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잔고 속에서 가을이 사라진다
정찬주(소설가)
삽화 정윤경
된서리가 내리니까 단풍나무가 다급하게 자화장(自火葬)하고 있는 것 같다. 내가 심은 나무가 아니라 씨앗이 날라와서 뿌리내린 녀석이다. 온몸으로 살고 온몸으로 죽는(生也全機現 死也全機現) 것이 바로 저런 모습일 듯하다. 아름다움이란 이불재의 저 단풍나무처럼 스스로를 불태우는 것이 아닐까. 단풍나무처럼 살고 싶은 이른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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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이 이불재 마당 깊숙이 들어와 있고, 선득한 바람이 스쳐 가고 있다. 가을이 나를 돌아보게 하고 있다. 내 삶의 통장을 열어본다. 인생잔고에서 또 가을이 또 빠져나가고 있다. 인생잔고 속의 가을이 아라비아 숫자로 0[空]일 무렵쯤, 내가 나를 지수화풍(地水火風)으로 반납할 때가 반드시 오고야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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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전라남도 화순으로 낙향한 지 23년이 됐다. 내 나이 마흔아홉 때 화순군과 보성군 경계에 있는 계당산 산중에 산방(山房) 한 채를 지은 뒤 서울을 떠났던 것이다. 나의 집필실이자 독서당인 산방은 국보사찰 쌍봉사 동쪽 골짜기에 있다.
나는 내 산방 이불재를 북향으로 옹색하게 앉혔다. 전망을 고려한다면 절 쪽 서향이 좋겠지만 천년고찰을 날마다 내려다볼 수는 없었다. 법정스님께서 생전에 이불재를 두세 번 들르셨는데, 한 번은 ‘왜 북향으로 지었는가?’라고 물으시어 그 이유를 대답했더니 ‘서향으로 지었으면 쌍봉사 경비초소가 될 뻔했소.’라고 웃으셨다.
국보 57호 철감선사 사리탑이 있는 쌍봉사는 대학시절 가끔 와서 신세를 졌던 나에게는 고향 집 같은 절이다. 그런 이유로 나는 쌍봉사에서 부탁하는 전각 안내문이나 극락전을 중수할 때 작성한 상량기(上樑記)나 새로 조성한 일주문의 상량기 등을 대가 없이 써주었다. 쌍봉사 전각 안내문과 시판(詩板)을 하나씩만 소개하겠다.
쌍봉사 호성전은 세조가 수양대군 때 쌍봉사에 온 인연이 있어 그의 위패를 봉안한 전각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해방 이후 위패가 사라지고, 지금의 모습으로 바뀐바 내가 작성한 안내문은 다음과 같다.
<쌍봉사 호성전(護聖殿)은 T자형 맞배지붕 건물로 우리나라에 유일무이한 형태의 전각이다. 원래는 세조의 위패를 봉안한 건물로 짐작되나 현재는 쌍봉사 창건주 철감(澈鑒) 도윤(道允)선사와 중국의 조주(趙州) 종심(從諗)선사의 진영을 모시고 있다. 우리나라 절 가운데 최초로 조주선사의 진영을 모시고 있는 까닭은 두 선사의 깊은 인연 때문이다.(중략)
철감선사가 조주선사와 스승인 남전선사 문하에서 함께 정진했던 시기는 825년부터 834년까지 11년 정도였으나 두 스님의 인연은 남달랐다. 철감선사 역시 중국으로 가기 전에 이미 화엄학(華嚴學)에 통달하여 남전선사와 조주선사의 신뢰가 컸기 때문이었다. 남전선사가 철감선사에게 ‘우리 종(宗)의 법인(法印)이 동국(東國)으로 흘러가는구나’ 하고 인가한 것이 그 증거이다.>
또, 눈길을 끄는 하나가 있는바 초의선사의 시를 소개한 <한가윗날 새벽에 앉아서>란 시판이다. 초의선사(1786-1866)가 최초로 쓴 시이다. 젊은 초의가 쌍봉사로 와서 금담선사에게 참선을 익히던 중 1807년 22세 때 한가윗날 새벽에 일어나 철감선사 사리탑으로 가는 대나무 숲길을 걸으며 자신의 허물을 되돌아보고 진솔하게 고백한 작품이다. 초의는 쌍봉사에서 시를 지어 해남 대둔사로 돌아간 뒤, 다산 정약용에게 엄격한 시정신과 치밀한 시작법의 가르침을 받아 훗날 선풍이 감도는 절창의 한시(漢詩)를 남겼던 것이다. 다음은 내가 번역한 시판의 시를 그대로 옮겨본다.
북창 아래서 졸다가 깨어나니
은하수는 기울고 먼동이 터온다
에워싼 산은 가파르고도 깊은데
외딴 암자는 적막하고 한가하구나.
밝은 달빛은 누대에 들어서고
바람은 산들산들 난간에서 인다
침침한 기운은 나무들을 감쌌고
찬 이슬은 대나무 마디에 흐르네.
평소 조심했으나 끝내 어긋났으니
이런 때 맞으니 도리어 괴로워라
남들이야 이 심사를 알 리 없으니
싫어하고 의심할 사이 피할 길 없네.
어찌 미연에 막지를 못 했던가
서리 밝는 지금 오한이 이는구나
보나니 동녘은 점차 밝아오고
새벽 놀이 앞산에서 피어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