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폭설로 타버린 차밭 전경.

지금까지 겨울에 내리는 눈은 차나무에 있어 적당한 보온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이른바 혹한을 이겨낼 수 있는 이불을 덮은 것처럼 차나무 위에 내린 눈은 차나무를 냉풍으로 인한 추위로부터 보호했다. 그래서 눈을 치우지 않고 그대로 두는 것이 차농들의 상식이었다. 적당히 내린 눈을 치워버리는 일은 잠잘 때 이불을 걷어차면 감기에 걸리는 것처럼 해로워 오히려 생산량을 저하시키는 원인을 제공하였지만 지난해는 3한 4온의 균형이 깨지고 폭설로 인한 무게감과 얼음이 되어 장기간 지속되다 보니 차나무에 동상이 오고 동사하게 된 원인이 된 것이다. 대부분의 차 농가에서는 평년보다 차 따는 시기를 늦추면서 기다리기도 하고 또 봄이라고 어기지 않고 올라오는 몇 안 되는 찻잎들을 따 햇차를 만들기도 하였지만 이런 차 흉년은 기실 차인들에게 좋은 차를 제공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안겼다.

카메라를 들고 올라오는 그 여리디 여린 올해의 찻잎을 담기 위해 성급한 마음에 차밭을 찾았다가 털레털레 돌아온 발걸음에 무게감을 느꼈던 게 여러 번, 다 잡은 마음으로 보성을 찾았을 때는 이런 차꾼들의 마음을 위로라도 하듯 선인들이 써 남긴 茶詩에서 보았던 기원의 모습을 찻잎 대신 담을 수 있었다.

*<<STRONG>贈友生-벗에게>

蟄雷前夜破山巾 경칩의 전날밤에 천둥소리가 산의 두건을 깼다
野色川容淑且眞 야색과 강의 용모가 참 현숙하고 거짓이 없구나
消渴長卿何事業 소갈증에 걸린 당신은 무엇을 하고 있느냐
一床香火祭茶神 상 하나 위에 향불로 차신에게 제사 지내고 있노라

위의 시는 의병장이면서 차인이었던 조선의 고경명(高敬命, 1533~1592)이 남긴 茶詩이다. 그는 20首가 넘는 茶詩를 남기고 있지만 섣달에 내린 눈을 치우고 나서 차 한잔 달여 마시다가 남긴 <臘月十七日雪-선조 18년 십이월 십칠일 눈이 내렸는데 눈이 너무 많이 와서 사람이 왕래를 할 수 없으므로 백성들로 하여금 눈을 치워 왕래할 수 있도록 하였다. 나는 관사 다실에 좌정하여 산성다완에 차를 달여 마시고 나서 마음에 감동이 일어, 이에 천하최고의 찻그릇임을 전하고자 기록을 전한다.>라는 차시도 남겨 그때 그때의 풍정을 잘 느끼게 하고 있지만 <벗에게> 라는 제목의 위 시는 차에 대한 예우와 지혜가 담겨 있다.

*<<STRONG>雪中示剛叔-폭설이 내려 날씨가 매우 추운데 다실에 좌정하여 차를 달이면서 짓다>

浙浙風生樹 스산한 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드는데
蕭蕭日隱山 해는 쓸쓸하게 산 너머로 숨는구나
窓扉先慘慄 창문틀이 추위에 먼저 덜덜 떨고 있고
雲物頓冥頑 완고함과 우둔함이 구름에 묻힌 것 같네
纈眼花成幻 비단실로 짠 구슬 꽃은 눈 감으면 헛것이 되고
添愁鬢欲班 새로 고민이 생기니 머리가 희끗희끗해지려 하는구나
青燈照煎茗 푸른 등 밝혀 놓고 차를 달이는데
心事笑寒慳 마음이 세상사 춥고 쫀쫀함을 비웃고 있노라

<贈友生-벗에게>의 시 앞에 또 그가 지은 <雪中示剛叔>라는 시는 폭설이 내리고 이듬해 경칩이 오자 소갈증이 있는 벗을 생각하며 차 풍년을 비는 다정과 기원이 담긴 시이다. 이러한 선인들의 지혜가 차 흉년이 든 오늘에 석선혜 스님의 기원으로 이어졌으니 경건한 마음으로 필자 역시 두손을 합장하고 마음을 모아 찬탄송과 진혼제을 올렸다.

*찬탄송

초목 가운데 가장 무성한 늘 푸르름으로
지혜와 예절과 지조와 보건을 높이 세워
왕실에서는 법도를 선비에게는 덕목을
서민에게는 영약을 가르치고
종교에는 높은 철학과 예도를 펴게 하여
인륜의 도리로 문화를 열게 했으니
님의 공적이 하늘 높이 치솟고
큰 바다로 펼쳐지네(분향 헌다하고 절을 올립니다.)

*차나무 장송곡-석하 석선혜

간밤에 산비가 내려
오랜만에 묵은 때를 씻어내고
이른 아침 일어난 새소리는
숫컷은 암컷을 쫓아 줄달음을 치고
봄 싹은 이쁜 맵시를 내어 나들이 채비를 하고
산색시 걸음으로 문밖을 기웃거립니다.
오월은 초록으로 희망을 부르는데
붉은 빛깔로 굳은 차나무는 문을 닫아걸고
석양빛에 기대어 눈물 지우며
밤새, 소쩍새 소리만 가슴에 담아
서천으로 저물어간 동지들에게
서러운 편지를 띄워 전합니다.
지난 겨울 추위와 매섭게 싸우다
차나무 백만 군사가 붉은 무덤으로 누어
장송곡이 가녀리게 통곡으로 이어지고
지난 세월동안 보여 주었던 푸른 잎 기상을
황홍빛깔로 멍든 차나무 앞에 아뢰우고
짙푸른 그리움을 帝釋天에 펴서
넘어진 땅 딛고 일어서는 고된 나날에
차 한 잔에 아픈 마음 담아 올립니다.
2011. 5. 11.

*차나무에 드리는 제문

오! 초목 가운데 늘 푸른 남국의 상서로운 마음으로 만인의 덕목이 되어 군자로 불리운 님이시여!
빛깔 향기 맛으로,
온갖 병마를 다스린 대의왕의 첫 자리에 앉으신 님이시여!
지난 겨울에 찾아온 혹독한 추위는 차나무가 이 땅에 뿌리 내려온 이래 처음 닥친 재앙이었습니다.
찬 겨울 눈서리 바람이 뼛속까지 스미는 고통을 불굴의 의지로 견디어내며, 남국에 제일 강한 전사로 나서서 그 매섭게 추운 칼바람을 북쪽 멀리 물리칠 때, 많은 동지들이 심한 부상을 입고 반 토막으로 잘리는 신음소리가 드넓은 차밭을 덮고, 장렬하게 전사한 전우들의 붉은 무덤은 통곡소리로 산과 들녘에 누어, 帝釋天에게 부고를 전한지 반년이 되어갑니다.
우리는 그동안 님이 베풀어준 은덕에는 무심하고 차 싹 수확이 줄어드는 것에만 애를 태우면서도, 님이 처절한 아픔을 앓고 누운 것에 哀悼하는 태도가 인색하였습니다.
님이 인류사회에 베풀어 주신 은혜는 하늘에 닿고 四海에 넘칩니다.
신농씨는 님이 모든 식물 가운데 기이한 특성을 지닌 것을 알아차리고 本草의 맨 첫 자리에 기록하였으며, 주공단 선생과 공자님은 님이 지니신 품성이 성인에게 닿아 있는 것을 알아차리고 모든 제천 의식과 제사상을 쫒고 정신을 맑게 하는 三昧水로 마시어 생노병사에서 해탈하는 일등공신으로 여기었으며, 선도에서는 신선의 경지에 도달하게 하는 神物로 삼았으며, 중정의 도를 밟는 왕족들은 왕도정치를 널리 펴고 반가에서는 군자의 덕목을 완성시키고, 서민 대중들은 모진 병을 치료하고 귀한 손님을 대접하는 영약으로 모시었고, 茶商家에서는 기업을 일으키고 가사를 번영시켜 왔습니다.
님의 빛나는 성품과 공덕을 어찌 말과 글로 표현할 수 있으리!
오늘 님의 참혹한 상처 앞에 차를 달여 올리는 큰절로 오천년 동안 인류에게 베풀어 주신 지혜로운 가르침과 아름다운 덕목을 기리며 은혜에 보답하는 마음을 부족한 정성으로 표합니다.
2011. 5. 1.
차밭을 살피기 위해 차밭에 가셨다가 안타까운 마음에 선혜스님이 현장에서.

진혼제는 5월 14일 11시에 행해졌고, 이튿날까지 가까운 차인들이 모여 그 안타까운 마음을 같이 했다.

차나무가 이렇다 보니 차 생산량은 현저히 떨어지고 하물며 하동야생차축제에서 일본의 쓰나미, 또 요즘 가장 문제가 되고 있는 방사능을 핑계삼아 올해차는 오히려 사람들이 찾지 않아 작년차를 내다 팔고 있었다는 것이니….

차 흉년은 이러한 사례만으로도 충분히 체감할 수 있는 상처이고 아픔인 것이다.

이날 현장에서는 인간의 존엄과 차나무의 예우 그리고 모두를 위해 스스로를 던져 희생할 줄 아는 곳 의(義)로운 고장, 바로 남도의 미학이자 정체성이 경건한 가운데 묻어나는 차의 진혼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