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8세기 조선의 지식인들은 청나라를 통해 신문물(北學)을 받아들여 조선의 부국강병을 도모하고자 했다. 이들은 관념적인 주자학에서 벗어나 보다 현실적인 실용적 학문세계를 추구했으며, 한편으로는 중국과는 다른 조선 특유의 맛과 멋의 세계를 갈구했다.
이들이 청을 통해 받아들인 수입품 가운데는 ‘차’가 포함되어 있었다. 조선에서는 태종대부터 제례의식 차 대신 술이 사용되었기 때문에 일반 민간에서 차가 거의 사라졌다. 다만, 선의 명맥이 이어져온 불교, 그 중에서도 남도의 몇몇 사찰에서 차문화가 조금 남아있는 형편이었다.
이들 경화사족들에게 남도에서 아주 우수한 차가 생산된다는 반가운 소문이 퍼졌다. 중국의 유명한 차에 비해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 오히려 품격면에서 우수한 한국 차가 대흥사의 승려 초의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소식이었다.
조선의 문화적 정체성을 찾는 경화사족들과 초의의 만남에는 18세기를 경유하는 문화적 자존심과 ‘차’가 있었다. 이 둘 사이를 연결시키는 고리는 추사 김정희였다.
초의는 한국의 사라진 차문화를 되살린 중흥조인 동시에, 한국 차의 세계를 삼매의 경지로 끌어올린 선사였다. 초의의 다법은 중국이나 일본의 것과는 달랐으며, 차의 이론을 정립하고 선차의 제다법을 복원하여 이를 토대로 초의차를 완성시켰다.
그렇다면 초의차는 어떤 차였길래 ‘조선의 자존심’ ‘조선의 다성(茶聖)’으로 추앙받을 수 있었던 것일까.
최근 초의의 사상과 차 제다법, 탕법, 차맥의 계승 등 초의 연구의 ‘집대성’이라 할 만한 연구물이 나왔다. 박동춘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장의 동국대 선학과 박사학위논문 「초의선사의 차문화관 연구」가 그것이다.
박동춘 소장은 동춘차를 제작하는 차인이자, 초의 스님의 제다법을 잇는 재가자로 널리 알려져있다. <동춘차>는 차 애호가들 사이에서는 우리나라 최고급 차로 평가돼 왔다.
박 소장의 연구는 차를 직접 제조하는 전문가가 선학과 조선시대의 문화사를 섭렵해 집대성했다는 점에서 매우 독보적이고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박동춘 선생은 30여년전 초의의 제다법을 계승한 응송 스님의 장적을 정리하면서 스님으로부터 초의 스님의 제다법을 전수받았다. 대흥사 주지를 역임한 응송 스님은 초의-범해-응송으로 이어지는 초의차의 계승자로, 평생 초의 다도에 대한 연구를 위해 문헌 수집에 심혈을 기울이고, 이를 토대로 한국 차의 원형을 보존하기 위해 노력한 인물이다.
응송 스님의 말년에 그의 장적 정리를 도운 박 소장은 응송 스님의 문하에서 초의차 제다법과 함께 초의 차에 관한 사사를 받았다. 박 소장은 응송 스님이 입적한 후에도 초의차에 대한 연구를 꾸준히 진행시켰다.
박 선생은 2006년부터 동국대 선학과에서 수학, 초의의 선과 조선시대 차문화를 연구해왔다. 이번에 나온 박사논문은 차 제조가이자 차문화 연구가인 박 소장의 두 면모가 조화를 이룬 괄목할 만한 논문이라 할 수 있다.
응송 스님의 장적들을 정리해온 박 소장은 이번 논문에서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귀중한 초의 관련 자료들을 공개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일지암서책목록』이다. 『일지암서책목록』은 1861년 시헌서의 이면지를 활용하여 초의의 유품을 기록한 것으로, 초의의 장서 91본(서책목록, 명한시초)과 사대부들의 묵적과 주련(첩책목록, 주련목록), 초의의 생활용구 36종(산업물종기), 초의 선사의 제위토와 초의 소유의 전답목록인 선사답기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같은 초의의 서책과 물품 목록들은 초의의 사상뿐만 아니라 초의가 어떤 책을 통해 차 연구를 진행시켰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에 초의 연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사료들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박영보의 「남다병서」와 신위의 「남다시병서」 또한 박 소장에 의해 새로 발굴된 자료로, 이들 자료는 초의가 경화사족들과의 교유가 확대된 시기에 쓴 차시와 경화사족들이 초의차를 애호하게 된 배경 등을 살펴볼 수 있는 정보들이 담겨져 있다.
이들 자료를 통해 밝혀진 중요한 사실 중 하나는 초의차가 북학파로 대변되는 18세기 지식인들의 자긍심이었다는 점이다. 당시 북학파 경화사족들은 급변하는 사회경제적 현실을 직시하면서 조선의 문화자존의식을 반성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그들은 초의를 통해 우리차를 알게 되었고, 차의 맑고 담박한 가치를 공유하는 동시에, 초의차를 통해 우리 차의 품격이 중국차보다 뛰어나다는 자긍심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 박 소장의 주장이다.
박 소장에 따르면 초의와 경화사족들은 서로에 대한 후원자였다. 초의의 미완성된 차는 경화사족들의 지적과 적극적인 후원에 의해 완성될 수 있었고, 이들은 초의차를 통해 차에 대한 애호와 한국차에 대한 문화자존의식을 드높일 수 있었다는 것이다.
박 소장은 “초의가 초의차를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은 이론과 실제에 겸비하였던 덕분이었고, 또한 김정희와 신위가 초의가 만든 차에 대한 보완점을 일일이 지적함으로써 지속적인 차품을 도모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김정희는 초의차가 극품에 경지에 이를 수 있도록 조언과 품평을 아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초의의 든든한 후원자이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박 소장은 또 “초의차의 사상적 토대가 불교의 불이(不二)사상”이라고 주장했다. 물과 차라는 양변의 분별이 없어진 상태, 차의 진실함인 건(健)과 차의 정기인 영(靈)이 조우한 상태, 이렇게 두 개의 대상이 하나를 이루는 생태가 바로 초의차가 이루어낸 경지라는 것이 박 소장의 주장이다.
박 소장은 나아가 “차의 진수는 물을 어떻게 순열의 경지로 끓이느냐에 따라 드러나게 되는데 순열이 되는 찰나를 알아차리는 것은 삼매의 경지라야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박 소장은 또 “초의차의 사상적 토대가 불이사상이라면, 차의 체를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방법으로 중정(中正)을 이야기했다”고 설명했다.
차의 중정은 차의 양과 탕수의 순숙, 탕수의 양의 적합성, 다구의 관리와 다호의 온도, 침출된 차를 따르는 시간의 정확성, 마시는 시간에 대한 조절력 등을 포괄적인 의미로 표현한 개념이다.
박 소장은 “차의 신(神)은 본체론으로 보면 용(用)으로 색, 향, 미와 같이 표면에 드러난 차의 세계를 의미하고 건(健)은 체(體)로, 차의 내밀한 기가 몸에 드러난 차의 본질을 말하는 것이다. 초의가 다호가 청결해야 물의 맑은 기운이 제대로 드러나 차의 체를 잘 드러낼 수 있다고 한 것은 중정이어야 차의 진수가 드러난다는 것을 말한 것”이라며 “초의의 다도에서 중정론은 포법(泡法)에 집중돼 있는데, 이는 초의 다도의 핵심”이라고 주장했다.
박 소장은 초의에 관한 방대한 자료들을 수집, 분석해 이번 논문에서 몇가지 중요한 사실을 밝혔는데, 그 중 하나는 초의차 즉 한국 고유의 차가 70도에서 내리는 저온의 차가 아닌 95도의 팔팔 끓는 물에서 끓이는 뜨거운 차라는 점이다.
『일지암서책목록』 가운데 <산업물종기>에는 초의가 일상생활에서 사용했던 물품들이 상세하게 기록돼 있는데, 그 중에서도 주목되는 부분은 초의가 사용했던 다구의 종류와 재질, 찻잔의 유형이다. 여기에는 초의의 다구가 동철 다완 1좌, 납소 다관 1좌, 흑색 다관 1좌가 있고, 다완은 백자와 중국의 차종(茶鐘)을 사용한 것으로 나와 있다.
이는 초의의 탕법이 탕관에 차를 직접 넣어 우리는 방법이었음을 밝힐 수 있는 단서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즉 초의는 펄펄 끓는 뜨거운 물이 담긴 주전자에 직접 차를 넣어서 끓이고, 이를 백자 혹은 중국 찻잔에 따라 마셨다는 의미가 된다.
초의가 뜨거운 차를 마셨다는 내용은 초의차를 계승한 근현대의 승려 응송 박영희의 저술에서도 다시 확인되는데, 응송은 <동다정통고>에서 “사중에(대흥사에) 손님이 오면 (중략) 부엌 숯불 위에 주전자를 매달아 놓고 물이 끓기 시작하면 얼른 차를 한줌 넣어 푸르르 소리가 나면 얼른 도르래를 올려 뜨거운 차를 손님에게 가지고 갔다”고 서술한 바 있다.
그렇다면 왜 지금까지 “차는 70도에서 내려야 한다”는 것이 정설처럼 전해져온 것일까. 이에 대해 박 소장은 “1980년대 일본의 차법이 국내에서 응용되면서 변질된 것이다. 숙우를 이용해 탕수 온도를 60~70도로 낮추어 우리는 것은 잎이 여린 일본차에 맞는 차법이다. 우리 차는 섭씨 95도의 탕수에서 우리는 것으로, 초탕에서 차의 조화로운 맛을 완벽하게 드러낸다.”고 설명했다.
박 소장은 또 우리가 통설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초의차의 정신=다선일미(茶禪一味)’가 초의차를 드러내는 올바른 용어가 아니라고 지적했다.
박 소장은 “초의의 다도관은 일반적으로 다선일미, 다선일여 등으로 말해졌으나 이 용어는 전거가 제시되지 않은 채 사용된 것”이라며 “초의차의 경지는 김정희가 표현한 다삼매(茶三昧), 명선(茗禪), 전다삼매(煎茶三昧) 등으로 정의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주장했다.
박 소장은 “차는 선의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라 일심의 극치인 선으로 들어가는 과정에서 몸과 마음을 정화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선종에서는 차가 정신을 맑게 하고 몸을 따뜻하게 하여 기운을 활성화시키는 차의 효능을 선 수행에 활용한 것”이라며 “그런 의미에서 초의의 다도관은 다선일미가 아닌 다삼매, 전다삼매로 명명하는 것이 보다 타당하며, 전다삼매는 추사뿐만 아니라 당시 사대부들의 다도관을 의미하는 용어”라고 설명했다.
박 소장은 박사논문을 통해 초의의 다도 사상은 불이선(不二禪), 제다법과 탕법의 핵심은 중정(中正)이라고 결론 내렸다. 또한 박 소장은 “초의가 차문화를 새롭게 중흥할 수 있었던 것은 선사로서의 초의 개인의 역량뿐만 아니라 북학파 경화사족들의 애호가 뒷받침됐기 때문”이라며 “초의는 초의차의 정립을 통해 한국 차의 한국적 정체성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찾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