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색깔로 표현하면 무슨 색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비키 론드로스라는 룩셈부르크 가수의 표현대로라면 사랑은 파랗다(L'Amour Est Bleu). 사랑이 파란 이유를 그녀는 “사랑은 파랗다. 그대의 두 눈에서 움직이는 하늘같이 파랗다”고 설명했다.

하늘의 푸른빛이 그 어느 때보다 투명한 가을의 문턱, 푸른빛으로 가득한 전시가 미술 애호가들의 푸른 가슴을 끌어당긴다.

9월 26일부터 12월 7일까지 환기미술관에서 열리는 <환기미술관 공모작가 기획전_푸른빛의 울림>展은 12명의 작가들이 푸른빛을 화제(畵題)로 그려낸 작품들로만 구성된 전시회이다.

환기미술관은 2008년 김환기 미술의 중추가 되는 ‘푸른빛’ 을 화제(畵題)로 공모전을 개최했다.

김환기의 ‘푸른빛’은 그의 전 예술생애에 걸쳐 연구, 실험된 예술 표현의 결정체이다. 김환기는 한국의 산월과 항아리, 사슴과 같은 자연상과 전통기물 등을 구체적인 모티브로 작업하던 초기시절에서 1964년 뉴욕 이주 후 순수한 색 점으로 작업하던 말년에 이르기까지 전 생애에 걸쳐 꾸준한 청색주조의 화면을 추구했다.

김환기가 1957년 남불 니스(Nice)에서 개인전을 했을 때, 니스의 한 라디오 방송국에 출연해 한국 자연의 아름다움을 청조淸調의 심미審美로 소개할 정도로 그는 한국적 정서와 예술감을 대변하는 색으로 청색을 꼽았다.

“……우리 한국의 하늘은 지독히 푸릅니다. 하늘뿐이 아니라, 동해바다 또한 푸르고 맑아서, 흰 수건을 적시면 푸른 물이 들 것 같은 그런 바다입니다. 나도 이번 니스에 와서 지중해를 보고 어제는 배도 타봤습니다만, 우리 동해바다처럼 그렇게 푸르고 맑지가 못했습니다. … 중략 … 푸른 하늘, 푸른 바다에 사는 우리들은 푸른 자기 청자를 만들었고, 간결을 사랑하고, 흰 옷을 입는 우리들은 흰 자기, 저 아름다운 백자를 만들었습니다…….” (김환기, 1957년 9월 「편편상」중)

자연의 형태를 거부하지 않은 채 대상의 본질을 파악하고 그 요소를 추출, 하나의 점(點)으로 응축하여 그의 화제(畵題)와 화력(畵力)을 집중하던 뉴욕시절, 김환기의 청색조는 전면점화로써 절정을 맞는다. 이때 김환기는 블루와 그린을 넘나드는 맑간 옥빛, 청자의 비취색에 가깝던 초기의 푸른색에서 쪽빛의 청색 혹은 심해(深海)의 청회색으로의 다양한 변화를 이룬다.

푸른색은 동양인들에게도, 서양인들에게도 신비롭고 상서로운 빛이다.

동양인들에게 푸른색은 오행 가운데 목(木)을 의미하는 동시에 만물이 생성하는 봄의 색, 생명과 신생을 상징하는 색이자 만복을 기원하는 색으로 귀히 여겼다. 서양의 푸른색은 영원성, 이상, 조화, 정신, 신의 지혜, 순수의 상징으로 오랜 세월 동안 그리스로마 신화의 주신인 제우스와 헤라의 복장으로, 그리고 성모 마리아의 청색 망토를 넘어 유럽 각 왕실의 기조 색으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현대에 이르러서는 자기탐구, 정화, 내적성장의 전제 개념인 불안과 공상의 상징으로 통용되기도 하였다.

푸른색은 이브 클랭과 같은 현대 작가들의 각별한 집착과 작업으로 연결되어 자신만의 울트라마린블루(IKB)를 천명하는가하면 블루톤의 모노크롬 작업이 활발히 연구되는 등 현대미술의 한 단상으로 자리 잡기도 하였다.

이렇듯 푸른색은 동서양의 공간과 시대를 막론하고 신성과 이상향, 정신성 등을 아우르는 색으로 인식되고 있다.

환기미술관은 “김환기가 일생을 통해 추구했던 푸른색에 관한 미감美感이 후대로 이어지는 모습을 조망하는 동시에 세대와 지역을 초월하는 당대 작가들의 진지한 조형의식과 제작의지를 재발견하여 예술적 시야를 공감하고 열린 대화를 나누고자 한다”고 전시기획에 대해 설명했다.

‘푸른빛’을 모티브로 모인 나진숙, 남궁환, 노경화, 문성자, 박진호, 부지현, 사공우, 신미혜, 이소영, 이효성, 정연희, 프랑수와 패로딘 작가. 이들의 손끝에서 피어난 12가지 다른 푸른빛들이 서울의 가을하늘을 더욱 공명하게 만들 것이라 기대해 마지 않는다.

이번 공모전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이는 유일한 외국인 작가인 프랑수와 패로딘이다.

프랑소와 패로딘의 기하학적 추상 “68.6”은 각기 다른 모양의 연속적인 108 요소로 이루어진 대규모 릴리프 작업이다.

가로, 세로, 높이 각 15cm의 가상의 정육면체 안에서 오목형, 볼록형, 계단형의 세 가지 양식을 기본축으로 각각 36가지 변형 모형을 이룬다. 릴리프들은 상, 하, 좌, 우 보는 각도에 따라 블루의 음영을 달리하고 더불어 빛의 각도에 따라 그림자의 위치를 달리하며 또 다른 기하학적 변형을 선보인다. 수학의 절대 수 6에서 출발, 그 6이 6번 순환하며 36이 되고 36이 3번 순환하여 108를 이루는 수의 절묘함 속에서 작가는 108가지 인간의 번뇌를 표현하고 있다.

불교에 깊이 심취한 서구 작가의 108 번뇌가 각기 다른 모양의 푸른빛으로 표현된다.

나진숙의 ‘결’ 연작은 코발트 블루의 판넬 위에 식물의 조직을 암시하는 작품과 저부조의 검푸른 판넬 위에 작가가 촬영, 편집한 물의 이미지를 프로젝션한 작품으로 구성된다. 작가의 결에 관한 단상은 식물의 유기적인 구조체에 대한 세심한 관찰을 넘어 물의 너울, 물결에 관한 담대한 관찰로 확장된다. 낙하하는 물의 파동은 저부조의 굴곡과 맞닿으면서 자연스러운 빛의 반사와 굴절을 이루며 아련히 반짝이는 영상으로 전환된다. 작가는 기본적으로 단위구조로 작품을 제작하는데 이는 장소와 주제에 따라 자유로운 조합을 가능케 함으로써 작품의 부분과 전체가 유동적으로 구성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남궁환의 작품 '환궁‘은 구조물과 회화가 복합적으로 결합된 거대 발광체이다. 남궁환의 작업은 증식(增殖)의 형식으로 맞물리는데, 점에서 시작하여 점차 증산되는 만다라의 형상은 평면을 넘어 입체로 구현되며 이때의 만다라의 움직임, 소용돌이는 일종의 태극의 형상으로 변형, 확장되어 환궁 안으로의 길라잡이가 된다. 빛과 어둠의 사이클로 순환하는 환궁의 내부는 낮 동안 축광하고 어둠 속에서 푸른빛을 발광하는 형식으로 시간에 따른 에너지의 생성과 소멸의 순환을 암시한다. 환궁의 낮 동안 검은색 드로잉의 만다라가 드러나다가 밤에는 야광안료의 만다라가 도드라지는 반전의 묘미 속에서 작가는 존재의 근원에 대한 사유와 명상을 제안한다.

노경화의 ‘푸른 물방울’ 작업은 작가의 과거 기억 속에 잠재하는 푸른 물방울에 대한 여러 이미지를 현재 시점으로 복원하면서 물방울의 정지와 움직임의 순간을 부각시키고 가공하여 다이나믹한 이미지로 재생산한다. 물방울에 투영된 현실의 잔상들과 반사되는 빛의 흔적들은 거울효과 혹은 데칼코마니 처럼 대칭 형태로 분할, 복제되어 증산된다. 작가는 이러한 과정에서 오리지널과 복제 이미지의 대칭을 현실과 허상, 과거와 현재의 대립으로 보고 그 양자 이미지간의 팽팽한 긴장 속에서 일종의 움직임, 에너지를 감지한다.

문성자의 작업은 활달하고 자유로운 제스처의 그림으로 추상표현주의 작품을 연상케 한다. ‘예술을 위한 예술’을 추구하는 모더니즘의 미술 정신-내러티브의 압박에서 벗어나 순수 조형 요소로만으로 고도의 정신성과 자유를 추구하는-은 푸른색의 상징인 자유와 순화된 정신성의 반영이라 할 수 있다.

박진호의 작업은 각기 푸른 배경 앞에서 춤을 추는 ‘꽃다발 대가리’의 남자와 잘려지는 꽃을 주제로 한 ‘꽃 자르기’가 각기 사진과 영상으로 펼쳐진다. 작가는 블루 스크린의 상징성-영상 편집에서는 다른 배경으로 얼마든지 치환 가능한 불완전한 배경이자, 컴퓨터상에서는 ‘죽음의 파란 화면 Blue Screen of Death'이라 하여 윈도우 운영체제에서 시스템 오류를 복구하지 못할 때 나타나는 화면-을 차용하여 비록 스스로는 흥겨운 춤이라 명명했지만, 꽃다발을 뒤집어쓰고 퍼포먼스를 하는 남자의 심상, 블루의 우울함을 엿볼 수 있다.

부지현의 작품 ‘휴休’의 주 소재인 ‘집어등’은 바다와 함께 유년기를 보낸 작가의 심상이 녹아있는 기억체이다. 작가에게 체감된 바다의 기억이란, 해질녘 짙푸른 어둠으로 바다와 하늘의 경계가 모호해질 때 바다 저편에 떠오르는 오징어배의 눈부신 빛이자, 그 빛의 강도만큼 드리워진 밤바다의 그림자이다. 그 밤바다의 그림자는 야간작업을 하는 어부의 고단함과 애석함일 수 있으나 그것은 그냥 주어진 수명 동안 최선을 다해 작렬하던 집어등의 그을림과 같은 우리 삶의 또 다른 흔적일 뿐이다. 작가는 폐등 위에 실크스크린으로 일렬의 숫자와 영문을 기입하는데, 이는 집어등을 수거한 배의 번호판과 집어등이 폐기된 날짜이자 동시에 작가가 집어등을 수거한 날짜를 의미한다.

사공우의 ‘삶의 노래’ 연작은 캔버스에 무수한 한지 콜라주로 채워져 있다. 이 한지 조각들은 바람에 나부끼는 들판처럼 결을 지어 리드미컬한 흐름을 보이는데 이는 음표를 작업의 근간이자 화두로 삼는 작가의 의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리고 무리지어 결을 이루는 부분마다 다채로운 푸른색, 녹갈색의 농담이 감지되는데, 이는 바닥색과 한지가 새워진 각도 그리고 시선에 따라 달라지는 빛의 반사가 만들어 내는 하모니이다. 작가는 단순한 소리가 음으로, 멜로디로, 운율로 발전하며 인간의 희노애락의 감정을 표현하고 치유하는 음악의 특성을 차용함으로써 회화적 조형성에 음악적 감성과 서사를 담아내고자 한다.

신미혜의 ‘Blues-abstraction’, ‘Blues-representation’ 연작은 잔잔한 바다 전경을 한 시점에서 포착하여 순간의 인상을 담아낸 작업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진들은 시간대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나는 바다색의 변화, 푸른빛의 스펙트럼으로 다시 우리에게 시간의 연속성을 제시한다. 신미혜의 바다 연작은 마치 한 폭의 색면 추상을 연상케 하는데, 이는 수면水面과 수면에 접한 대기 그리고 그것을 촬영하는 소실점간의 두터운 공기층을 잡아낼 수 있는 사진 작업의 특수성, 사진 특유의 미감美感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신미혜의 사진 속에 담긴 푸른빛의 바리에이션은 ‘푸른색=물색, 하늘색’이라는 예시, 또는 가정속에서 추상색으로서의 푸른색을 구체적인 회화의 빛깔로 체감하게 한다.

이소영의 작업은 건축물의 축소물을 제작한 후 내부를 촬영하여 다른 공간의 이미지로 변화시킨다. 작가는 이번 전시를 위해 환기미술관의 건축물을 축소 제작하여 공간에 대한 전지全知적 개입을 시도한다. 그리고 각색된 공간 속에 각각 키리코의 이탈리아 광장과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를 삽입하여 현재의 미술관과 과거의 미술가들이 절묘히 공존하는 몽환적인 상황을 연출하였다. 작가는 현실 공간과 과거성의 이미지를 결합하면서 항상 그 경계, 사이의 공간에 존재함을 자체한다.

이효성의 'Paysage-Blue' 연작은 캔버스 사방에 프레임을 치고 묽은 안료를 붓고 말리는 비개성적인 작업 과정의 무수한 반복으로 제작되어진다. 겹겹이 쌓이는 안료층은 그 두께만큼 푸른색의 깊이를 더해간다. 작가는 액체의 물성-유동적이고 구체적인 색으로 체감되지 않는 성향-을 고착화하여 촉각적인 마티에르를 재현함으로써 구체적인 회화로 제작한다. 안료의 밀도에 따라 깊어지는 색감을 조절하면서 작가는 바닥의 흔적들을 덮어 가는데, 이는 시간에 따라 한 층 한 층 축적되는 지층처럼 시간의 집첩(輯疊)을 이룬다.

정연희의 작업은 별의 생성과 소멸에 관한 광대한 여정을 담고 있다. 작가는 짙푸른 밤하늘에서 경험되는 심상을 확대, 심화하여 거대한 우주의 서사로 풀어낸다. 빛의 집중과 흐트러짐으로 연출되는 우주의 광경廣景 중에 등장하는 바실리카 혹은 원형 세례당의 평면도는 인간의 정신과 마음을 담는 용기容器로 우주와 인간이 랑데뷰하는 제 3의 영역이다. 작가는 천정화의 형식을 빌어 관람객이 광활한 우주 공간을 올려다보는 제스처를 취하게 유도함으로써 우주의 공간감을 좀 더 암시적으로 체감하게 한다.

입장권 성인 8,000원 / 단체(30인 이상) 7,000원 / 청소년(초등-고등) 6,000원 / 미취학 무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