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홍준 교수(전 문화재청장)가 한국불교계를 향해 ‘인문정신 발굴’과 ‘인재 양성’을 촉구했다. 1700년 불교문화유산의 활용방안을 논의하는 토론회장에서 나온 유홍준 교수의 일갈은 인문학과 인재양성에 이상할 정도로 소홀한 불교계를 향한 매서운 질타였다.

청중석에서는 ‘역시 유홍준'이라는 탄성이 터져 나왔다. 평범한 말도 그의 입을 통해 나오면 준엄한 질타와 빼어난 대안으로 둔갑했다. 가뜩이나 인물이 없는 불교계에서 우리나라 최고의 문화기획자이며 이론과 실무를 갖춘 실력자를 초청해 4시간 동안 진솔한 이야기를 경청한 이날 토론회는 참으로 소중한 시간이었다.

발제를 하고 있는 유홍준 교수

“불교문화유산의 보전과 활용의 문제에서 우리가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할 것은 여기엔 종교적 관점과 문화재적 관점이 동시에 묶여 있다는 점이고, 두 번째는 역사적 관점과 현재적 관점의 공존이며, 세 번째는 유형유산과 무형유산으로 나뉘는 문화유산에서 보통 유형유산에 국한해서 이 문제를 논하곤 하는 점이다. 이런 문제의식을 갖고 저는 먼저 우리 불교문화유산이 1700년 동안 어떻게 창조되어 왔고, 어떻게 파괴되었으며, 어떻게 변질되었는지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명지대 교수)는 조계종 승가교육진흥위원회가 8월 31일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2층 국제회의장에서 주최한 ‘한국불교중흥을 위한 대토론회’에 참석, 불교 문화유산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정연한 논리로 피력했다. ‘1700년 불교문화, 어떻게 보전하고 활용할 것인가?’라는 제목의 주제로 열린 이날 토론회에서 발제에 나선 유 전 청장은 한국 불교문화의 역사적 흐름을, 삼국시대부터 시대별로 살피며, 고려의 멸망과 함께 1천 년 간 이어진 불교문화의 전통은 일단 막을 내린다고 정리했다.

이어 조선왕조가 주도적 이데올로기를 불교에서 성리학으로 일대 전환시키며 동시에 강력하고도 무자비한 폐불 정책으로 사찰과 불교문화유산은 철저하게 파괴되고, 승려는 천민으로 전락되며, 사찰은 몰수되며, 파불이 자행됐다고 밝혔다. 임진왜란이라는 국난을 겪으면서 불교는 다시 부활의 전기를 맞이하고, 임진·병자 양란 이후 전국에 사찰이 중창되며, 그런 면에서 서산 대사, 사명당은 조선불교의 중창조였다고 주장했다.. 법주사 팔상전, 화엄사 각황전, 금산사 미륵전, 무량사 극락전 등 웬만한 재력으로는 불가능한 거대한 중층 불전들이 세워지고, 전국에서 불사들이 일어나며, 민간은 현세의 구복과 내세의 구원을 위해 다시 사찰을 찾아오고, 엄청난 크기의 괘불이 조성되어 야단법석을 장식했다고 밝혔다.

“조선후기는 더 이상 유교국가가 아니었다. 국가 운영의 이데올로기는 여전히 성리학이었지만 민간신앙으로서 불교와 공존하는 이중체제였다. 연담, 백파, 초의 등 고승들이 배출되었고, 국가도 이런 추세를 거스르지 못하여 정조는 용주사를 세우고 부모은중경을 간행했다”고 밝힌 유 교수는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사찰들의 가람배치는 이 때 재편성되면서 산지중정형으로 틀을 갖추게 되고, 이는 향교, 서원과 마찬가지로 미음(ㅁ)자 구조를 기본으로 하면서 양 날개를 다는 형식인데, 불교 형식이 유교 형식으로 들어갔다가 그것이 다시 불교 형식에 반영되면서 우리의 전통 건축 형식으로 자리매김하게 되는 것이고, 여기에서 우리나라의 독특한 산사의 미학이 이루어진다”고 설명했다.

“자연과 조응하는 절집 건축으로 인하여 또 다른 인문적 표정을 갖는 산천의 경관이 탄생하고, 어느 산에 가든 가장 좋은 자리에 절집이 들어서 있는 것을 보면서 누구든 경탄해 마지않는 산사의 전통은 불교문화유산의 가장 큰 자산”이라고 평가한 유 교수는 “거기에 민중적 형식도 들어오게 되는데, 지난 200년간 억불정책 속에서 민간이 의지한 산신령, 칠성님을 불교가 적극 끌어안아 사찰 한쪽에 칠성각, 산신각이 들어서고, 마을의 지킴이인 장승이 사찰의 지킴이로 받아들여져 실상사, 불회사, 관룡사 등의 돌장승들이 말해주듯 사찰장승으로 수용되는 등 불교의 포용력과 흡합력이 여실히 나타나게 된다”고 밝혔다.

유 교수는 “조선왕조의 말기, 민란이 일어나고, 서학이 들어오고, 동학이 일어날 때는 민간신앙으로서 미륵신앙도 일어나 수많은 민불이 조성되는 등 조선후기 국가운영은 유교를 주도적 이데올로기로 하였지만, 민간의 마음속에 자리잡은 신앙은 불교였다”고 분석했다.

일제강점기 이후 조선후기에 불교가 이처럼 다시 일어났지만 당시엔 이를 이끌어가는 종단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때문에 파벌도 없었다고 밝힌 유 교수는 일제강점기로 들어서면서 일제는 우리 문화를 말살시키는 작업의 일환으로 조선불교를 일본 임제종에 편입시키려는 시도를 했고, 조선불교가 위기를 맞자 탄압을 이기기 위해 불교계는 단결을 하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만해 스님 등이 조선불교를 이끌어갈 종단을 탄생시켰다는 것이다. 결국 1911년 일제는 사찰령으로 30본산제도를 인정하고, 1924년엔 31본산 체제가 확립되었는데, 그런 억압된 상황에서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일제가 강제로 실시한 토지조사 때 불교는 기존의 사찰과 산문이 소유한 토지를 대장에 올려놓아 대찰의 경우 수십 만, 수백 만 평을 소유하게 되었고, 그것이 오늘날 조계종의 거대한 인프라가 되었다고 설명했다.

해박한 지식과 탁월한 관점으로 한국불교사와 불교문화사를 일괄한 유 교수는 이어 불교문화유산의 보전 문제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피력했다.

불교문화유산 중 우리에게 가장 크게 다가오는 것은 사찰건축이며, 이것을 잘 보존하는 것은 사찰과 종단뿐만 아니라 문화재 전반의 중요과제라고 전제한 유 교수는 문화재로 지정된 오래된 목조, 석조 건축은 특히 문화재 당국이 세심히 신경 써야 할 문제이지만, 절집 자체를 어떤 모습으로 가꾸는가는 사찰을 지키는 승려의 문제라고 지적했다. 유 교수는 이 부분에 대해서 우리는(불교계는) 솔직히 반성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며, 그것은 이 시대의 중창불사 문제라고 날을 세웠다.

1980년대에 들어올 때까지 극도로 열악했던 조계종의 재정이 1980년대 후반으로 들어서면서 달라지게 되었으며, 사찰에 다시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대시주도 등장하면서 대대적인 불사가 일어나게 되었는데, 이 좋은 기회를 살리지 못하고 오히려 많은 것을 잃게 되었다고 개탄했다. 위기의 시절은 기회로 되었는데, 이 좋은 중흥의 기회가 불교문화재, 그 중 사찰건축에 중창불사라는 미명아래 치명적인 변질과 상처를 입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송광사, 수덕사 등 대찰부터 거대한 중창불사가 이루어졌지만, 불행히도 이 때 중창불사의 방향을 설정하고, 현대 사찰의 새로운 미학을 이끌어갈 스님이나 건축가가 없었다”고 지적한 유 교수는 “중창불사에는 포클레인이라는 중장비가 사용됨으로써 삽시간에 형질이 변경되어 연병장을 연상케 하는 이유 없이 넓은 절 마당이 생기고, 그 동안 가난하게 살아온 것이 한이라도 된 듯, 화려하고 부티 내려는 중창불사는 우리 산사의 미학을 완전히 일그러트려 버렸다”고 비판했다. 대찰의 경우는 대중을 맞이하기 위한 변형이었다 치더라도 아기자기한 산사의 아담한 절 마당이 허전하기 그지없는 밋밋한 넓은 마당으로 변한 것에는 허망함조차 일어날 정도이고, 절집의 진입로도 큰 상처를 입었다고 지적했다. 산사의 건축은 진입로에서부터 시작되며, 산사의 진입로는 세속과 성역을 시간적, 공간적으로 가르는 중요한 역할을 하며 선암사, 송광사, 해인사, 백양사 등 고찰의 진입로는 건물보다도 우리의 마음을 풍요롭게 해주지만, 이것이 현대적 편의라는 이유로 길을 넓게 닦고, 주차장을 바짝 당겨 마련한 것은 산사의 미학을 일그러트려 놓는 일이었다며 그 점에 대해서는 행정 당국과 종단, 그리고 스님들 모두의 반성이 있어야 할 것이라고 목청을 높였다.

유 교수는 이 시대 문화재 건축에서 가장 큰 문제로 되는 것은 기술도 기술이지만 자재와 재료의 문제라며 새로 짓는 건물, 복원한 건물이 예스러움을 담아내지 못하고 생경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이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또 이것은 불교계의 문제가 아니라 문화재 관리의 문제라는 면이 더 크다고 밝혔다. 목재, 단청 재료, 기와, 기계로 마감한 화강암 석자재, 개금 문제 등을 차례로 지적한 유 교수는 장흥 보림사, 철원 도피안사 철불 비로자나불상, 불국사 금동아미타여래좌상과 금동비로자나불좌상 등에 칠했던 천박한 도금에 대해 강하게 비판하며, 결국 문제 해결방법은 스님 등 관계자의 마음과 자세라고 강조했다.

절집 조경, 폐사지 복원, 석조문화재 보호각 문제 등과 관련한 자신의 입장을 설명한 유 교수는 거듭 사찰에 상주하며 이를 지켜보고 관리하는 스님들도 숙지하고 있어야 한다고 요구했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나라의 경제력도 커지고, 민도도 높아지고, 스님들의 안목도 넓어지고, 민간의 요구도 세련되어가고 있는 만큼 이제 이런 문화능력에 맞는 불교문화유산을 창출해내야 한다고 강조한 유 교수는 그러나 지금 같아서는 백년, 2백년 뒤 한국불교미술사를 말할 때 과연 20세기, 21세기의 불교미술을 어떻게 말할지 안타깝다고 개탄했다.

불교문화유산 활용과 관련 ‘성보박물관의 과제’를 언급한 유 교수는 “30개가 넘는 성보박물관 가운데 현재 성보박물관의 참 기능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통도사 성보박물관과 직지사 성보박물관 정도”라며 “박물관의 구성요소 유물, 건물, 사람, 재정을 고루 갖춘 성보박물관이 늘어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바람직한 박물관 운영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사람에 많은 투자를 해야 하고 안목 있는 스님이 관장을 맡고 전문적인 학예원을 배치하여야 한다”고 거듭 강조한 유 교수는 “부처님에게 바치는 시주도 일종의 도네이션이라고 본다면 성보박물관을 위한 대시주를 어떻게 확보하느냐가 이 문제의 열쇠가 될 수 있다. 사찰에 시주하는 것과 별도로 성보박물관에 시주하도록 유도하여 재정을 확보하는 것도 한 방법이 될 것”이라고 조언했다.

유 교수는 또 제주 올레길과 각 지방의 둘레길을 세계적으로 유명한 ‘산티아고 가는 길’과 비교할 때 큰 차이는 인문정신과 역사에 대한 동기부여가 적다는 점이라며, ‘산티아고 가는 길’과 같은 순례의 길을 불교계에서 깊이 연구하여 새로운 프로그램으로 만들어낼 수는 없는가, 이를테면 ‘남도의 산사 순례’, 즉 지리산 자락, 섬진강변의 아름다운 풍광이 있고 보림사, 쌍봉사, 연곡사, 태안사, 화엄사, 천은사, 실상사의 아름다운 팔각당 사리탑이 있고, 운주사와 불회사가 갈라지는 삼거리에는 중장터라는 내력도 있고, 천관산과 보성만의 풍광, 송광사에서 굴목이재 너머 선암사로 가는 산길을 일주일이고 열흘이고 이 땅에 선종이 뿌리내리던 시절을 생각하며 남도의 봄을 즐길 수 있는 길을 스님들의 길로 엮어주시면 우선 나부터 따라가 보고 싶어진다고 발상의 전환과 대분발을 촉구했다.

유 교수는 끝으로 유형적인 문화재인 법당과 탑파의 복원보다 절실히 요구되는 것은 인문학

으로서의 불교를 대중적 언어로 말하는 것임을 강조했다. 인문학은 인간의 가치를 찾아내는 일이고, 종교는 기본적으로 인문학이라고 전제한 유 교수는 “시대의 문제는 고전에 답이 다 들어 있다. 그래서 고전을 새롭게 해석하면서 그 길을 찾으려고 하는 것이다. 불경 같은 위대한 고전이 또 있을까. 그 답을 찾아 헤매는 중생들에게 스님들은 친절하면서도 진중한 답을 말해줄 수 있어야 이 시대 불교문화가 일어난다. 그래야 다시 중흥한다. 김난도의 아프니까 청춘이다, 박경철의 동행이 왜 베스트셀러가 되었는가, 그 속에서 해답의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아서 독자들은 거기에 매달린다. 그런 실증적이고, 구체적이고, 희망적인 이야기를 불교의 언어로, 불교적 사고로, 불경의 예증으로 말해주는 책이 나오기 바랍니다. 그건 스님 세계에서만 할 수 있다. 예전에 법정 스님의 무소유가 있었는데 그 이후 그런 결과물이 불교계에선 나오지 않았다. 법정 스님의 절판시키라는 단호한 유언은 다른 스님들이 무소유를 뛰어넘는 모습을 보이라는 준엄한 할(喝)로 받아들일 일이다”라고 역설했다.

이날 토론회에는 이상해 성균관대 교수가 사회를, 범하 스님(성보문화재연구원장), 황평우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장, 김영애 다할미디어 대표가 토론자로 참여했다.

토론회장에는 조계종 교육원장 현응 스님, 포교원장 혜총 스님, 종회의장 보선 스님, 문화부장 진명 스님, 동국대 불교대학장 계환 스님, 불교중앙박물관장 흥선 스님, 문화유산국민신탁 김종규 이사장, 손안식 중앙신도회 상임부회장 등이 참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