융(K. G. Jung, 1875-1961)이 동양 사상을 직간접적으로 접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융이 인도를 방문한 1938년쯤에는 이미 그의 분석심리학에서 가장 핵심적인 ‘집단적 무의식’의 탐구에 온 관심을 기울이고 있던 때로 알려진다. 융은 ‘집단적 무의식’을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와 다르게 인식하고 이해하면서부터 수년 동안 유지해오던 친밀한 관계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특히 1913년 독일 뮌헨에서 열린 제4차 국제정신분석학회 이후 두 사람은 멀어지게 된다. 이것은 융이 자기 나름대로 생각해온, 현행하는 의식 너머 존재하는 무의식을 주장하면서 프로이트와 뒤틀리게 된 것으로 이해된다.

융은 인도여행을 통해 다른 사상들, 곧 불교와 요가-상캬 사상에서 그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있던 [집단적] 무의식에 관한 많은 단서들을 얻은 것으로 보인다. 융은 동양과의 만남을 무한한 보람으로 여겼다. 그러나 융은 동양사상의 뜻을 심리학적으로 이해하고자 하면서도 언제나 서양 문화 속에 있는 이에 비견하는 생각들을 발굴하려고 노력했다. 융은 그의 심리학을 완성하는데 동양의 사상에 빚을 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했지만, 동양 사상을 그대로 모방하지 않으려고 부단히 애를 썼다. 또한 동양의 사상, 곧 불교사상, 요가사상, 중국 주역, 티베트의 만달라 등에서 많은 영감을 얻고서도 그것에 상응하는 용어는 거의 서양 속에서 대용어(代用語)를 찾아 사용하려 했다. 융은 그의 분석심리학의 체계, 특히 마음을 설명하는데서 불교의 유식학(唯識學) 그리고 요가-상캬 사상에서 많은 시사점을 발견하고 그것을 거의 그대로 원용하고 있지만 용어는 달리 사용하고 있는 데서도 그의 이 같은 소신을 알 수 있다.

그는 수많은 독서를 통해 다방면에 박학다식하였고 직접 체험하지 않은 사실은 쉽게 인정하지 않는 성향이어서 자신의 이론의 독창성을 확보하려 했고, 그것이 쉽지 않을 경우 일단은 자신이 나고 자란 서양문화에서 찾으려고 노력했다. 다만 그것도 쉽지 않을 경우 자신도 모르게 동양 사상과 종교의 고급정보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가 동양 사상과 종교에 영향을 받은 것은 말년으로 접어들면서 더 두드러진 것으로 보인다. 만일 그가 동양의 불교, 특히 유식학의 이론이라는 정보를 접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그의 분석심리학에서 마음은 미완의 상태로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마음에 대한 융의 연구와 불교, 그중에서도 유식학에서의 비교는 융에게 미친 유식학의 영향이 얼마나 지대한 것인지를 알게 한다.

융의 무의식에서 리비도((libido; 성적 욕구나 충동)는 마음의 에너지(psyche energy)로 보았다. 이것은 제 7말나식의 네 가지 번뇌와 도덕적 개념인 선과 악의 중성적 무기와 관계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무의식의 내용은 선도 악도 아니며, 합리와 비합리적인 것이 아닌 그 양면성이 있다. 알라야식은 결과가 발생하면 원인은 소멸하는 것처럼 끊임없이 상속한다. 이것은 융의 집단적 무의식이 사고의 저장고로 이해한 것과 유사하다. 융의 집단적 무의식은 잠재해 있다가 위기나 어려움에 부딪치면 그림자라는 원형이 의식화된다. 이것은 유식학에서 마음(알라야식)의 종자는 잠재해 있다가 인연을 만나 활동하게 된다는 것과 닮았다. 또한 융의 자기 원형은 유식학의 본유무루종자와 상응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점들이 유식학이 융의 분석심리학의 마음 형성에 미친 영향들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융의 마음 형성이 유식학의 마음에서 모든 것을 영향 받았다고는 단정할 수는 없다.

아무튼 융이 그의 마음연구에서 불교의 유식에서 깊은 영향을 받은 것은 분명하다. 불교에서 마음에 대해 이야기할 때 프로이드와 함께 융을 자주 거론하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최근 불교계에서 ‘융심리학과 불교사상’이라는 주제의 주제발표문이 발표되고, 이 발제에 대한 뜨거운 토론이 벌어졌다. 〈불교평론〉의 매월 토론프로그램인 ‘열린논단’ 6월 모임이 열린 지난 19일, 서초동 불교평론 세미나실은 융에 대한 발제와 토론에 참석하려는 대중으로 빼곡히 들어찼다.



칼 융 전공자 이죽내 교수가 불교평론 6월 열린논단 열강을 하고 있다.


이날의 발제는 융심리학 전공자로 이름 높은 이죽내 대구수성중동병원 진료고문이었다. 그는 짧은 시간 안에 ‘융심리학과 불교사상’이라는 광범위한 주제에 대한 발표라는 간단치 않은 과제를 오랜 경륜과 내공으로 시종 여유 있게 풀어냈다.

“불교에도 여러 측면이 있다. 종교적 측면, 사상·철학적 측면, 심리, 복지, 또는 정신적 측면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사상에 맞춰 강의를 하겠다. 나는 평생 정신치료를 한 사람이므로 불교사상과 융 사상. 융과 동양사상, 특히 불교에 대한 관계를 언급하고 불교사상과 융 사상이 정신치료 측면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가를 고찰해보고자 한다.”

신경과 전문의이기도 한 이죽내 교수는 이어 “증상이나 병도 중요하지만, 그 병을 앓고 있는 인간, 인간에 대한 이해가 전제돼야 하며, 의사는 병과 인간을 같이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동안 늘 병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지, 인간에 대한 관심이 없었으며, 그러니까 사람들이 병원에가 가는 것을 두려워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 교수는 발제 내내 인간의 중요성을 반복해 강조했다.

“현대적인 치료는 인간이 소외된 것에 대한 치료라고 할 수 있다. 치료는 인간을 풍성하게 만들어야 한다. 과학(의학)과 인간이 같이 가야 하는데, 이것도 잘 안 되는 것 같다. 과학과 인간이 같이 나가야 한다. 인간을 놓쳐서는 안 된다. 인간이 있고 병이 있지 병이 있고 인간이 있을 수 있나. 이런 원칙은 일반진료에서도 마찬가지다. 내과, 외과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정신과만의 문제가 아니다. 내일 수술을 집도할 의사의 얼굴도 모르고 몸을 맡기는 오늘의 병원 실태, 이게 말이 되나. 큰 문제 아닌가?”

이 교수는 이렇게 된 원인은 예전에는 그래도 의학에 철학적 해석학적 뿌리가 다 있었지만 19세기 와서 자연과학이 극도로 발전하면서 세분화되고 각각이 독립되면서 철학적 뿌리가 모두 사라졌다고 안타까워했다.

이 교수는 “앞으로 불교가 이런 문제 관심 가져야한다”고 주문했다. 이유는 “마음을 다루고 연구하는 데 있어서는 융심리학보다 불교심리학이 더 깊은 차원에서 다루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두루 알다시피, 서양에서 인간의 마음을 공부할 때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이 우선 나오고 그 다음에 융이 나왔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융심리학에 대한 관심이 거의 없다. 융심리학의 정신구조에 대한 연구가 프로이드 보다 더 심오하게 되어 있는데도 그렇다. 더구나 불교의 유식학에 비교하면 융심리학은 그 수준이 아주 낮은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가 여전히 서양의 융, 프로이드에 매달려 있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정작 융은 동양에 매달렸는데도….”

불교의 요체를 잘 이해하는, 더구나 참선 등 수행의 실수에도 적지 않은 관록을 가진 원로교수의 말에는 묘한 무게감이 실렸다.

“융은 동양의 사상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융은 동양에게 ‘동양에서 답을 찾으라’고 권한다. 융의 권유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우리 쪽에서 그 해답을 찾아야 하지 않겠는가.”

원로 교수의 후학들에 대한 간곡한 질책은 차라리 안쓰럽게 다가온다.

“자기의 마음에서 찾으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완전히 불교 아닌가?”라고 반문한 이 교수는 “사실 유교나 도교도 마찬가지이며, 동양에 융심리학을 능가하는 사상들, 특히 불교의 심리학(유식학)을 기초로 해서 동양심리학을 만들어야 한다”고 목청을 높였다. “사실 우리는 심리학에서도 서양에 식민지화 되어 있다. 서양에 짓눌려 있다. 별게 아닌데 서양에 늘 종속되어 있다”는 개탄과 함께.

이 교수는 “그래서 [저는] 늘 불교에 관심이 있고, 특히 원효를 좋아한다”고 술회했다. 원효의 원융무애심리학을 정립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갖고 있다고 소개했다. 그는 원효를 향해 “멋진 선배 아닌가. 우리가 이 멋진 선배의 가르침을 따라 원융무애심리학을 정립하면 세계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심리학을 세울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불교의 중심적 사상은 중도사상인데, 이는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면서,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것(非有非無 亦有亦無)이라고 전제한 이 교수는 “보통 자연과학에서는 양자택일 사상으로는 반쪽밖에 못하는 한계가 있고, 자연과학은 가설 위에, 그러니까 자연과학 체제가 가짜에 있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융심리학의 사상적 특징을 ‘대극합일, 전일성의 사상’으로 정리한 이 교수는 이것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면서 이것임 뿐만 아니라 저것이기도 한’ 중도사상과 거의 같다고 밝혔다.

공자 말대로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없으며, 동서양의 철학, 유불선도 다 같다고 본다는 견해를 밝힌 이 교수는 “중도와 중용사상은 엄밀히 따지면 다르지만 비슷한 부분이 많다”며 “요순시절 임금들도 늘 중(中)을 물려주었으며, 융도 ‘중앙으로 향하는’이라고 해서 중(中)을 매우 강조했다”고 소개했다.

그러면서 이 교수는 “여기서의 중은 세속적인 의미가 아니고, 중도는 중간의 적당한 것이 아니”라며 “중도가 되려면 대극을 초월해서 0도(대극, 배타적)에서 시작해서 180도 경계를 가서(雙遮) 360도의 대극포괄적의 경계로 와야 한다(雙照). 이런 경계가 없이 말로 해서 하는 것은 세속적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 교수는 “쌍차, 쌍조 단계까지는 설사 못가더라도 중도의 개념이라도 가지면 좀 나아질 것”이라며 “세간적 의미의 중도만 생각해도 여유가 생긴다. 360도의 경계에 가는 것은 사실 어렵다”고 고백했다.

이 교수는 동양사상에 대한 융의 관심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설명했다.

“융은 1920년 전후 프로이드와 함께 공부했다. 콤플렉스 이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