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가에서는 골품骨品을 인정하지 않았다. 승가 안에서는 모두가 무품無品으로 평등했다. 굳이 구분이 있다면 출가이후 수행한 햇수에 따른 법랍法臘이 있을 뿐이었다. 따라서 수행자에게 출신지나 골품의 관등은 아무 의미가 없었고, 또한 수행자끼리는 출가 전의 일을 묻지 않는 게 불문율이었다.
지장 역시 자신의 신분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진여원에서 자신에게 비구계를 준 스승에게도 출신과 신분을 숨겼다. 보천암의 보천이나 남대 지장방이나 진여원의 다른 수행자들이 물어왔을 때도 웃고만 말았다. 왕경의 대궁에서부터 따라온 종자도 지장의 신분을 발설하지 않았다. 지장이 몇 번이나 그에게 신신당부해두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지장은 종자를 불러 말했다.
“나는 이제 이곳 띳집 생활이 편안하구나. 그러니 너는 오대산에서 그만 고생을 하고 서라벌로 돌아가는 것이 어떻겠느냐?”
“스님, 이렇게 사는 것이 좋습니다.”
“너는 이제 더 이상 나의 종자가 아니다.”
종자가 지장의 느닷없는 선언에 놀라 어리둥절해했다.
“지장스님, 무슨 말씀이신지요. 저는 스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알아들을 수 없습니다.”
“너와나 사이에 신분의 차별은 이미 사라져버렸다. 그러니 네가 왕경으로 돌아가든 다른 땅으로 가 살든 그것은 네 자유다.”
“스님, 저는 왕궁에서 명을 받은 종자입니다. 스님을 지키며 살라고 제 목숨이 있는 것 아니옵니까?”
종자는 자신의 신분을 지키겠다고 완강하게 버텼다. 지장이 자신을 서라벌로 보내려고 그러는 줄 알고 섭섭하기조차 하였다. 천민 종자라는 신분 때문에 고약한 귀족들의 발길에 차이거나 숨한번 크게 쉬지 못하고 살았던 곳이 서라벌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오대산은 별천지였다. 극락이 서방정토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배고프면 멀리 산가로 나가 탁발해오고, 목마르면 계곡으로 나가 물마시고 졸리면 양지에 웅크리고 앉아서 잠을 잘 수 있는 곳이 바로 오대산이었다.
“그렇다고 무작정 오대산에 머물 수는 없지 않겠느냐. 하루를 더 주겠으니 잘 생각해보거라.”
“스님, 그러하겠습니다.”
그러나 다음날에도 종자는 결정하지 못하고 전전긍긍했다. 지장이 오대산을 떠나라고 명령하면 그는 왕경의 대궁으로 돌아가 다시 누군가의 종 노릇을 하거나 고생을 심하게 하는 시위부군졸로 돌아가야 했다.
“결정하였느냐?”
“대궁으로 돌아가는 차라리 저 아래 골짜기 산가로 내려가 머슴살이를 하겠습니다.”
“그건 네가 알아서 하라. 다만 초근목피로 연명하는 산가에서 입이 하나 더 불어나는데 너를 받아줄지 그게 걱정이구나.”
“그렇다면, 스님.”
종자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저 같은 종자도 스님이 될 수 있는 것입니까?”
“결코 쉬운 노릇이 아니다.”
“스님께서 허락만 해주신다면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스님이 돼서 무엇을 하려는 것이냐?”
“스님의 가르침을 받아 길을 찾겠습니다.”
“수행자가 가는 길을 가시밭길이다. 그래도 스님이 디겠다는 말이냐?
“허락만 해주십시오. 저는 왕궁 시위부의 혹독한 무술 훈련도 받아 이겨냈습니다.”
“좋다. 갈 길은 네가 선택하는 것이지 내가 허락할 일이 아니다.”
종자는 열흘간 단 한순간도 눕지 않는 좌선 정진도 지장을 따라 해볼 각오가 되어 있었다. 자신이 무술을 배우 f때는 좌선 정진보다 더한 지옥 훈련도 겪었던 것이다. 시위부에선 몸집이 좋은 종자들을 선발하여 왕족을 경호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기 위해 대감들이 고난도의 무술과 체력 훈련을 시키곤 했는데, 종자는 그 과정을 다 거쳤던 것이다. 훈련은 실제 상황을 가정하여 시키기 때문에 칼에 맞아 죽거나 담을 뛰어넘다가 다리가 부러지는 사고 등은 부지기수였다. 물론 훈련 중 죽게 되는 종자들의 시신은 쥐도 새도 모르게 왕궁 밖 산중으로 멀리 버려졌다. 훈련이 힘들어 목숨을 걸고 도망치는 종자도 있었다. 종자들끼리 미리 짜고 칼에 맞아 사망한 것처럼 거적때기에 둘둘 말려 있다가 궁 밖으로 내보내져 탈출했던 것이다.
“오늘부터 네 이름은 시종始終이다. 무술은 시작과 끝의 경계가 있으나 수행자의 길은 처음도 없고 끝도 없다. 그래서 너의 이름을 시종이라 하였다. 그럴 수 있겠느냐?”
“네, 스님.”
“시종은 이제부터 나의 종자가 아니다. 나 지장이나 시종이나 다 같은 사람이니라.”
종자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 부르는 소리는 듣고는 굵은 눈물을 흘렸다.
“스님이 되기 이전에는 행자라고 부르니라. 시종은 오늘부터 우리가 사는 띳집의 행자이다. 알겠느냐?”
“네, 스님.”
“어찌 생각해보면 잘된 일이지, 나는 너에게 불법을 가르쳐주고 너는 나에게 무술을 가르쳐주게 됐으니 잘된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모르는 것이 있으면 세 살배기 어린아이라도 스승이 되는 법이다. 이제는 서로가 스승이 되고 도반이 되자꾸나.”
지장은 행자 시종을 데리고 좌선대로 올라갔다. 시종의 머리를 깎아주기 위해서였다. 좌선대 밑으로 작은 개울물이 소리치며 흐르고 있었다. 지장은 진여원에서 빌려온 예리한 칼로 시종의 머리카락을 밀기 시작했다. 시종의 드러난 머리는 박처럼 파르라니 반질반질했다. 지장의 정수리는 뿔이 난 것처럼 솟아 있어 어찌 보면 괴이하게 보였으나 시종의 머리는 보기 좋게 둥글둥글했다.
두 사람은 좌선대에 풀과 나뭇가지로 움막을 지었다. 이슬과 골바람을 바로 맞지 않고 좌선에만 전념하기 위해서였다. 지장은 계속해서 열흘 낮 열흘 밥 동안 눕지 않고 좌선만 하는 수행에 들어갔고, 시종은 하루 종일 좌선을 하되 잠은 띳집으로 내려가 자기로 했다. 처음부터 지장처럼 따라 하다가는 병이 나 몸을 망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선청은 좌선대 움막을 지켰다. 맹수가 멀리서 다가오거나 낯선 수행자가 보이면 컹컹 짖어 물리쳤다. 밥은 바구니에 담아 움막 뒤편의 소나무 가지에 걸어놓고 허기를 면하기 위해 하루 한 끼만 먹었다. 한 끼의 양은 세 숟가락이었다. 한 숟가락을 입에 넣었다가 씹는 동안에는 『반야심경』을 외웠고, 씹어 삼킨 후에는 『지장경』을 마음속으로 염불했다. 그와 같이 세 번을 반복하면 한 끼의 공양이 끝났다.
시종에게 하루 한 끼의 수행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이틀이 지나자, 허리가 끊어질 것처럼 배가 고팠다. 시종은 개울가로 내려가 물로 배를 채웠다. 보름이 지난 뒤에는 개울가로 나갈 힘도 나지 않았다.
시종은 움막에서 기어 나와 점심때가 아닌데도 소나무에 걸린 바구니에 자신도 모르게 손을 넣었다. 그런데 누군가가 시종을 제지했다. 시종의 뒷다리를 잡아 끌어당겼다. 돌아보니 선청이 자신의 뒷다리를 물고 있었다.
시종은 바구니에서 손을 빼고 선청을 안았다. 선청이 아니었다면 하루 한 끼만 공양하기로 했던 지장스님과의 약속을 어길 뻔했던 것이다. 시종은 선청을 안고서 주를 눈물을 흘렸다. 그러고 나자 갑자기 눈이 맑아졌다. 오대산의 숲은 해맑고 하늘은 푸르렀다. 개울가를 흐르는 물소리가 악기 소리처럼 감미로웠다. 어제 보던 세상이 아니라 다시 열린 세상이었다. 시종은 자신의 몸이 새의 깃털처럼 가벼워졌다고 느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정신을 잃게 만들었던 허기가 사라져버렸다. 시종은 움막으로 들어와 소리쳤다. <계속>
글 정찬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