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이 감정(鑑定)하고 기어자굉(騎魚慈宏) 등이 편집한 '만덕사지'(萬德寺志)가 전란 이후 자주적 역사의식과 편찬의 소산물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9월 19일 대우재단빌딩 세미나실에서 열린 한국역사민속학회 제155차 연구발표회에서 조선후기 만덕사지의 찬술과 성격을 발표한 한국불교선리연구원 오경후 선임연구원은 “다산과 만덕사 승려들의 자국사에 대한 독자적 인식과 정체성 강조는 우리나라 불교사에 대한 적극적 인식으로 이어졌고 만덕사지에서 광범위한 자료수집과 면밀한 고증을 거쳐 객관적 찬술의 시도로 나타났다”고 주장했다.

오 연구원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조선 역사에 대한 주체적 인식으로 이어졌고 철저한 고거주의에 기초한 자국사 편찬이 시도됐다”며 “이러한 변화는 불교계도 예외가 아니었다”고 지적했다.

오 연구원은 “양란 이후 사찰들이 전란의 잿더미 속에서 재건공사를 대규모로 진행했는데 사적기와 사지류 역시 조선 전기보다 많이 찬술되었다”면서 “그 중에서도 만덕사지와 대둔사지는 실학자 다산 정약용의 영향으로 동시대에 찬술된 사지류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면모를 지니고 있다”고 평가했다.

다른 사찰에서도 사적기와 사지류 역시 조선 전기보다는 많이 찬술했지만, 내용은 정확하지 못했고 객관성에서 많은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대부분의 사찰들이 원효와 의상이 창건주인 것처럼 묘사했고, 창건 시기는 자연히 실제보다 앞당겨졌다. 반면 만덕사지는 사찰과 관련된 일련의 사실들을 면밀한 고증을 통해 찬술되었다. 실학의 대성자인 다산의 학풍이 만덕사의 객관적인 역사서술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음은 물론이다.

오 연구원은 이것이 “다산이 사지 전권을 감정하는 소임을 맡았고 그와 사제의 인연을 맺었던 아암 혜장을 비롯한 그의 제자들이 편집과 교정을 맡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오 연구원은 또 “다산과 그의 제자들은 고려시대 자료에 대한 오류를 바로잡았고 사라질 위기에 처한 자료를 수록하여 보존하고자 했으며, 찬자들은 동시대의 만덕사가 지닌 위상과 가치 역시 강조했다”고 평가했다.

즉, 고거주의에 기초한 객관성 중시, 불교사 자료의 보존 의식은 여타 사지 서술방식에 비해 훨씬 더 진일보된 역사의식으로 평가된다는 것이 오 연구원의 설명이다.

이날 오 연구원의 논평을 맡은 미황사 주지 금강 스님은 정혜결사가 이루어진 송광사에 비해 연구가 미진했던 백련사의 역사를 조명한 오 연구원의 연구를 높이 평가하면서도 두 가지 측면에서 다른 견해를 제시했다.

첫째는 오 연구원이 지나치게 다산을 강조함으로써 만덕사(현재 강진 백련사)의 사풍(寺風)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금강 스님은 “만덕사는 고려후기 백련결사 이후 실천적 불교, 민중적 불교의 특징이 상당히 두드러진 곳으로, 그 전통이 오늘날까지 이어져오고 있다”며 “그러한 실천적 민중적 불교의 영향이 만덕사지에서 자주적 역사관으로 드러날 수 있었던 것”이라고 주장했다.

둘째는 다산의 참여가 아암 혜장과의 친밀한 관계속에서 이루어진 것이지, 아암이 다산의 제자였기 때문은 아니라는 점이다.

금강 스님은 “아암을 다산의 제자로 평가한 것은 오 연구원이 최초이며, 이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부분”이라고 지적했다.

금강 스님은 이어 “다산이 불교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킬 수 있었던 것은 아암 혜장의 영향이 지대하며 그와의 친분으로 인해 다산이 다산 기슭의 다산초당으로 이주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스님은 “그들이 서로에게 보낸 편지 내용상으로 볼 때 다산과 아암 혜장은 마치 형제나 친구처럼 친숙한 관계였지 사제관계로는 보기 힘들다”고 지적했다.

금강 스님은 또 “만덕사지에 드러난 실천적이고 자주적인 정신은 현대 한국불교의 지향점을 시사해준다”며 논평을 끝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