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승은 우리나라의 전래 민속을 상징하는 대표적 흔적 중의 하나다. 주로 잡귀의 출입을 금하는 기능과 함께 불법을 지키는 신장상(神將像)으로서의 구실을 하였다.
장승은 흔히 마을 입구에 서 있는 것이 보통이지만, 절 입구에 장승이 서있는 경우도 꽤 많다. 실상사 입구 석장승이 유명하고, 황해도 구월산 월정사 입구에도 제법 멋들어진 석장승 두 기가 성소를 지키는 위병처럼 당당하게 서있다. 절집 장승들은 대부분 그럴듯한 설화나 전설을 가지고 있는데, 함안 지리산 벽송사 목장승의 설화는 그중 백미다.
본격적인 가을이 시작된 어느 좋은 날, 벽송사 목장승을 찾아서 지리산으로 향했다. 벽송사는 경상남도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에 있는 선방사찰로 창건에 얽힌 얘기들이 구전되거나 기록으로 많이 남아있는 유서 깊은 절이다. 지리산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칠선계곡이 시작되는 곳에서 가파른 왼편 산길을 타고 올라가다가, 휙 굽어지는 벽송사 입구로 들어서면 제일 먼저 오른쪽에 세워져 있는 장승각이 눈에 들어온다.
벽송사 목장승은 2기 모두 몸통이 절반가량 땅 속에 묻힌 하체매몰 모습으로, 땅위로 드러난 높이가 2m 내외이다. 한쪽 장승은 윗부분이 불에 타 파손이 심하다. 구전에 의하면 약 70년 전에 세운 것이라고 하는데, 목장승으로서는 오래된 귀한 장승이다. 눈·코·입이 과장되게 표현되었고, 순박한 인상을 주고 있다. 무서운 듯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친근함을 느끼게 하여 질박한 조각수법이 돋보인다.
역시 사진으로 보는 것과 직접 보는 것은 느낌이 다르다. 사진으로는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영감이 떠오르지 않더니, 만질 듯 가까이서 살펴보니 목장승의 숨소리마저 들리는 듯하다.
다 알다시피, 사찰(寺刹) 입구에 세워진 장승은 잡귀의 출입을 막고 경내의 금지된 규제와 풍수비보(風水裨補)를 지켜주는 수문(守門)과 호법(護法)의 신장상(神將像)이다. 벽송사 장승 중 왼쪽의 장승은 머리 부분이 불에 타 없어졌고, 입은 홀쭉하게 꼭 다물어 뺨이 움푹 패었으며, 그 아래 짧은 수염이 나 있다. 몸통은 중간까지 묻혀 있고, 키가 175cm, 둘레 125cm로 금호장군(禁護將軍)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오른쪽 장승은 짱구 모양의 민대머리에 커다란 왕눈과 주먹코를 가졌다. 입모양은 합죽하며 입 주위에 불꽃무늬 같은 수염을 표현하였고 턱 밑에도 수염이 무성히 나 있다. 몸통은 중간까지 묻혀 있고, 키가 200cm, 둘레 130cm로 호법대신(護法大神)이란 명문(銘文)이 음각(陰刻)되어 있다.
밤나무를 재료로 조각하였고 얼굴 표정에서 과장(誇張)과 질박(質朴)을 동시에 표현하고 있는 장승으로 이곳을 배경으로 한 판소리「변강쇠 타령」과 연계한 신앙의 성격을 보여주고 있다.
원래는 벽송사로 들어가는 길가의 양쪽에 마주보고 서 있는 한 쌍의 목장승이었는데, 지금은 조그만 집을 지어 한 군데에 가지런히 세워놓았다. 여느 절들의 입구라면 사천왕상이나 금강장사를 보게 되겠지만 벽송사 입구에는 목장승이 그 역할을 대신한다. 이 목장승들은 경상남도 민속자료 2호로 지정되었다.
특이한 모습을 하고 있는 이 장승들한테는 그 생김새만큼이나 질퍽하고도 음습한 설화가 담겨있다.
변강쇠와 옹녀의 질펀한 사랑 놀음에 전국의 목장승들의 대항했다는 이야기다. 판소리 열두 마당 가운데 변강쇠타령(가루지기) 중 '천하의 오잡년 옹녀가 천하의 변강쇠와 내외 삼아 함양 땅에 살았다'는 구절을 들어 많은 학자들이 변강쇠 타령의 주요 무대가 벽송사 주변일 것으로 추정하는데, 근거는 함양 땅, 특히 등구 마천지역에 장승이 유난히 많았던 까닭이다. 설화의 내용은 대략 이렇다.
“
변강쇠! 그는 잡질(성행위) 외에는 별다른 재간이 없었던 강쇠란 놈이었다. 정력이 하도 강해서 하루 온 종일 그 짓을 하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다. 그의 상대역인 옹녀가 나무를 해 오라고 하면 산으로 올라가 나무할 생각은 안 하고 지리산 자락 곳곳에 세워져 있던 천하대장군이나 지하여장군과 같은 장승들을 통째로 뽑아 장작을 패듯 도끼로 패서 가져 오기를 일삼았다.
강쇠란 놈은 그렇게 쪼갠 장승목들로 아궁이에 군불을 지피고, 허구한 날 뜨끈뜨끈한 골방에 틀어박혀 옹녀와 들러붙어 질펀한 사랑놀음을 하며 세월을 보냈다.
질펀한 사랑놀이를 하다가 땔감이 떨어져 방이 식으면, 눈에 띄는 족족 장승들을 뽑아다 패서 때니 함양 땅 장승들은 언제 어느 때 변강쇠에게 뽑혀 땔감이 될지 모르는 딱한 처지가 되었다.
처지가 이렇게 되자 신변에 위협을 느낀 함양의 장승들이 모여 대책회의를 하였다. 힘이 천하장사인 변강쇠, 하룻밤에도 열 여자의 몸을 녹초가 되도록 흥건할 땀방울로 짓누르고도 다른 여자를 취할 정도로 강력한 변강쇠 놈의 숫기에 지레 겁을 먹은 함양 땅 장승들은 자신들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변강쇠를 당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할 수 없이 대표를 뽑아 전국에 있는 장승들의 우두머리인, 서울 노량진 나루터에 세워져 있는 우두머리 장승을 찾아가 변강쇠의 행패를 일러 바쳤다.
함양에서 올라온 대표 장승으로부터 자세한 이야기를 들은 우두머리 장승은 전국팔도에 통문을 돌려 방방곡곡에 흩어져 있던 수만의 장승들을 새남터에 모이게 하고, 머리를 맞대고 긴급 대책회의를 열어 강쇠란 놈을 응징할 방법을 강구하게 되었다.
대표 장승들이 모여 세운 대책은 전국의 장승들이 가지고 있는 갖가지 신통력을 총동원해 변강쇠에게 8백여 가지의 병을 도배하여 죽게 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여 결국 변강쇠는 전국 장승들의 일치된 힘에 의해 병에 걸려 죽고 말았다.
”
벽송사 목장승에 얽힌 이 설화는 참으로 교훈적이다. 이 설화에는 상대가 없을 만큼 강한 물리적 힘으로 세상을 좌지우지하는 독불장군도 민초들의 단합된 힘 앞에서는 끝내 붕괴될 수밖에 없다는 가르침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
목장승의 교훈이 아니더라도 세상에 힘 있는 사람은 힘이 있을 때 더 조심해서 힘을 써야 한다. 그것을 모르고 마치 세상을 자신의 마음대로 주물럭대는 세력들이 오늘날에도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어느 시대든 그런 세력들이 활개를 치면 칠수록 나라는 혼란해지고, 민심은 흉흉해진다. 결국 그들은 끔찍한 종말을 맞게 되겠지만, 그로 인해 나머지 세상 사람들이 겪어야 할 고초와 고통은 여전히 남게 된다. 결국 힘 있는 자의 방종은 주변까지도 어렵게 만드는 것이다. 마치 난폭한 운전자가 사고를 내면 애먼 사람까지 함께 죽임을 당하는 것처럼.
제법 잘 지어진 전각에 살고 있는 벽송사 목장승들은 오늘도 무심한 표정으로 서 있다. 그러나 무심한 표정 속에는 의미심장한 설화의 교훈이 고스란히 서려 있다. 그래서인지 장승들이 무엇인가 말을 하려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이곳의 목장승들이 자신을 바라보는 이 나약한 민초에게 이야기하려는 것은 무엇일까. 혹시 옛날 자신들이 변강쇠라고 하는 포악한 권력자로부터 고초를 당했던 시절, 이를 힘을 모아 극복했던 경험담을 조곤조곤 들려주려는 것은 아닐까.
이른바 ‘잃어버린 10년’이 다수 민초들에게는 어느덧 ‘꿈만 같았던 10년’으로 바뀌어 다가오는 이즈음, 벽송사 목장승을 뒤로 하고 절문을 나서는 나그네의 발걸음은 점점 무거워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