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살의 길

(삽화 정윤경)
수부띠는 한 발만 더 내딛으면 지복(至福)의 피안에 발을 디딜 수 있는 장로였다. 그런데 아난다가 보기에 붓다는 아라한과를 증득한 장로들이 아라한에 더 머물러 있기를 바라는 듯했다. 아직 아라한이 되지 못한 아난다 자신은 물론 많은 중생들과 함께 가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마치 붓다는 다음과 같이 말하는 듯했다.
“거기 그대로 있으라. 수부띠 장로는 도와야 할 중생들이 많다.”
수부띠의 마음을 이미 본 붓다는 그의 열망을 차갑게 식혀 줄 필요가 있었다. 그래야만 수부띠는 중생들을 이롭게 하는 이타행의 공덕을 더 쌓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타행의 공덕 없이 보살이 된다는 것은 바닷가 드넓은 백사장에서 바늘 하나를 찾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아난다는 당시 붓다의 마음을 헤아리면서 5백 명의 장로들에게 자신의 목격담을 이어갔다.
<이 말을 듣고 스승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수부띠여, 주의를 기울여 잘 들어라.
보살의 길에 뜻을 둔 사람은 이와 같이 생각을 일으켜야 한다.
수부띠여, 대개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알에서 태어났건[卵生],
모태에서 태어났건[胎生], 습기에서 태어났건[濕生],
남에게 태어나지 않고 스스로 태어났건[化生],
태어났지만 형태가 있건, 형태가 없건, 생각을 지녔건, 생각을 지니지 않았건,
생각을 지니지 않았는데 생각을 지니지 않은 것도 아니건,
그밖에 산 것의 부류로서 생각할 수 있는 한에 있어서
생각한 모든 살아 있는 것들, 그 모든 중생을
‘고뇌 없는 영원한 평안[열반]’이라는 경지로 인도해야 한다.>
붓다는 수부띠에게 중생계의 모든 존재들을 열반의 세계로 인도할 것을 당부했다. 존재하는 모든 중생이란 사람뿐만 아니라 동물, 새, 나무, 풀 한 포기까지 다 아우르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었다. 난생은 알에서 태어나는 중생으로 물고기, 새, 거북이 뱀 등이었다. 태생은 어미의 자궁에서 태어나는 중생으로 사람, 축생 등이었다. 습생은 축축한 곳에서 태어나는 중생으로 꼬무락거리는 벌레 등이었다. 화생은 아무것도 없는 데서 홀연히 태어나거나 새롭게 모습을 바꾸는 중생으로 누에가 나방이 되는 방식이었다. 나무와 풀 등은 생각을 지니지 않았는데 생각을 지니지 않은 것도 아닌 중생이었다. 바위는 형태가 있지만 생각을 지니지 않은 중생이었다. 산 것의 부류라고 생각될 수 있는 중생은 귀신 등이었다. 이렇듯 생명이 있는 유정물과 생명이 없는 무정물을 다 열반으로 인도하라고 하니 보살이 되는 길은 참으로 지난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 같은 살아 있는 모든 존재들을 영원한 평안으로 이끈다 해도
실은 누구 하나라도 영원한 평안에 인도되어 들어온 것은 아니다.
어째서 그런가?
수부띠여, 보살이 ‘살아 있는 것들[衆生]이란 관념’을 갖는다면,
그는 진실로 보살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째서 그런가?
수부띠여, 누구든지 ‘자아(自我)라고 하는 생각’ ‘개인이라고 하는 생각’
‘중생이라고 하는 생각’, ‘생명 있는 영혼이라는 생각’ 등을 일으키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보살이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난다는 붓다에게 들었던 대로 5백 명의 장로들에게 전했다. 아난다도 이해를 못 하는 것은 아니었다. 알 듯 말 듯 아리송했다. 그러나 수부띠는 바로 이해했다. 자아는 공(空)할 뿐 고정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 모든 관념은 허구였다. 살아 있는 모든 중생계가 실제로는 관념이 만들어낸 허구요 허상이었다.
수부띠는 자아라고 하는 생각, 개인이라고 하는 생각, 중생이라고 하는 생각, 생명 있는 영혼이라는 생각 등은 관념으로만 존재할 뿐 고정적이거나 불변하는 것이 아니고 실제로 존재하는 실상이 아니라고 보았다. 그렇다고 공이 아무것도 없다,라는 뜻은 아니었다. 마치 바람이 모양도 없고 잡을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아무 존재도 없는 것은 아닌 이치와 같았다. 그러니까 어떤 조건에 의해 공기가 흐름이 빨라져 바람이 되고 강풍이 되는 것처럼 열반도 비록 공한 존재이기는 하지만 누구든 붓다와의 관계 속에서는 생길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러니 보살이 누군가를 열반으로 인도하려고 이타행을 실천할 때만 열반이 실재한다는 것을 알아야 했다. 이타행이 없는 그런 아라한은 보살이라고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붓다는 ‘수부띠여, 주의를 기울여 잘 들어라.’라고 했을 것이었다. 아난다는 비로소 붓다가 말한 ‘중생을 열반으로 인도했는데도 왜 열반으로 인도되지 않았다’고 말했는지를 이해했다. 공의 입장에서는 자아도 없고, 중생도 없고, 영혼도 없고, 개체도 없기 때문이었다. 모두가 허상일 뿐 고정 불변한 것은 아니었다. 붓다도 일찍이 쌋짜까 니간타뿟따에게 ‘형색은 무상하다, 느끼는 마음을 무상하다, 생각하는 마음은 무상하다, 작위적인 행동은 무상하다 분별하는 마음은 무상하다’고 말했다. 실제로는 자아가 없기 때문이었다.
수부띠는 붓다가 자신에게 가르치는 바를 명심했다. 붓다는 수부띠에게 이심전심 상태에서 당부하고 있었다.
‘수부띠여, 잊지 말라. 그대는 중생들을 영원한 평안으로 인도해야 한다. 그렇다고 중생들의 실상이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중생들에게 어찌 고정불변한 실상이 있겠느냐? 실상이 없다고 깨닫게 하는 노력이 영원한 평안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수부띠여, 그대가 중생들을 제도하여 그들이 공(空)을 깨달을 때 중생들은 영원한 평안으로 들 것이다. 열반으로 들 것이다. 그렇지 않고는 영원한 평안으로 인도했다 하더라도 실제로는 인도하지 못했다고 할 것이다.’
아난다는 5백 명의 장로들 중에서 순간 수부띠와 눈이 마주쳤다. 수부띠가 그에게 말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벗 아난다여, 공을 깨닫는 것이 영원한 평안으로 가는 것이오. 공을 깨닫는 것이 열반에 드는 것이오. 공을 깨달아 벗들을 영원한 평안으로 인도하는 것이 보살이 되는 길이오. 벗 아난다여, 그대가 아라한의 흐름에 든 것이 나는 너무도 자랑스럽다오. 영원한 평안의 경지인 보살의 길로 함께 가는 것이 어찌 기쁘지 않겠소.’
수부띠에게 아난다도 눈빛으로 답을 보냈다.
‘벗 수부띠여, 보살의 길로 함께 가겠다고 하니 나는 그대의 은혜를 잊을 수 없을 것 같소. 나는 그 은혜를 다른 벗들에게 공을 일깨워주고 영원한 평안으로 인도하는 것으로 갚겠소. 다른 벗들을 열반으로 인도하는 것으로 은혜를 갚겠소.’
그러자 수부띠가 또 눈길을 보냈다.
‘벗 아난다여, 허나 그 일이 아무리 거룩한 일이라고 해도 우리는 집착하지 맙시다. 그들을 열반으로 인도하겠는 과욕도 부리지 맙시다. 우리는 아직 구도자일 뿐 보살도 아니고 붓다가 아니라오.’
1,250명의 제자들이 모두 보살이 되기를 바라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오직 붓다일 뿐이었다. 그는 이미 영원한 평안에 든, 피안에 가 있는 선서(善逝)였다. 어서 오라고 손짓할 수 있는 분은 유일한 지복의 성자 붓다뿐이었다. 1,250명의 제자들 중에 아직 누구도 피안에 가서 이쪽을 바라보는 선서는 없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