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길은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라도 걸어 올라가야 했다. 가마는 물론이고 말도 오를 수 없는 가파른 산길이었다. 청년은 바위에 걸터앉아 산길을 오르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그중에는 허리가 잔뜩 굽은 늙은 노파도 있었고, 왕도에 사는 재상의 부인들도 있었고, 한 걸음을 떼기도 힘들어하는 병자나 걸인들도 있었다.
삼국전쟁이 신라의 승리로 끝나고 왕족의 반란이 잦아들었다고는 하지만 백성들까지 모두 편안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아직도 서라벌에는 전쟁에서 이제야 돌아온 불구자나 걸인으로 전락한 고구려나 백제의 유민들로 넘쳐났다. 그들은 구걸하다가 왕족들을 호위하는 사병들의 발길에 걷어차이거나 앞서 걷다가도 산길 가로 밀려났다.
종자가 청년에게 걸음을 재촉했다.
“마마, 서두르셔야 합니다. 법회 전에 혜통국사님을 뵙기로 하지 않았사옵니까?”
“알고 있다.”
종자는 무술에 능하여 청년의 신변을 지키는 무사의 역할도 하고 있었다. 어느 때 위험이 닥칠지 모르므로 왕의 근족들은 생존을 위하여 자나 깨나 호위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효소왕이 5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했을 때는 왕궁마저 안전하지 못하여 왕자들이 서라벌에서 멀리 떨어진 오대산의 절에 피신해 있을 정도였고, 결국 피신해 있던 왕자 중에 형은 승려로 남고, 동생은 의문이 죽음을 당한 효소왕에 이어 왕이 되는데 그가 바로 성덕대왕이었다.
『삼국유사』에도 오대산에 피신해 있던 왕자를 보천과 효명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어린 효소왕의 책략이라기보다는 일정 기간 동안 섭정했던 신문왕이 두 번째 왕비였던 신목왕후와 혜통국사의 지락에 이한 고육지책이었다. 그만큼 왕궁 안에서도 왕족들 간에 적과 동지가 구분이 안 될 만큼 왕권이 확립되지 않은 혼란이 시기였던 것이다.
“서둘러 오르셔야 합니다. 숲 속은 도적이 있어 위험합니다.”
“그래서 변복變服을 하지 않았느냐.”
청년은 중국풍의 화려한 비단옷을 벗고 3품 이하의 백성들이 입는 무명바지와 저고리를 입고 있었다. 청년은 종자의 재촉을 받고 바위에서 일어났다. 혜통국사의 법문은 사시巳時가 지나야 하므로 아직 시간은 남아 있었다.
청년은 일찍이 월성 대궁이 불당에서 혜통국사의 법문을 들은 적이 있었다. 나라를 평안케 하고 백성의 병고를 씻어달라는 신주를 밤낮으로 외우는 것이 혜통 법문의 특징인데, 승도들과 함께 크고 작게 외치는 알아들을 수 없는 그 신주 소리는 마취제처럼 사람들의 정신을 잃게 했다. 불당에 모인 사람들은 혜통의 신주를 듣고는 마루를 치며 울거나 소리치며 고개를 주어거리는 것이었다.
당시 신라에는 서로 다른 문도가 형성되어 있었다. 고승들이 펼치는 방편方便에 따라서 가풍이 아주 달랐다. 왕족이나 화랑들에게 호국이 대성인으로 추앙받는 원광圓光법사의 가풍이 있는가 하면, 수행자로서 청정한 계율을 강조하는 자장율사나, 승속을 걸림 없이 넘나드는 원효대사의 무애한 가풍도 널리 퍼져 있었다. 그 밖에 장안으로 들어간 원측은 삼장법사 현장의 가르침을 잇는 대학승으로 이름을 날렸고, 훗날 무상은 당의 사천성에서 대선사 마조의 사형이 되고 정중종이란 종파를 일으켰던 것이다.
비록 불교가 인도에서 중국을 거쳐 해동에 들어왔다고는 하지만 신라의 고승들은 어느새 신라 땅을 넘어 거대한 중국 대륙을 연화불국蓮華佛國으로 만들어가고 있었다. 이런 장엄한 불법의 흥륭은 중국 변방에 속한 어떤 나라, 어떤 민족도 이뤄내지 못한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당 태종은 군사를 보내 신라를 속국으로 삼으려 했지만 신라의 대왕은 고승을 중국으로 보내어 자비의 불국토를 이뤄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신라였으므로 신라 사람들은 중국인 못지않게 자존심이 강했고 실제로 화랑도들은 신라를 신에게 선택받은 신국神國이라고 높여 불렀던 것이다.
청년은 뒤따라오는 비구니에게 산길을 비켜주었다. 그러자 비구니는 합장하며 말없이 지나갔다. 비구니의 뺨에는 흉터가 깊게 새겨져 있었다. 그러나 흉측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비구니의 얼굴에는 자비로운 기운이 넘쳤다. 이목구비가 또렷하여 마치 서역에서 건너온 여인 같았다. 청년을 앞서 잰 걸음으로 가던 종자가 말했다.
“사량궁에 살던 여인이옵니다.”
“어찌 알고 있나?”
“마마, 아직도 몰고 계셨습니까? 사량궁을 떠들썩하게 했던 여인이옵니다. 궁 안의 화랑들이 너도나도 청혼을 했던 미모의 여인이옵니다.”
“그런데 어찌 비구니가 되었다는 것이냐?”
“혜통국사의 신도가 되고 나서 비구니가 되고자 스스로 얼굴에 칼을 댔다고 합니다. 그러고 난 청혼하던 화랑들이 모두 물러났고, 여인은 자유롭게 출가를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고 보니 청년은 화랑 사이에서 그런 소문을 들었던 것도 같았다. 청년은 가슴이 무거워졌다. 선뜻 출가를 결행하지 못한 채 갈등하고 있는 자신이 부끄러웠다. 아직도 그의 마음속에는 애욕의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낭낭을 애써 피하는 것도 사실은 그녀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굳이 낭낭을 외면할 이유가 없었다. 아무 때라도 낭낭을 생각하면 가슴이 설레고 그리워지는 것이었다.
“여인의 행동에 자극을 받아 여인의 오라버니도 출가했다고 합니다.”
“그럴 테지. 그럴 수 있어.”
칠불 주위에는 이미 사라들이 가득 차 발을 딛기조차 힘들었다. 혜통국사의 법문이 시작되려면 한 식경은 더 기다려야 하는데도 절 주변은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청년은 종자를 앞세워 사람들을 비집고 들어가 겨우 혜통국사를 친견할 수 있었다.
혜통은 문을 반쯤 열어둔 채 눈을 지그시 감은 모습으로 굵은 염주를 굴리고 있었다. 좀 전에 지나쳤던 그 비구니가 혜통 옆에서 시중을 들고 있다가 청년을 보더니 합장을 했다. 청년은 망설이지 않고 비구니에게 말했다.
“국사님과 이미 약속이 되어 있습니다.”
“들어 알고 있습니다. 마마를 정중히 방으로 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청년은 종자를 문 밖에 세워두고 방으로 들어가 공손하게 엎드렸다. 그러자 수염이 허연 혜통도 천천히 맞절을 하며 청년을 맞아주었다.
“무슨 일로 소승을 만나자고 연락하셨습니까?”
혜통은 비구니를 물리치더니 바로 질러 물었다. 청년도 머뭇거림 없이 말했다.
“국사님, 출가하고 싶습니다.”
“출가는 마마가 하시는 것이지 소승이 하라 마라 할 것이 못 되옵니다.”
몹시 늙어 보이는 혜통이 갑자기 자신의 머리를 내밀었다. 혜통의 머리에는 과연 화상의 흉터가 왕王자로 새겨져 있었다. 불화로를 얹었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청년은 혜통의 느닷없는 행동에 놀라 순간 말문을 잃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에 혜통이 다시 물었다.
“마마, 이번에는 이렇게 묻겠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출가하며 무엇이 되겠습니까? 원광법사가 되겠습니까, 자장율사가 되겠습니까, 원효성사가 되겠습니까?”
청년은 그제야 자신의 심중을 고백했다.
“제가 되고 싶은 것은 원광법사가 아니옵니다.”
“그러하시다면.”
“자장율사도 아니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되시겠다는 것입니까?”
“제가 되고 싶은 것은 원효성사도 명랑법사도 아닙니다. 저는 다만 보살이 되고 싶을 따름입니다. 지장보살이 되어 지옥에서 신음하는 모든 중생을 구제하겠습니다.”
“마마, 지옥이 어디 있는지 알아야 들어갈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제가 서 있는 땅이 바로 극락이자 지옥입니다.”
혜통이 놀라 굴리던 염주를 멈추었다. 그러더니 이마에 주름이 깊이 접힐 정도로 크게 웃어젖혔다.
“하하하. 법사도 화상도 선사도 되지 않겠다는 것이오나 사실은 두루 통달하여야만 그것들을 초월하여 중생ㄷ이 고통을 구제하는 보살이 될 수 있을 것이옵니다.”
청년은 심중에 있는 말을 거침없이 뱉어냈다고 생각했다. 그런 자신이 놀랍기도 했지만 고백을 하고 나자 가슴에 맺힌 응어리가 풀어진 느낌이 들었다. 혜통이 정색을 하고 다시 말했다.
“본디 지장보살은 지옥이 텅 빌 때까지 성불하지 않겠다고 서원을 세운 보살이십니다. 마마 꼭 그리 되옵소서.”
청년은 맹세한다는 표시로 바로 일어나 혜통 앞에 엎드렸다.
“지장보살이 되고 싶습니다.”
“마마, 오늘 약속을 한다면 제가 법명을 내리겠습니다.”
“국사님, 말씀만 주십시오.”
“보살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불법을 통달해야 합니다. 진언도 절하고 염불도 잘하고 참선도 잘한 뒤에야 보살이 될 수 있는 것이오며 고해苦海 속에서 울고 웃는 중생과 함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목숨을 바쳐 약속을 지키겠습니다.”
“좋습니다. 출가는 때를 보아 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반드시 출가하여 보살이 되겠습니다.”
“그러 하오면 법명을 지장이라고 하십시오, 이제 마음은 세속을 떠나 출가를 했으니 지금부터 지장이라 불러도 무방할 것이옵니다.”
“국사님, 무슨 뜻으로 지장이란 법명을 주시었습니까?”
“마마, 인내하기를 대지大地와 같이 하시고, 고요히 생각하기를 비장秘藏과 같이 하시라는 뜻으로 지장이라 하였사옵니다.”
청년은 감격하여 다시 늙은 혜통 앞에 엎드렸다. 그러나 혜통은 지장의 절을 받지 않고 법문을 시작하려는지 밖으로 나가 칠불을 향해 가버렸다. 그러자 혜통을 기다리고 있던 선남선녀들이 일제히 진언을 외기 시작했다.
옴마니반메훔.
옴마니반메훔.
어느새 중천에 떠오른 해는 칠불의 머리 위로 눈부신 햇살을 퍼붓고 있었다. 청년은 칠불 앞에 무릎을 꿇었다. 혜통이 법문을 시작했다. 마치 청년 한사람을 위한 법문 같았다. 혜통은 지장보살이 세운 서원부터 이야기하고 있었다.
“지장보살은 지옥문 앞에서 석장을 짚고 눈물을 흘리는 보살이오. 바로 그대들이 지옥에 들어오는 것을 보고 안타까워 목이 메어 그러는 것이오. 지장보살은 ‘지옥이 텅 빌 때까지 성불하지 않겠다고 맹세’를 한 보살이오.”
청년은, 아니 지장은 굵은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사람들은 왜 그가 눈물을 흘리는지 몰라 무심코 바라볼 뿐이었다. <계속>
글 정찬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