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붓다

낭낭과의 첫 만남

2009-01-23 (금) 09:44	\|

신라시대 출가 수행자들이 불국토라 여겼던 오대산 전경 <사진=국립공원관리공단>

신라인들은 서라벌의 남산과 오대산을 불교 신앙의 성지로 여겼다. 남산이 백성들의 성산이라면 오대산은 출가 수행자들의 불국이었다. 출가하면 당연히 문수보살과 지장보살이 상주하는 오대산으로 먼저 들어가 수행하는 것이 당시 신라의 분위기였는데, 그것은 일찍이 자장율사가 부처의 진진사리를 신령한 오대산 산자락에 안치하면서 비롯되었다.

갓 출가한 지장도 오대산 깊은 골짜기에 조그만 띳집을 짓고 종자 한 명과 왕실에서 데리고 온 흰 개 선청善聽과 더불어 살았다. 종자는 길잡이 겸 짐꾼으로 왕경의 대궁에서 따라왔으나 서라벌로 돌아가기를 망설였고, 흰 덜이 텁수룩한 선청은 지장이 강아지 때부터 키워와 헤어질 수 없었던 것이다.

지장이 오대산으로 멀리 온 또 다른 이유는 사랑하는 낭낭을 잊기 위한 방편이기도 했다. 지장은 깊은 산에 들어와서도 낭낭이 불현 듯 생각나면 좌선하다가도 일어나 가파른 산자락을 미친 듯이 돌아다녔다. 마음속에 찌꺼기처럼 남아 자신을 괴롭히는 낭낭의 잔영을 지우기 위해서였다. 어떤 날은 오대산 남대나 북대 자락을 한 바퀴 돌다가 산비탈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지기도 했다.

몸은 오대산에 있다지만 마음은 서라벌에 가 있으니 수행자로서 괴로운 노릇이었다. 중생을 구원하는 지장보살이 되겠다고 출가했으나 사랑하는 한 여자를 못 잊어 괴로워하는 자신을 발견할 때면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그날도 지장은 달 밝은 밤에 좌선대를 찾았다 좌선대란 오대산 북대 아래의 천길 절벽 위에 있는 널따란 바위를 말했다. 훗날 고려시대 나옹선사가 오대산에 숨어 살면서 좌선대에 앉아 다음과 같이 노래했던 바위였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 하네

탐욕도 벗어놓고 성냄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

지장은 삼경에 이르도록 삼매에 들지 못하고 바위에 앉아 자신의 무릎을 짓누르고 있었다. 거친 바위가 생살을 찢어 피딱지가 생겼다.

-출가란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허나 나 김지장은 아직도 버리지 못한 것이 하나 있으니 이 일을 어이할거나. 낭낭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으니 수행자로서 부끄럽기만 하구나. 사랑하는 것도 업이 되는지를 이제야 알겠구나.

지장의 무릎은 퍼렇게 피멍이 맺혔다. 지장은 낭낭에 대한 연정을 끊지 ㅇ낳고는 결코 좌선대에서 일어나지 않겠다고 입술을 깨물었다. 죽기를 각오하고 낭낭을 아주 잊으려고 무섭게 작심했다.

-그렇다. 수행이 청 장애는 낭낭이다. 아무리 고행정진하여 깨달음을 얻는다 해도 애욕이 마음속에 남아 있는 한 결코 나는 세상의 중생을 구원하는 보살이 될 수 없으리라.

심경이 넘어가자 풀벌레 울음소리도 찬 이슬의 기운에 눌려 뚝 끊어졌다. 산짐승을 볼 때마다 컹컹 짖던 선청도 머리를 두다리 사이에 묻고 졸았다. 낭낭의 얼굴처럼 둥근 달은 여전히 지장의 머리 위에서 푸른 빛을 뿌리고 있었다. 이슬이 어깨에 내려 어깨가 차갑게 굳고 있었지만 그래도 지장은 좌선을 풀지 않았다.

지장이 낭낭을 못 잊어하는 것은 철없이 장래를 약속한 죄책감도 크게 연유했다. 지장은 낭낭을 밤마다 남천 개울가에서 몰래 만나면서 마음이 불덩이처럼 달아올라 성급하게 장래를 약속해버렸던 것이다.

두 사람은 혼사가 이루어질 수 없는 신분이었다. 부부가 되려면 서라벌을 멀리 떠나 변방 산 속으로 도망친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고는 불가능했다. 일찍이 원효성사도 요석공주를 데리고 서라벌에서 천리도 더 떨어진 소요산으로 도망쳐 설총을 낳고 기르지 않았던가.

낭낭은 왕경의 변두리에 사는 평민이었고, 지장은 대궁에 사는 왕의 혈족이었다. 지장은 성골인 데 반해 낭낭의 아버지는 2두품의 신분이었다. 2두품은 벼슬이 아니라 왕경 안의 3궁을 둘러싼 6부 아래 형성된 조그만 마을에서 연명하는 평민에 불과했다. 6부의 수장인 6두품만 해도 왕경으로 진출하여 더 높은 골품을 받을 수 있는 신분이었지만 2두품 이하는 농사나 수렵을 하다가도 불시에 전쟁이나 노력에 동원되는 평민이었다.

지장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골품제를 원망했다. 사람이 사람 위에 군림하기 위해 지배계층이 만든 제도였다. 서라벌에 사로국을 건국했던 세력들이 6촌의 씨족을 다스리기 위해 만들었다가 나중에는 진한 소국을 복속하면서 왕경인과 지방인을 구분하여 통치하고자 세분화시켰고 마침내 법흥왕 7년에 완성된 골품제도인 것이었다.

지장이 남천에서 낭낭을 만난 것은 왕경의 대궁과 낭낭의 가족이 사는 사량부가 가깝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남천은 인적이 드물고 갈대밭이 넓게 퍼져 있어 서라벌의 남녀가 몰래 만나는 장소로는 그만이었다.

낭낭에게 강아지 선청을 선물 받은 장소도 남천의 갈대밭이었다. 지장은 종자더러 사량부로 찾아가 자신의 뜻을 그녀에게 전하라고 했던 것인데, 밤이 되자 그녀는 남천에 먼저 나와 부끄럽게 무언가를 안고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던 것이다.

지장이 낭낭을 우연히 처음 본 곳은 황룡사 입구에서였다. 초파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사람들은 연등을 미리 달기 위해 황룡사로 밀물처럼 모여들었다. 황룡사 입구에는 임시로 큰 시장이 섰다. 시장은 규모가 대단해서 대궁의 왕족이 파견 나와 장사치들을 관리했다. 황룡사 앞 광장은 아무나 터를 잡고 장사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적잖게 세를 바친 사람만이 물건을 팔 수 있었다. 임시 시장이었지만 곡물에서부터 여인들의 장식품까지 서라벌의 모든 물건이 다 나와 가게나 좌판 위에 놓였다.

물론 세를 내지 않고 시장 한 귀퉁이에서 조그만 좌판을 놓고 장사한ㄴ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시장을 관리하는 왕족이 나타나면 재빨리 보따리를 들고 도망쳐야만 했다. 시장은 동시와 서시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동시는 왕족인 소우, 서시는 소보가 다스렸다. 두 형제는 지장의 외삼촌이기도 했다.

낭낭은 신도들이 북적거리는 동시의 길 가운데서 마른풀로 엮어 만든 신발을 가지고 나와 팔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시장의 모든 여자들 중에서 가장 눈이 부실 정도로 빼어났으므로 신발은 금세 동이 났다. 낭낭의 아버지가 사량부 남산 기슭의 집에서 황룡사까지 신발 보따리를 메고 뛰어다녀야 할 정도였다.

서라벌의 사내들이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낭낭의 얼굴을 한 번이라도 보고자 모여들어 길이 막혀버리곤 했다. 황룡사 젊은 승려들이 나와 길을 정리했고 급기야는 소우와 소보가 달려나와 낭낭을 쫓아 버렸다. 주정꾼인 낭낭의 아버지는 숨을 헐떡이며 남은 신발을 마저 팔라고 낭낭을 부추겼다.

“낭낭아, 어서 팔고 가자.”

“아버지, 마처 팔려고 했다가는 소우 나으리에게 신발을 뺏깁니다. 자, 오늘 번 돈 여기 있으니 어서 집으로 돌아가요.”

낭낭은 신발을 팔아 모은 돈을 아버지에게 남김없이 건네주었다. 그제야 낭낭의 아버지는 히죽거리며 물러서더니 주가의 술청 어멈에게 달려가 버렸다.

낭낭은 미간을 찌푸리며 두 눈을 감았다. 아버지에게 동전을 다주어버린 것을 후회했다. 올 초파일에는 꼭 연등을 사서 달고 싶었던 것이다. 낭낭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남은 신발은 싸구려 짚신뿐이었다. 남은 세 켤레는 다 팔아보았자 연등 하나 값이 될까 말까 했다. 황룡사의 연등은 왕경 사람들이 너도나도 달려고 주문하기 때문에 다른 절보다 연등 값이 비쌌다. 더구나 부처님에 계시는 법당에 다는 연등 값은 밖에 거는 것보다 몇 배나 더했다. 낭낭은 법당 안에 연등은 달지 못하더라도 절의 뜰 한쪽 구석에라도 꼭 달고 싶었다.

낭낭에게는 그럴만한 까닭이 두가지나 있었다. 하나의 병으로 몇 해째 누워 있는 어머니가 쾌차해 일어나도록 빌고, 또 하나는 아버지가 술을 덜 마시게 해달라고 부처님께 빌고 싶었다.

낭낭은 할 수 없이 남은 신발을 꺼내 두 손에 들었다. 바로 그때였다. 소우가 나타나 낭낭의 신발을 빼앗았다.

“네 이년, 여기가 어딘 줄 알고 함부로 장사하려 드느냐?”

“나으리, 죄송합니다.”

“남은 짚신이 이것뿐이냐?”

“나으리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아침부터 나의 허락 없이 장사를 했다는 말이구나. 초파일이 다가오고 이곳이 신성한 절 앞이니 특별히 봐주겠다.”

“나으리, 감사합니다.”

“대신 신발을 판 동전이 네 호주머니에 들어가 있을 터이니 네가 알아서 조금 내놓고 가거라.”

“저에게는 동전이 한 푼도 없습니다.”

“누구를 놀리는 것이냐! 어찌 한 푼도 없다고 거짓말을 하려 드느냐.”

“사실인즉 제 아버지께 다 주어버렸사옵니다.”

“안 되겠구나. 따라오너라.”

그때 지장은 말에서 내려 종자와 함께 수군거리는 구경꾼들을 뚫고 들어갔다. 그곳에서는 난생처음 보는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외삼촌인 소우가 채찍을 들고서 낭낭을 거칠게 끌고 있었다. 이런 일이 왕경 거리에서, 그것도 신성한 황룡사 일주문 앞에서 어찌 대낮에 벌어질 수 있다는 것인지 지장은 믿어지지 않았다. 지장은 외삼촌 앞으로 가서 말했다.

“외삼촌, 이 여인을 제게 맡기십시오.”

“마마, 이 여자는 이곳의 법을 깔보고 있습니다. 그러니 혼을 내서라도 가르쳐줘야 합니다.”

“내가 당부하겠으니 여인을 그만 놓아주시오.”

소우는 지장의 말을 더 이상 거역하지 못했다. 왕족 간에도 신분상의 차별과 품계는 엄격했던 것이다. 지장이 비록 정비의 소생은 아니더라도 왕족들의 왕권 투쟁 속에서 어느 순간에 왕위를 이을지 모르므로 그의 말은 명이나 다름없었다.

침을 퉤 뱉으며 소우가 물러서자. 지장은 땅에 끌려가느라 흙먼지를 뒤집어 쓴 낭낭에게 물었다.

“이제 아무 일 없을 것이니 걱정 마시오.”

“나으리, 고맙습니다.”

“이곳에서 무엇을 팔고 있소?”

“사량부 남산마을에 사는 낭낭이라 하온데 신발을 팔아왔사옵니다.”

“사량부라 하면 혜통국사께서 태어나신 곳이 아니오?”

“혜통국사님께서는 어린 시절 저희 아버지와 한 마을에서 자랐다고 하옵니다.”

지장은 혜통국사가 태어난 마을에서 왔다는 낭낭을 다시 쳐다보았다. 왕궁의 여인들에게서 보지 못했던 상큼한 기운이 낭낭의 얼굴에 가득했다. 누런 흙먼지가 묻어 있었지만 낭낭의 얼굴은 과일처럼 싱싱했다. 게다가 눈은 어찌나 맑고 깊은지 측은한 마음이 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