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50년 전인 1965년 7월 5일. 고려대학교 불교학생회 회원 38명이 오대산 월정사와 상원사에서 제1차 하계수련대회를 갖고 있었다. 지도교수 김영두 교수와 손명현 교수, 지도법사 탄허스님과 함께 월정사로 떠난 이들은 새벽 3시에 기상해 밤 9시에 취침하는 엄격한 수련회를 진행했다.
새벽 4시 반 예불과 좌선에 이어 6시 아침공양, 7시 독송이 끝나면 11시 반까지 탄허스님으로부터 동양철학, 역학 등을 강의를 듣고, 이어 손명현, 김영두 교수로부터 대승불교에 대해 하루 6시간씩 강의를 들었다. 실로 엄격한 금욕생활과 규율 속에서 세속을 떠난 불도의 승려와 같은 생활이었다.
1주일의 수련대회 기간을 끝내기 하루 앞둔 7월 10일, 학생들은 마지막 일정으로 오대산 일대의 암자를 참배하고, 동시에 원보산 스님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상원사에서의 장례식에 참석한 후 3진으로 나누어 불적과 비로봉을 둘러 온 뒤에 제 1진은 하오 4시10분경 월정사에 무사히 도착했다. 이보다 30분 늦게 상원사를 출발 월정사로 향하던 제2진 13명(손 교수와 여학생 7, 남학생 5명)이 물에 잠긴 첫 번째 다리를 건너자마자 다리는 급류에 휩쓸려 떠내려갔다.
폭우를 무릅쓰고 월정사를 향해 내려가던 이들은 두 번째의 계곡을 만났다. 마의 계곡으로 이름난 이곳 등피골은 상원사와 월정사의 중간 지점. 폭우로 깊이 80cm,폭 20m로 급증하고 두 주먹만한 돌들이 떨어질 정도로 물살이 사나웠다.
2진 일행 13명은 계곡을 건너느냐, 아니면 안개가 심하게 낀 산길로 돌아서 가느냐(손 교수의 의견)로 맞서다가 일정을 변경할 수 없으니 돌아갈 수 없다는 쪽으로 결정했다. 이들은 물살을 견뎌내기 위해 스크럼을 짜기로 했다. 이 당시 여학생 들은 물론 남학생들도 경련이 일어날 정도로 긴장되어 있었다. 일행은 오상대(당시 경3), 윤복순(상3) 군을 선두로 하고 중간에 여학생을, 그리고 마지막에 손 교수와 교수를 부축하기 위해 남학생이 마지막 순서로 계곡을 건너기 시작했다.
선두 오상대군이 2/3 지점에 도달했을 때 중간에 있던 한 여학생이 미끄러져 넘어졌다. 순간 여학생들은 스크럼을 짠 채로 거의 기절하여 넘어져 윤 군 및 정명훈 군과 함께 거센 물결에 휘말려 떠내려갔다.
지도교수를 포함한 13명의 남녀학생들이 급류에 떠내려 갈 때, 맞은 편 냇가엔 세 분의 비구니 스님들이 지켜보고 있었으나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손 쓸 시간이 없었다. 같이 떠 내려 가던 손 교수와 두 명의 학생(박찬영, 심재학 군)은 구사일생으로 계곡의 풀뿌리를 잡고 언덕에 기어올라 구조가 되었고 10명(남3,여7)의 학생은 무참히 희생되고 말았다. 특히 선두에 섰던 오상대 군은 가까스로 계곡에서 빠져나왔으나 떠내려가는 여학생을 한 명이라도 구하기 위해 다시 계곡으로 뛰어들었다가 참변을 당하고 말았다. 생사의 기로에서 생명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던진 보살행과 다름 아니었다.
이들의 고귀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당시 불교계에서는 희생을 한 자리에 연화탑을 세웠다. 탑의 비문은 고려대학교 불교학생회 지도교수 김영두 교수가 글을 짓고, 지도법사 탄허 대종사께서 글을 써 주시니 아래와 같다.
2014년 봉행된 연화제 장면. 사진 고려대불교학생회 교우회 제공
연화탑 비문(蓮花塔 碑文)
오가는 나그네시여 잠깐 머물러 합장(合掌)하소서
오대산(五坮山) 이 곳에서 생사일여(生死一如)를 증취(證取)하신 십위(十位)의 젊은 영가(灵駕)가 계셨던 것입니다.
그 이름 고려대학교 불교학생회(高麗大學校 佛敎學生會)의 선지자(先智者). 월정사(月精寺)에서 대승경전(大乘経論)으로 수련(修鍊)하시고 상원사(上院寺)와 적멸궁(寂滅宮)을 참배(參拜)한 다음 만법귀일(萬法歸一)을 투관(透關)하셨던 것입니다.
너무나 환발(煥發)하셨던 혜지(慧智)였기에 겨레의 횃불이자 인류애(人類愛)일 바를 그렇게도 다짐하던 몸부림이었거늘
오오 성스러운 별들이여
말 없이 맡기고만 가신 후사(後事)를 이어 여기 조고마한 연화탑(蓮花塔)을 세워 모시는 차안(此岸)의 맹서(盟誓)가 있아오이다.
일귀하처냐
趙州曰
我在靑州作一領布衫重七斤
南無阿彌陀佛 觀世音菩薩
한해돐 불기佛紀 2993年 七月十日
高麗大學校 佛敎學生會 一同 焚香
김영두 문 김탄허 서
준비위원 서상욱 정운성 이무웅 이윤우 유일상 김숙자
1965년 7월 오대산으로 하계 수련대회를 떠났다가 급류에 희생된 고려대학교 불교학생회(이하 고불회) 소속 학생 10명의 50주기를 맞아 고려대학교 불교학생회와 동문회가 오는 7월 3일부터 5일까지 ‘제50주기 연화제’를 봉행한다. ‘추억 어린 선배님 가신 길을 따라’라는 부체로 진행되는 이번 연화제에 앞서 고려대학교 불교학생회와 동문 선배들은 7월 1~2일 미리 현지에 도착해 연화탑(희생자 탑)을 청소하고, 바랜 글씨에 페인팅 작업을 하고 주변을 정비하고 정리하는 작업에 나선다.
연화제는 7월 3일(금) 선재길 걷기와 삼보일배로 시작된다. 고려대학교 불교학생회 재학생 및 졸업생 일부가 참석하는 선재길 걷기는 오전 8시부터 12시까지 월정사와 연화탑, 중대 사자암까지 진행된다. 이어 중대 사자암부터 적멸보궁까지는 삼보일배(13~15시)로 진행된다. 희생된 선배들의 불교사랑 정신을 계승하고 다짐하는 의미를 갖는다.
둘째 날인 7월 4일(토)에는 연화제와 함께 ‘대학불교운동’을 주제로 한 대담(16~17시)이 진행된다. 대담자로는 월정사 주지 정념 스님, 고려대학교 불교학생회 재학생 회장, 고불회 교우회(동문) 3인, 대불련 총동문회의 원로 회원과 언론계 기자들이 참가한다. 대담에 앞서 이들은 오전 10시부터 17시까지 선재길 탐방 및 적멸보궁 참배에 나선다.
연화제 행사가 열리는 7월5일(일)에는 8시 30분~11시 30분까지 연화제 본 행사가 봉행된다. 월정사 주지 정념 스님 법문이 있고 이어 연화제 관련 행사가 11시 30분까지 이어진다. 특히 이번 연화제부터는 월정사에서 고려대학교 불교학생회 재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증정한다. 장학금 지급의 영속을 위해 장학금 신설 관련 MOU를 체결하고, 고불회(고려대학교 불교학생회 회원)들에게 명예 월정사 신도증을 발급하는 MOU도 체결한다. 고려대학교 불교학생회 교우회에서는 월정사 주지스님에게 공로패와 선물을 증정한다. 유족대표 인사말로 마무리되는 연화제에는 고려대학교 불교학생회 회원, 교우회 회원, 대불련 법우 등 60여 명이 동참할 예정이다.
마지막 날인 7월 5일에는 연화제 관련 학술세미나가 열린다. 동국대 김광식 특임교수가 ‘탄허 대선사와 대학 불교 운동’을, 고려대 조성택 교수가 ‘우리 시대의 부처님’을 주제로 발제하고 이어 질의응답이 진행된다.
세미나 후 참석자들은 연화탑을 참배하고, 희생자들의 왕생극락을 기원하는 범패의식에 참여하는 것으로 모든 일정을 마무리한다.
50년 전 오대산에서 생사불이의 경계를 보이고 타계한 고려대불교학생회 회원들의 프로필은 아래와 같다.
尹福淳(商科 3, 부산고졸, 남21)
당시 불교학생회 회장으로 이번 수련대회의 대회장/ 6.25 당시 종로 경찰서장이시던 윤종화(납북)씨의 4남
홀어머님 밑에서 자람. 어렸을 때부터 독실한 불교신앙을 가진 俊才로서 급우들간에는 무척 재미있게 화제를 끌어나가는 활발하고 능동적인 성격으로 평소에 행동이 모범적이어서 장래가 무척 유망되었음
鄭明薰(經營 2, 대전고졸, 남20)
안암 장학생이며 1학년땐 특대생으로 이름을 날리기도 한 소심한 성격의 실력파.
농사짓는 홀 어머니의 遺腹子로서 불교신앙에의 생활은 항시 주위 사람의 모범이 되었음.
金貴任(國文 2, 목포실업고졸, 여20)
낭만을 즐기던 문학소녀. 시나리오에 뛰어 났으며 습작을 계속해 왔음. 수련대회 떠날 때에도 가방에 원고 뭉치만 가득 넣고 갔었는데 그의 자취방에는 詩 수백편만이 놓여 있었다.
“언제나 더러움을 씻어주는 깨끗한 불...” 하면서 불을 찬양했다. 좀 더 미욱스러운 인내를 배워야겠다며 떠난 여행이었다. 영화감독 강대진씨에게 인정받은 시나리오의 솜씨는 햇빛을 못 보았다고 가족들은 재능을 애석해 했다.
吳相大(經營 3, 경북고졸, 남21)
吳君은 밀양에서 제일극장을 경영하는 오기수(47)씨의 맏아들 63年度 경북고를 우등으로 졸업한 실력파로 급우들에게도 인정받았다.
당시의 하숙집 아주머니 김예환(37)씨의 말대로 “그는 평소 말이 적고 요즘 청년으로는 보기 드문 착실한 학생” 이었다고 또한 한 때 오른팔을 못 써 김여인이 물어봤더니 지난날 29일 고연전 축구 경기가 끝난 뒤 승리 축하 행진을 하다 경찰봉을 맞았다면서 침을 맞겠다고 했었다 한다. 그는 친우들에게 고집통이라고 불릴 정도로 옳다고 믿는 일엔 한발도 물러서지 않는 성격, 그의 이런 성격이 수영에 능숙한 그를 희생시켰을지도 모른다는 친구들의 말이다.
閔榮惠(國文 3,동명여고졸, 여 )
평소 쾌활한 성격에서 남학생들과 어울리기를 잘하며 인기가 좋았고 학교생활을 주로 도서관에서 보내졌다. 대여 장학금을 받기도 했다. 現代文學보다 古典에 더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朴賀卿(사회 2,수도여고졸, 여 )
박양의 어머니 김진옥(42)씨는 “평소에 여행 한번 가본일 없고 학비를 대느라 방학동안에도 가정교사나 책 파는 일만 해왔다”고 말하면서 교수가 간다기에 믿고 보낸 것이 이렇게 되었다고 흐느껴 울었다. 학교에선 강의 외의 시간을 인촌 묘소 산책이나 합창실에서 음악 감상으로 보내던 얌전한 학생이었다고 급우 박승후군은 말했다.
韓春子(獨文 3, 동명여고졸, 여21)
미곡상을 하는 한선우(55)씨의 4남매 중 맏딸. 평소 꼼꼼하고 얌전한 성품. 평소 괴테를 탐독하고 사색하기를 좋아했었다. 또한 어머니 날마다 선물을 잊지 않는 효녀. 그래서 인지 韓양의 어머니는 영구가 도착할 때 기절까지 했다. 동생에게 보낸 “參禪도 하고, 哲學 강의도 듣고.....”라는 편지가 마지막일줄을 몰랐다고 가족들은 더욱 비통해 했다.
安璟姬(國文 3, 대구사범졸, 여23)
梨大 장학생으로 다니다가 64년 동교 국문과에 편입. 항상 의문부호를 지니고 있는 문학소녀로 늘 책을 옆구리에 끼고 걷기 좋아 했고 떠나던 전 날에도 杜詩를 읽으며 밤을 새웠다. 사고 있던 날 새벽에는 “꿈에 신선을 만나는데... 왜 깨우냐”하며 짜증을 부려 모두 한바탕 웃음 소동이 났었다. 과대의원으로 활약하기도 함
李熙妊(國文 2, 숭의여고졸, 여19)
수줍고도 눈망울이 고운 틴에이저. 항시 여고생모양 단발을 하고 다닌 것이 퍽 인상적이다. 글을 자주 즐겨 씀. 동생에게 쓴 엽서 중에도 부모님 모시고 공부 잘해라고 당부를 했고 형제간 두터워 늘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고 함
趙華衍(國文 3, 동덕여고졸, 여21)
큰키에 평소 검소한 옷차림으로 다님. 여류 문학가 지망생으로 시나 수필에 뛰어난 재주를 보임. 불경을 탐독하여 작품세계에 佛敎의 思想을 담으려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