 닦는 것]을 가리킨다. 달리 표현하면 聞-思-修의 '解'와 '行'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은 근기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대체로 아래 단계로부터 높은 단계로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범부의 염오의 상태에서 점차적으로 닦아 수다원에 이르고, 그 다음 단계인 사다함에 이르고, 그 다음 단계로 아나함에 이르고, 마지막으로 완벽한 깨달음인 아라한의 과위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염오'가 '깨달음'일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은 맛지마니까야에서 부처님께서 "나의 법과 율은 바닷속에 비스듬히 있는 절벽이 서서히 깊어지는 것과 같다. 단 한번에 이루어지는 것은 없다."고 분명히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이송곤 박사는?
동국대 교육학과 졸업/ 동국대 대학원 불교학과 졸업(1988년)/ 동국대 대학원 불교학과 박사과정 졸업, 철학박사(2014년)/ 동국대 교양과목 강사역임/ 현재 불교방송 재직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