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 해사(海沙) 스님이 법고 앞에 섰다. 날렵하면서도 격조를 잃지 않은 몸짓, 북채를 흔들며 법고를 달래듯 춤사위가 사뿐 이어진다. 작은 동작에서 큰 손 사위짓, 타다다닥, 둥둥 법고 울리는 소리는 고요(靜)와 움직임(動)을 계곡의 물결처럼 오간다. 성불을 향한 수행자들의 정진모습을 저리 춤으로 표현한 것이리라.
불같은 원력으로 용맹정진을 하다가, 얼음보다 차갑게 가라앉는 납승의 모습이 해사 스님의 손끝, 발끝의 동작마다에 깃들어 벅찬 감동을 일으킨다. 그래서 영산재에서의 법고무는 수행승을 의미한다.
영산재를 처음 대하는 중국의 불자들의 표정도 호기심에서 관심으로, 나아가 춤사위와 하나가 되어가고 있다.
이어 영산재 준보유자 일운 스님의 범패가 장엄한 목청과 함께 이어지고 영산재보존회 이수자들로 구성된 비구스님 30여 명이 바라(심벌즈처럼 생긴 불구)를 들고 부처님 전으로 당당하게 나선다. 천수(千手)바라, 대중의 천수경 독경에 맞춰 바라춤을 추는 집단무의 의식이다. 경희로운 마음을 몸짓으로 나타내는 남성적인 춤이다. 홍가사를 두른 젊은 비구들이 구성진 범패음에 맞춰 추는 바라춤은 말 그대로 장관이다. 안정된 춤사위가 여법하게 진행된다.
바라춤은 부처님의 진리, 즉 법을 상징하는 춤이다. 부처님의 진리가 현현하는 모습이다. 부처님이 중생들의 근기에 맞추어 수기설법을 하셨듯이 바라는 역동적이면서도 절제와 인욕, 사자의 포효와 양의 포근함을 두루 내포하고 있다. 전문 춤꾼에게서는 볼 수 없는 의연함, 당당함, 환희로움이 날것 그대로 대중들에게 전달되고 있다. 마치 영축산의 법음에 산하대지 두두물물이 경청하며 환희심에 휩싸여 있는 광경이다.
이어 십여 명의 비구니 스님들이 조동탁의 싯구에서처럼 얇은사 하이얀 고깔을 쓰고 나비춤을 시연한다. 가사장삼을 활짝 펼치고 휘이익 돌다가, 앉고, 앉았다가는 이내 격렬한 몸짓으로 속진을 떨어낸다. 나비춤은 본시 부처님 그 자체를 상징하는 춤으로 부처님의 성도를 마치 나비가 애벌레에서 허물을 벗고 성충이 되어가는 순간에 빗대어 표현한 것이다. 고요한 몸짓, 손끝 발끝의 떨림조차도 최대한 자제하는 정적인 춤에서 순간 격렬한 몸짓으로 돌변하는 것은 필시 깨달음에의 마지막 고비를 일컫는 것이리라.
나란히 줄을 맞춰 앉아서 향화게를 하는 비구니 스님들의 콧등에는 쌀쌀한 날씨인데도 땀 기운이 맺혔다.
부처님을 상징하는 나비춤, 부처님의 가르침을 상징하는 바라춤, 그리고 수행자의 모습을 상징하는 법고춤, 그리고 불전에 향과 꽃으로 공양을 올리며 일체중생이 모두 성불케 하고자하는 대승적 대원을 상징하는 향화게의 장엄한 광경은 영산재 시연을 처음 대하는 중국의 불자들에게 깊은 감동으로 다가가는 듯 했다.
중국정부 종교국(국장 엽소문)과 중국불교협회(회장 일성 스님) 초청으로 지난 11월 14일부터 18일까지 4박5일간 중국 북경 영광사와 하북성 백림선사에서 태고종 영산대재 시연이 봉행됐다. 지난 10월 중국 신주화악의 서울공연에 대한 답방 형식으로 진행된 이번 영산대재 중국시연은 진감국사가 범패를 들여온 지 1200년 만에 중국에서 이뤄졌다는 점에서 의의를 더했다.
중국불교계 지도자들은 이번 시연을 통해 영산대재가 왜 한국불교 무형문화의 핵심인지를 피부로 파악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밝혔다. 특히 소리와 춤, 악기가 이뤄내는 절묘한 앙상블, 그것이 바로 조화의 세계, 화합의 세계, 부처님의 이뤄놓으신 법화의 세계를 그대로 옮겨놓은 영산재에 큰 감동을 받았다고 강조했다.
영산재 시연을 지켜본 중국불교계 지도자들은 이구동성으로 ‘마치 영산당시로 돌아가 부처님을 친견하고 있는 듯한 감동을 받았다’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1200년 전 중국에서 전수해간 영산대재가 한국의 태고종에 의해 연면히 보전되어 온 것에 대한 지극한 감사가 그들의 언동에서 흘러나왔다.
그들의 고마움은 국빈급 예우로 나타났다. 4박5일 일정내내 중국 종교국과 불교협회, 불교문화교류회 등의 관계자들이 보여준 정성은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최상의 수준이었다. 엽소문 중국종교국 국장, 일성 중국불교협회 회장, 손사빈 하북성 부성장 등 중국의 인사들은 감사함과 고마움을 시연장에서, 또 만찬장에서 거듭 밝혔다. 그동안의 한중 양국간 불교교류가 행사위주로 흘러왔다면, 이제부터는 태고종과의 문화적 교류에도 큰 비중을 두겠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조박초 전 중국불교협회 회장이 주창한 '한중일 불교의 황금유대'가 이번 행사를 통해서 비로소 진정한 꽃을 피우기 시작했음을 누누이 밝혔다. 특히 문화혁명이후 끊긴 중국불교의 문화전통을 태고종을 통해 복원하려는 간절함이 그들의 표정에 진하게 녹아 있었다.
중국의 불자들도 이번 영산대재 시연이 특히 사천성 대지진 희생자의 천도의미를 함께 갖는다는 소식에 영산재 시연이 있었던 북경의 영광사와 하북성의 백림선사로 몰려들었다. 영산재가 진행되는 동안 그들의 바깥에서 눈물을 흘렸다. 회한의 눈물, 감사의 눈물이었다. 홍가사를 걸친 태고종 스님들이 지나갈 때 그들은 부처님께 예경을 하듯이 깍듯한 예의를 차렸다.
운산 총무원장과 인공 종회의장, 월해 부원장, 환우 영산재보존회장, 일운 옥천범음대학장 등 태고종 스님들의 얼굴에는 자부심 어린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늘 소외되고 위축됐던 태고종이 중국 시연을 통해 한껏 자긍심을 갖는 계기가 된 듯이 보였다.
이번 영산재의 중국시연은 한국불교의 대표적인 불교의식 영산대재가 중국불교를, 중국의 불자를 울리는 4박5일의 장엄한 장도였다.
*영산재(靈山齋)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영취산에서 법화경을 설하시는 도량을 시공을 초월하여 본 도량으로 오롯이 옮기고, 영산회상의 제불보살님께 공양을 올리는 의식이다. 그리하여 살아 있는 사람과 죽은 사람이 다함께 진리를 깨달아 이고득락(離苦得樂)의 경지에 이르게 하는 의의가 있다.
그러므로 영산재는 공연이 아닌, 장엄한 불교의식이다. 즉 삶과 죽음으로 갈라진 우리 모두가 부처님 가르침 가운데 하나가 되어 다시 만날 것을 기원하며, 부처님 전에 행하는 최대 최고의 장엄한 불교의식인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