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0대원문화의 달 기념, ‘불교와 사회 포럼’ 특별발표회가 지난 9월 8일 오후 2시부터 ‘한국불교를 빛낸 재가불자 2일을 조명한다’는 주제로 열렸다. 대원 장경호 거사를 추모하고 그 뜻을 기리는 일환으로 마련된 이날 발표회에서는 언론분야 덕산(德山) 이한상(李漢相) 거사와, 학술분야 불연(不然) 이기영(李箕永) 거사에 대한 생애와 사상을 다뤘다.
이한상 거사에 대해서는 ‘불교언론 발전과 한국 불교 세계화의 초석을 놓다’라는 제목으로 이진두(전 부산일보 논설위원, 현 불교신문 논설위원)이 발표했고, 이기영 박사에 대해서는 이 박사의 첫 제자(남자제자 중)인 이민용(참여불교재가연대 공동대표) 박사가 ‘시대를 앞서간 전환점위의 학자’라는 제목으로 발제했다.

이진두 위원은 “덕산거사는 인재양성과 불교언론 창달, 포교활동, 그리고 한국불교 해외선양에 큰 빛을 밝힌 분”이라고 정리했다. “먹고 살기 어려운 시절에 큰 기업을 운영해 많은 재산을 가진 분이었으며, 동시에 그 재산을 쓰기도 아주 잘 쓴 분”이라고 덕산 거사를 회고한 이 위원은 “덕산 거사가 모두 살기 어려웠던 시기에 그 많은 재산을 불교를 위해 사용한 이유가 무엇일까, 그 이유를 단순히 전생의 인연이 있어서라고 생각하는 것은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 위원은 박경훈 전 동국역경원 편찬부장의 언급을 인용 “덕산 거사는 이미 재가불자들의 참선수행단체인 달마회의 회원으로서 다년간 활동해왔으며, 그가 불교계에 알려지기 시작한 대한불교신문 인수도 당시 총무원의 교무부장이었던 숭산행원 스님의 간곡한 당부가 있었기 때문이고, 이것이 가능한 것은 행원스님이 달마회의 지도법사를 맡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냥 단순히 돈이 많아서 불교계에 사용한 것이 아니라 신실한 불자로서, 또 당시 한국불교가 나아갈 방향에 대해 잘 알고 있던 불자로서 그의 활동이 시작된 것이라는 것이다.
이진두 위원은 특히 덕산거사가 대한불교신문의 발행인과 사장을 맡아 불교언론 창달에 큰 역할을 한 것을 들었다. 특히 덕산거사가 신문사를 맡으면서 총무원의 대표로 편집회의에 참석하던 행원스님에게 인사권과 편집권의 보장을 요구한 것, 한 종파의 기관지가 아니라 범불교적인 한국불교 공론지를 지향한 것, 대폭적인 증면을 통해 한국 불교언론 발전의 초석을 이룬 것, 불편부당한 공정보도와 지면의 문호개방을 천명한 것 등은 대단한 것이었다고 강조했다. 건설업에 종사하는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생각하기 어려운 언론의 전문적인 문제를 꿰뚫고 있었다는 점에서 놀랍다는 것이다.
또한 덕산거사가 1971년 미국에 건너가 1973년 미국 캘리포니아 카멜 시에 삼보사를 창건한 것은 한국불교의 미주포교 효시를 이룬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그는 이어 “우리 불교계에는 앞서 가신 여러 훌륭한 어른들이 계시고, 승속에 걸쳐 한국불교를 빛낸 이 어른들의 삶을 되새기고 그분들의 뜻을 기리는 것이 오늘 우리가 몸과 마음으로 해야할 일”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이어 이민용 박사가 ‘시대를 앞선 전환점 위의 학자’ 불연 이기영 거사에 대해 조명한 글을 발표했다. 자신을 불연거사의 첫 제자라고 소개한 그는, “오늘날 불교계 뿐만아니라 한국의 인문학계를 통틀어서도 불연 이기영을 다소라도 인지하지 못하는 학자들은 없을 것”이라며 “그의 저술은 그 양과 질에 있어 모두 상당한 수준에 이르고, 그로 인해 그가 끼친 영향력도 대단했다”고 회고했다. 특히 불연 이기영 거사는 우리 민족사에서 원효를 우뚝 드러낸 독보적인 학문적 성과를 거둔 분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원효는 불연의 학문적 혜성이었고, 원효는 그의 별칭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개명한 서양 땅, 불란서에서 학위를 받으셨다니 저희 젊은 세대들의 바람은 컸고, 새로운 ‘서구의 무엇’을 갖다 주는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놀랍게도 우리에게 ‘본래 있던 것’을 되돌려줄 뿐이었습니다. ‘받아들이는 것’만이 새롭고, 창의적으로 보이던 그 시기에 때 묻은 우리 ‘본래의 것’을 주장하다니, 우리는 우리의 천박함을 부끄러워해야 했습니다.”(1996년 弔辭중의 한 편)
이민용 박사는 그러나 불연은 왠지 불교계에서 홀대를 받았고, 굴곡진 삶을 살아갔다고 술회했다. 심지어 미국인 랑카스터 교수조차도 “동국대에서 그의 위치는 평화스러운 삶을 보장해주지 못했다.<중략> 그의 학자로서의 경력은 20세기 한국의 역사만큼이나 험난한 것이었다”고 불연의 삶을 평가했을 정도라고 소개한 이 박사는 “한국불교연구원에 과감하게 구도회라는 신행조직을 창립해 연구와 신행의 결합을 시도한 대전환을 보여줬다”고 회고했다.
이민용 박사는 “불연은 세속적 의미로 성공했다거나 대성을 이룬 인물은 아니라고 본다”며 “그러나 그 이유는 그 자신의 높은 비전과 실력에 비해 우리의 현실이 불연에게 지나치게 가혹했다는 점”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크게는 우리민족과 인류 공동체의 평화로운 미래를 꿈꾸었으며 좁게는 한국 불교 공동체가 부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사부대중의 공동체이기를 지향했다”고 평가한 이 박사는 “불연 이기영은 새로운 종교운동에서 외형상 항시 패자가 되기 마련인 재속 신앙인의 한 표본이었다”고 결론지었다.
진흥원 김규칠 상임이사의 사회로 진행된 이날 발표회에는 덕산과 불연이라는 두 우뚝했던 재가불자를 기리는, 그리고 생전 그들과 반연을 맺었거나, 그의 뜻을 계승하는 불자들이 대거 참석한 가운데 시종 진지한 분위기에서 진행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