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종 흥천사 주지 정념스님은 10월 21일 오후 2시 서울 성북구 돈암동에 위치한 흥천사에서 사찰 운영권을 정상화하는 역사적인 인수인계를 진행하고 향후 조계종단의 종지와 종풍에 맞게 법회 및 포교활동을 전개한다.
이번 인수인계는 조계종이 1962년 통합종단 출범 이후 50여년 만에 조계종 소속 사찰로 직접 법요의식을 집전할 수 있게 된 역사적인 일로, 이를 계기로 흥천사가 서울 강북권의 포교중심 도량으로서 거듭날 수 있게 하는 토대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흥천사 극락보전 정면 모습. 사진=문화재청 제공
흥천사는 조선 태조 4년(1395) 신덕왕후 강씨의 명복을 빌기 위해 1396년 창건된 전통사찰로 숭유억불의 조선시대에도 한국불교의 전통을 계승해 온 사찰이다. 그러나 조선 후기와 일제시대 등 근대기를 거치면서 사세가 크게 위축됐고, 1962년 통합종단 출범 이후 흥천사는 종단의 관심에서 벗어나면서 실질적인 운영을 하지 못했다. 이로 인해 흥천사는 사찰 대표권은 조계종에 있으면서도 실질적인 점유권을 행사하지 못하는 기형적 구조로 운영돼 왔다.
이런 가운데 총무원장 자승스님과 신흥사 조실 무산 오현 큰스님은 전통사찰을 보존하고 일체의 토지 매각 없이 흥천사를 정상화할 수 있는 방안을 추진했고, 이번에 결실을 맺은 것이다.
자승 스님은 지난 6월 21일 종무회의를 통해 종책특보단장 정념스님을 주지로 임명하면서 “서울 강북지역의 포교 중심도량으로 흥천사 정상화를 위해 적극 노력해 줄 것”을 당부한 바 있다.
정념 스님은 “통합종단 출범 이후 50년 만에 흥천사가 명실상부하게 조계종의 품으로 돌아오게 됐다”며 “앞으로 흥천사가 조계종의 서울 강북권 포교와 사회활동의 중심도량이 될 수 있도록 적극 노력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정념 스님은 이날 인수인계가 완료된 직후인 오후 3시 흥천사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흥천사 정상화 과정에 대한 경과보고와 의미 등을 밝힐 예정이다.
*흥천사는?
서울 돈암동에 위치한 흥천사는 조선 태조 4년(1395)에 신덕왕후 강씨가 죽자 능을 정릉으로 정한 후 세운 사찰이다. 당시 이 절은 관세음보살상을 모시고 국가와 국민의 안녕을 기원하던 170여 칸 규모의 큰 사찰이었다.
흥천사 극락보전은 10겁(十劫) 이전에 성불하고 서방 극락세계에서 대중을 위하여 설법하고 있는 아미타불을 모시는 법당으로, 철종 4년(1853) 계장스님에 의해 다시 지어졌다.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놓인 다포양식 건물이다.
흥천사 극락보전은 19세기 사찰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는 화려한 목조 건축으로 뛰어난 건축기술을 보여주고 있다. 서울에서는 희귀한 사찰 건축이므로 매우 귀중한 유산으로 평가된다.

흥천사 극락보전.
흥천사(일명 신흥사)는 조선초 태조6년(1397)에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姜氏)를 모신 정릉의 조포사로서 현재 중구 정동에 창건하였던 절이었다. 당시 이 절은 궁중의 원찰로서 42수 관세음보살상을 봉안하고 국가와 국민의 안녕을 기원하였으며, 조계종의 본사로 삼았던 170여간의 큰 절이었다. 그러나 태종 9년(1409)에 정릉을 현재 자리로 천릉하면서 능 옆에 작은 암자를 만들고 이를 신흥사로 칭하였다. 한편 정동 자리에 있던 흥천사는 연산군때 불이 나서 폐허로 방치되었고, 중종 5년(1510년) 3월에는 유생들에 의하여 사라각 마저 불에 타버려 완전히 폐사되었다. 극락보전이란 십겁(十劫) 이전에 성불(成佛)하고 서방 극락세계에서 대중을 위하여 설법하고 있는 아미타불을 모신 전각이다. 이 부처는 극락세계에 왕생하기를 원하는 중생이 염불을 하고 일념이라도 지심회향하면 곧 왕생할 수 있게 해주며, 그 때 서방에서 성중이 와서 그 사람을 맞이해 간다고 한다. 그 세계에 살게 되면 다시는 전생(轉生)하지 않으므로 생사(生死)의 윤회(輪廻)가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극락보전에는 현세의 고통에서 벗어나 안락하고 살기좋은 극락의 정토세계로 이끌어 주는 아미타불상과 그 뒷면벽에 아미타불화가 배치된다. 흥천사 내의 극락보전은 정면 3간, 측면 3간의 단층 팔작 목조 와가로 철종4년(1853) 계장스님에 의해 중수된 것이다.
돌층계를 정면에 두고 기둥은 창방과 평방으로 결구하고 기둥 사이에도 전, 후면에서는 각 2구, 측면에서는 각 1구의 공간포를 둔 다포식 건물이다. 정면 3칸에는 꽃살 창호를 달고 좌우 뒷면은 판벽이다. 내부 바닥은 우물마루이고 천장은 빗천정 가운데 우물천정을 두었다.
이러한 구조와 형태는 조선 말의 전형적인 건축양식을 보역주는 것으로 이시대 건축의 모범이 될만하다. 이 건물은 19세기 사찰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는 화려한 목조 건축으로 뛰어난 건축 기술을 보여 주고 있는데, 서울에서는 희귀한 사찰 건축이므로 매우 귀중하게 평가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