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와의 소통을 철저히 차단했던 조선과 달리 일본은 도쿠가와 막부 때부터 네덜란드를 비롯한 유럽의 여러 나라와 무역관계를 유지해왔다.

일본의 대표적인 수출품은 일본의 다기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유럽인들을 매료시킨 것은 일본의 오밀조밀한 찻잔이 아니라 그 찻잔을 싼 종이, 엄밀하게 말해 그 종이에 그려진 화려한 그림이었다.

우키요에(浮世畵). 판화로 찍어낸 선명하고도 환상적인 색과 화풍은 단번에 유럽의 예술인들을 매료시켰고, 여기에 영향을 받은 고호, 고갱, 마네, 모네, 세잔 등의 작가들은 후기 인상파라는 새로운 미술 장르를 열었다. 서양 미술의 물줄기를 바꿔버린 자퐁니즘의 도화선이 된 우키요에를 한국에서도 감상할 수 있는 ‘특별한’ 전시가 열린다.

치악산 명주사 고판화박물관(관장 한선학)은 10월 19일부터 31일까지 ‘일본 고판화의 세계’를 주제로 전시회를 개최한다.

이번에 전시되는 작품 중에는 한국과 관련된 희귀 판화본들이 소개돼 특히 눈길을 끈다.

한선학 관장이 최근 입수한 보력판 조선통신사 목판본 ‘조선인행렬차제(朝鮮人行列次第)’(1764년간)는 조선통신사 행렬도 가운데 가장 나중에 출판된 작품으로 꼽힌다. 같은 종류의 행렬도 가운데서도 가장 나중에 출판된 것이지만, 이 행렬은 실질적으로 조선 역사상 조선통신사의 마지막 일본방문이라 할 수 있다. 이후 도쿠가와 막부는 한차례 더 조선통신사를 요청했지만 이들은 풍랑에 길이 막혀 본토로 들어가지 못한 채 다시 조선으로 돌아갔고, 그 후 더 이상 조선통신사는 일본에 파견되지 않았다.

갑신년 사행은 일본 제10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하루(德川家治)의 습직을 축하하기 위한 사절로 조엄을 정사로 472명이 사절단으로 파견됐다.

원래 정사로 내정된 이는 서명응이었지만 그가 옥사에 걸려 유배되자 정상순이 임명되었다. 그러나 정상순은 노모 때문에 원행을 할 수 없다고 고사하여 결국 조엄이 정사로 재임명되었다.

고판화박물관 판본에 처음 임명된 서명응의 이름이 등장하는 것은 이 행렬도가 사실상 조선통신사가 일본 땅에 도달하기 전 이미 제작된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처음 입수한 정보와 달리 다른 이가 정사로 오자 판화 제작자들은 부랴부랴 그 위에 이름을 덧칠한 흔적이 나타난다.

이같은 해프닝의 이면에는 조선통신사 행렬도가 일반인들에게 판매될 정도로 인기가 높았고, 조선통신사에 대한 일본인들의 관심이 드높았음을 알 수 있다.

갑신년 사행은 또 한가지 큰 의미를 지닌다. 당시 정사로 간 조엄이 구황작물로 고구마를 가져와 제주와 남해의 섬에 심은 것이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고구마가 유입된 계기였던 것이다.

조엄이 고구마 종자를 구한 곳은 쓰시마였다. 쓰시마에서 ‘고코이모(孝子 佇)’라고 부르던 것이 그대로 들어와 고구마가 되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이번 전시에서 주목되는 또 하나의 판화집은 줄타기, 무속춤 등 조선 민중들의 모습을 찍인 『조선풍속화보』이다.

이 판화본은 일본의 어느 작자가 조선의 여러 지방을 다니며 직접 그린 그림을 일본에 돌아가 판화로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1706년에 제작된 금강경변상도, 에도시대 작품인 인과경변상도, 천보년간(1830～43)에 제작된 왕생요집변상도는 불교계에도 판화작품이 널리 이용되고 있었음을 드러낸다.

이밖에도 후쿠사이의 만화, 히로시게의 오리지널 우이요에 사루하시 풍경(甲陽猿橋之圖), 우타 마로의 미인화, 메이지 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조선여인 판화도 눈여겨 볼 만한 작품들이다.

우키요에의 색깔만큼 치악산이 선명해지는 계절, 화려한 코발트블루의 세계를 만나러 치악산 속으로 성큼 들어가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