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故) 병고(丙古) 고익진(高翊晉) 교수. 그는 지병으로 천수를 다 누리지 못했으나, 한국불교학의 역사에 큰 족적을 남겼을 뿐 아니라 지금까지도 한국불교 전체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불교학자이다. 단순히 학문에만 머문 것이 아니라 수행과 신행에도 남다른 업적을 남겼다.
1981년 그가 처음 발간한 〈한글 아함경〉은 일종의 사건이었다. 이 책이야말로 한국불교에 새로운 길을 제시한 책이었으며, 아함경을 비로소 우리에게 본격적으로 소개한 첫 책이었기 때문이다. 병고 선생이 〈한글 아함경〉을 펴내기 전에 아함경은 우리나라에서 생경한 경전이었다. 물론 중요한 경전으로도 인식되지 않았다. 이런 한국불교의 흐름 속에서 부처님의 초기 말씀이 담겨 있는 아함경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체계적으로 연구하여 널리 보급한 분이 바로 병고 선생이다.
이 책이 재개정판으로 최근 다시 나왔다. 책의 이름은 원래 그대로 〈한글아함경〉(담마아카데미). 그를 따르는 후학들이 힘을 모아 보완하고 다듬어 다시 펴낸 것이다. 보완하고 다듬었다는 뜻은 그 내용에 손을 댔다는 것이 아니라 글자 크기와 배열을 현대적으로 편집해 보다 읽기 쉽고 이해하기 쉽도록 했다는 것이며, 내용 면에서도 한역 경전 자체의 오류와 뜻이 모호했던 번역 부분을 한문본·팔리어본과 하나하나 대조하여 바로잡았다는 의미다.
보통 언론사에서 책을 소개할 때 개정판은 크게 비중을 두지 않는다. 하물며 재개정판이라면 거들떠보지 않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병고 선생의 〈한글 아함경〉은 다르다. 이 책은 한국불교학계의 고전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유학과 불교학의 대가였던 고 김충렬 박사는 고전을 일러 호수에 비유한 바 있다. 수많은 산속에서 시작된 물줄기가 계곡과 하천을 거쳐 거대한 호수를 이루고, 호수의 물은 논밭이나 민가 등 다시 필요한 곳으로 퍼져나가 듯이, 그 호수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고전이라는 것이다.
한국불교계는 이 〈한글 아함경〉이라는 고전에서 부처님 가르침을 퍼올려 그 진수를 맛보고 그 맛을 전하거나 나누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병고의 〈한글 아함경〉이 한국불교에서 끼친 영향의 비중이 크다는 뜻이다.
30여 년 전 〈한글 아함경〉이 발간된 후 불교학계에서도 점차 아함경의 중요성을 인식하면서 많은 연구가 진행되었고, 최근 들어서는 팔리어 원전을 번역한 아함경 전집 등 여러 종의 아함경이 발간됐다. 〈한글 아함경〉은 이처럼 한국불교가 부처님 말씀에 좀 더 집중하고, 의미를 이해하고 공부하며, 발전하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던 것이다.
〈한글 아함경〉의 또 다른 가치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기 쉽게 한 권으로 가려 엮은 ‘체계적인 편집’에 있다. 아함경은 183권, 2,085개 경으로 구성된 방대한 경전이다. 더욱이 교리적으로 가장 중요한 잡아함은 권수가 흐트러진 착간(錯簡)의 상태로 전해지고 있어 깊은 연구를 하기 전에는 그 속에 시설된 미묘한 교리적 체계성을 살필 수 없게 되어 있다. 병고는 바로 이런 쉽지 않은 문제들을 오랜 사유와 연구를 통해 체계화시켰다. 그는 아함경을 연구하면서 아함경에 기록된 부처님의 말씀에 일관된 체계성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병고는 아함경을 12처에서 12연기에 이르기까지 부처님의 사유체계에 따라 한 권으로 편집했고 이 결실을 책으로 엮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한글 아함경〉을 읽어 나가면, 마치 부처님의 설법을 직접 듣는 듯한 생생한 기쁨과 단계적인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병고 고익진의 제자들인 일승보살회 회원들의 한결같은 선생에 대한 존경과 애틋한 마음이 있었기에 이 책의 재개정판은 세상에 빛을 볼 수 있었다. 이들 제자들은 지난 2년 간 오로지 구도하는 자세로 한 글자 한 글자 정성을 다해 〈한글 아함경〉을 다듬었다.
짧은 생애를 살다 가셨지만, 누구도 범접 못한 거대한 족적을 남긴 병고 고익진 교수. 한 순간도 헛되이 보내지 않았던, 학문을 수행하는 마음으로 대했던 그의 활화산 같았던 생애가 남기고 간 결정체 〈한글 아함경〉은, 그래서 감히 ‘병고의 법사리(法舍利)’라 할 만하다.
벙고의 육신은 떠났으나, 그가 남긴 법사리, 〈한글 아함경〉은 남아 이렇게 새로이 단장하고 우리 앞에 다시 나투었으니, 부디 많은 불자님들께서 이 위대한 법사리를 친견하셨으면 좋겠다. 910쪽, 30,000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