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전수수(入廛垂手). 선가에서 수행을 다 마친 이가 세상 속으로 들어가 불법을 펼치는 것을 말한다. 수행의 궁극이요, 목적은 이처럼 깨달음이 아니라 깨달음의 사회적 현현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 둘 사이에 선후가 있는 것은 아니어서 ‘선수행 후제민’의 길을 걷는 이도 없지 않지만, 대승보살의 삶은 수행과 제민의 선후와 경중에 구분을 두지 않는다. 어쩌면 후자에 더 무게를 두고 있다고 해야 맞을 듯싶다.
천태종 총무부장 무원(無元) 스님. 그는 불교계에서 가장 바쁜 스님 중의 한 분이다. 종단 살림을 맡아하랴, 북한불교와의 교류에 신경쓰랴, 새터민에 이어 다문화가정 포교에 나서랴, 온갖 일들이 무원 스님의 양어깨를 짓누른다. 그러나 그의 표정은 언제나 미소를 머금고 있다. 포대화상을 닮은 것 같기도 하고, 달마대사를 닮은 것 같기도 하다.
인천 황룡사의 대작불사를 마무리하고, 종단의 명령에 따라 봉천동 명락사(明樂寺) 주지로 부임해온 무원 스님은 부처님오신날을 앞둔 이즈음 또다시 분주해졌다. 부처님오신날 행사를 준비하느라 바쁜 것도 있지만, 현재의 명락사를 관문사와 함께 천태종의 한강이남 최대 사찰로 발돋움시키기 위한 구상에 여념이 없는 것이다.
무원 스님의 구상은 명락사를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다문화 사찰’를 만드는 것이다. 마침 명락사가 위치한 동네는 전국에서 다문화 가정이 세 번째로 많이 살고 있는 지역이기도 해 스님의 구상은 벌써부터 주위의 시선을 붙잡는다. 가는 곳마다 큰 불사를 거뜬하게 이뤄내곤 하는 그에게 거는 기대의 눈길이다.
인도와 네팔, 방글라데시, 스리랑카, 필리핀,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타이, 캄보디아, 베트남, 라오스, 조선족과 북녘 동포들이 한데 어우러지는 ‘서울의 세계인 공동체’로 명락사를 가꿔나가겠다는 무원 스님. 스님은 전 부임지였던 인천 황룡사에서도 새터민(북한동포)들과 외국인노동자들의 정착을 위해 절로 1박2일씩 초청해왔다.
특히 다문화가족이 많이 거주하는 봉천동에 소재한 절에서 가난한 외국인노동자들이나 새터민들에게 익숙한 종교공간에서 쉬면서 부담 없이 밥 먹고 고국 친구들과 어울릴 곳을 제공하는 것은 얼마나 의미 있는 일인가. 이를 너무도 잘 아는 무원 스님은 그들이 아무런 부담 없이 배불리 먹고 쉬고 어울릴 수 있게 하는 것 공간으로 명락사를 만들겠다고 결심했다.
스님은 벌써 외국인노동자들을 위한 한글학교를 열었고, 새터민들과 조선족으로 이뤄진 새터민예술단의 모임과 공연연습장을 제공해주고 있다.
무원 스님은 이번 부처님오신날 행사를 지역주민이 함께 하는 다문화 사찰의 입지 구축을 위한 계기로 삼겠다는 계획아래 초파일 전일 예술제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다. 또한 부처님오신날에는 가족사랑 흙·도예 체험, 부처님 그리기 대회, 개성 영통사 사진 전시회, 소원 풍선 띄우기, 염주 만들기, 컵등 만들기, 꽃꽂이 전시회 등 문화 프로그램들이 다채롭게 펼쳐진다.
무원 스님의 명락사 구상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명락사를 다문화 사찰로 추진하는 사업. 둘째, 부처님오신날 기념 다문화가족 초청 어울림 한마당 행사를 통해 다문화 사찰로의 발돋움을 내외에 알리는 사업. 셋째, 20층 쌍둥이 건물 건립불사를 통해 다문화 사찰로서의 명락사 비전을 선포하는 일이 그것이다.
특히 명락사 비전 선포식에서는 △비전1(한 분의 부처님)-대한민국 첫 번째 다문화 사찰이 된다 △비전2(삼보)-대한민국 삼업(신구의)과 삼독(탐진치)을 삼보를 통해 화합시키는 사찰이 된다 △비전3(사성제)-대한민국 사고팔고의 고통을 덜어주는 사찰이 된다 △비전4(오분향)-대한민국 5개 계층(남녀노소, 다문화가정)의 화합을 5분향(계향·정향·혜향·해탈향·해탈지견향)의 게송을 통해 이루는 사찰이 된다 △비전5(육바라밀)-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6바라밀(보시·지계·인욕·정진·선정·반야)의 덕목을 통해 참다운 진리를 깨닫게 하는 사찰이 된다는 5대 비전이 공식 발표될 예정이다.
“다문화 가정에 대해 정부도 아직은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것 같고, 다른 종교에서도 아직은 본격적으로 이 분들에 대한 지원이 미흡한 실정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불교라도 이 일에 나서야지요. 더구나 이분들 대부분이 동남아 불교국가에서 오신 분들이 아닙니까. 같은 일불제자의 입장에서도 이들을 불교계가 외면해선 안 됩니다. 따라서 이 일은 명락사 만의 일도, 천태종만의 일도 아닌 한국불교계 전체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원 스님은 부처님오신날을 기념해 열릴 ‘다문화가족 초청 어울림 한마당 잔치’를 글로벌 시대에 맞게 다문화 가정이 즐겁게 어울려 서로의 문화를 이해할 수 있게 유도하고 새로운 형태의 다문화 가족 관리 프로그램으로 정착시키는 출발점으로 치를 예정이다. 이 행사를 계기로 매월 25일(예정)을 ‘다문화 가족의 날’로 지정해 관련 행사와 모임을 지속적으로 펼쳐나간다는 방침이다.
무원 스님은 명락사 주지로 부임해오자마자 매월 둘째주 일요일에 갖는 정기 법회시간을 오후 2시에서 오전 11시로 옮겼다. 오후 2시는 어정쩡한 시간대여서, 불자들이 절에 와서 법회를 보고 점심공양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절에 와서 절밥 한 끼는 먹고 가야 사람들 마음이 푸근해진다는 소신으로 과감하게 법회시간을 변경하니, 참석하는 불자가 늘어나는 효과가 이내 나타났다. 또한 명랑사 옆 시장통 길에 관세음보살 탱화를 모시고 그 앞에서 누구나 촛불공양을 올릴 수 있도록 조처했다. 시장 사람들이 오가면 촛불을 밝히고, 또 관세음보살 앞에서 기도를 하는 모습을 목격하면서 뿌듯함을 느낀다고 스님은 전한다. 시장 사람들의 속성을 잘 파악해서 그들에게 맞는 포교를 하나하나 접목해가고 있는 본보기다.
명락사는 올해로 개찰 34주년을 맞는다. 처음에는 서울대 앞 부근에서 셋방살이로 시작해 포교를 해오다가 지금의 ‘먹자거리’, 즉 먹고 자는 곳이 많은 동네에 자리를 잡았다. 이후 차근차근 주변 건물을 사들여 3,000평이 넘는 대찰로 발돋움했다. 이곳의 땅값이 평균 평당 6,000만원 안팎이니 명락사는 재산가치만 해도 수백억을 홋가하는 부잣절에 속한다. 신도도 매 법회마다 500명 이상이 동참하고 가구 수는 3000세대가 넘는 그야말로 알토란같은 도량이다.
이제 이런 성과를 바탕으로 세계의 모든 불자들이 부담없이 찾을 수 있는 다문화 가족 사찰로 새로운 출발을 하는 명락사와 주지 무원 스님. 시간이 날 때마다 사찰과 사찰 주변 동네를 돌아보는 그의 모습에서 국경을 초월해 중생들의 든든한 의지처가 된 참수행자상을 읽을 수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