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붓다

정찬주의 마음챙김 행복27

2023-10-04 (수) 06:03	정 찬주 \|

고독할지언정 고립되지 말라

정찬주(소설가)

삽화 정윤경

저녁 산책 코스는 쌍봉사를 지나 쌍봉제 임도를 타고 가면 나타나는 둑 부근까지이다. 왕복 1시간 걸리는 거리다. 아내와 진돗개 행운이도 함께 산책하는데, 행운이의 걸음이 빨라 우리도 속보를 한다. 산책은 등에 땀이 날 정도가 좋다고 하니 행운이가 밥값을 하는 셈이다.

그런데 요즘은 들녘에서 벼이삭 익어가는 향기가 고소하다. 누룽지가 알맞게 누를 때 탄내 같은 그런 향(香)이다. 향(香) 자를 파자하면 벼 화(禾)에 날 일(日)이다. 날마다 익어가는 벼의 향기야말로 농부들의 마음을 충만케 하는 행복한 무엇이 아닐까 싶다.

그러고 보니 내가 살고 있는 군명(郡名)은 화순(和順)이다. 화(和)자를 파자하면 벼 화(禾)에 입 구(口)이다. '밥이 입에 들어가야 화평해지고 순해진다'라는 뜻 같다.

* *

몸도 마음도 일에 미쳐 사는 사람을 ‘일중독자’라고 한다.

몸도 마음도 놀기에 빠져 사는 사람을 한량(閑良)이라 한다.

몸은 분주하지만 마음은 한가한 사람을 한도인(閑道人)이라 한다.

당신은 어디에 해당하는 사람인가? 어디에 해당하고 싶은가?

* *

지난 극한폭우 때 이불재 뒤안의 축대 호박돌 사이로 토사가 유출되어 불안불안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산기슭과 접하고 있어서 더 그랬던 것 같다. 호우 경보가 있는 날 밤에는 아내와 함께 아내의 도자기 공방으로 피신해 가서 새우잠을 자곤 했다.

할 수 없이 지난 9월 초에 축대 보강공사를 했다. 착한 박영주 사장을 만나 공사는 흡족하게 마무리되었다. 일기예보는 오늘부터 가을장마라고 한다. 이른 아침부터 튼실한 축대를 보니 <숫타니파타>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하늘이여, 비를 뿌리려거든 비를 뿌리소서."

<숫타니파타>의 '다니야의 경'처럼 피안과 해탈까지 가지는 않더라도 또다시 피신하지 않고 안심할 수 있으니 마음이 충만하다. 나의 행복은 가볍고 작다. 그래도 나는 소욕지족(小慾知足)하며 살기를 바란다.

* *

가을장마 때는 보통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마련인데, 오늘은 장대비가 인정사정없이 쏟아지고 있다. 교수 정년이 얼마 남지 않은 남동생이 아내와 내 점심 끼니로 팥죽을 사 오기로 했는데, 비가 너무 와서 약속시간보다 조금 늦어지겠다고 전화가 왔다. 이런 날은 손님이 뚝 끊어지므로 고립된 느낌이 들고 이불재는 적막강산이 되지만 역설적으로 글쓰기는 더없이 좋은 날이 된다. 내가 선택한 고립이므로 고독하지 않다. 나의 불가(佛家) 스승 법정스님께서는 고독할지언정 고립되지는 말라고 당부하셨다.

* *

광주에서 두 친구가 찾아왔다. 고설(古雪) 이희규 작가와 인백(仁伯) 박정권 전 교장선생이 그들이다.

1년여 만에 만난 듯했다. 시를 얘기하고, 인백의 색소폰 연주실력에 대해서 얘기했다. 나는 내가 22년 전에 작사한 <이불재 가는 길>의 악보(구자형 작곡)를 보여주고 피아노 연주가 된 녹음을 틀어주었다. 그러자 고설은 최근에 쓴 시 <범람(氾濫)>을 보여주었다.

한번 무너지면 걷잡을 수 없어

터진 뚝을 짓이기고

병사들처럼 진입해 버리면

모두가 쑥대밭이지

이 무도한 물결에 잠겨

황무지로 변해 버린 들판은

등불 없는 야밤

눈콧물도 서럽지 않다

어디에서부터 삽질을 해야 할까

범람으로 문명이 탄생했다는 신화

지금도 가능한 실화가 될까

버티고 버티다가 임계점을 못 이겨

마음의 뚝마저 무너지면

이제 산도 무너뜨릴 걸

을로 아재는

사라진 길을 터벅이며

밀어버린 머리를 쓱쓱 문지르는 것이었다.

두 친구 모두 90세 이상의 노모를 모신 입장에서 인지상정인지 어머니께 드리려고 쇠고기 꽃등심, 기정떡, 샤인머스캣 1박스를 사들고 왔다. 고맙기 짝이 없고 오늘의 만남이 얼마나 소중한 시간이었는지 어느 날 문득 추억이 증명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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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경담 2023-10-04 06:13:23

어디에 속하고 싶은가를 물어보는 질문들은 나를 당혹스럽게 만든다. 나의 사는 모습을 보면 때로는 어디에도 속해 있고, 때로는 어디에도 속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답의 항목에 ‘아무 곳에도 속하고 싶지 않다’ 또는 ‘아무 곳에 속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선택지는 없다. 뒤돌아보니 선택지에 없는 항목들은 내가 세상을 사는 방법이기도 했고, 가난의 이유인 것 같기도 해서 씁쓸하기도 하다. 고독과 고립은 이란성 쌍둥이 같기도 하다.

무상 2023-10-04 13:14:05

* 경담님! 젊은 기자이신 분 같은데, 어떻게 저렇게 유려하게 글을 쓸 수 있나 궁금하면서도 누구보다도 치열한 삶을 사시는 것 같아 존경스러운 마음이었습니다. 제 젊을 적 생각도 하면서요. 댓글을 읽다가 가난의 이유라는 말에 마음이 아파왔습니다. 만약 결혼하신 분이라면 경제적인 면에 꼭 신경써주시기 바랍니다. 여기는 자본주의 사회라는 것을 잊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안타까워서 몇년 전 제가 쓴 고백서를 보내드리오니 참고하여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주제넘은 말을 하는 것 같아 죄송하기도 하지만, 경담님의 팬의 입장에서 드리는 말씀이니 너그럽게 이해해주시길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아내가 실직했다. 우리집 살림의 유일한 대들보였던 아내가 직장을 잃었다. 경제적으로 무능한 남편을 대신해 전 생활을 책임지던 아내의 실직은 우리에게 청천벽력으로 다가왔다. 내 자신을 반성하면서 혹시 나처럼 하늘의 별만 바라보다가 시궁창에 빠지는 사람이 없도록 하는 마음에서 이 글을 쓴다.

인생의 가장 불행한 일 세 가지를 꼽으라 하면 초년 등과, 중년 이별, 노년 빈곤을 든다. 어릴 적 일찍 출세하면 오만에 가득 차서 인생을 그르치기 쉽고, 결혼 후 가정생활을 지속하다가 사별 혹은 이혼으로 배우자와 헤어지면 몸의 반쪽이 잘려나가는 고통을 겪으며. 늙어서의 가난은 인생을 비참하게 만들고 삶의 존엄을 망가뜨린다. 특히 노년은 상황을 만회할 시간이 물리적으로 없어 더욱 힘들다.
나는 똑같지는 않지만 비슷한 유형의 시간을 살아왔다. 대학 졸업 후 직업을 공무원으로 시작했으니 초년 등과에 해당하는 셈이고, 결혼 생활의 반 이상을 주말부부로 살아왔으니 중년 이별이라 할 수 있고, 늙어서는 아직도 작은 빌라에서 다섯 식구가 25년 넘게 살고 있으니 노년 빈곤이라 할 수 있다. 어찌 보면 인생의 가장 불행한 일을 다 겪으며 살고 있다고 말해도 틀리지 않다.

나는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중농의 집안에서 태어나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 없이 자랐다. 머리는 그다지 나쁘지 않아서 공부에만 매진하라고 부모가 일도 시키지 않았다. 가족 중에서 가장 많은 혜택을 받고 자랐는데 어쨌든 그것이 부모 형제에 대한 민폐였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고생 없이 자란 사람의 특징은 사람 좋다는 소리는 듣는데 악착같지 못한 단점이 있다. 가끔은 생존이 걸린 문제에서도 싸우지 못하고 쉽게 포기한다. 그리고 양보라는 이름으로 포장한다. 생활이 어려워 시민운동을 막 그만두고 나왔을 때다. 실제로 매출액의 5%를 영업 수당으로 받기로 하고 영업이사로 일하면서 계약을 성공시킨 적도 있지만 오백만 원만 받고 끝난 적도 있다. 약속대로라면 1억 원을 받아야 했다.

중학교 때 든사람, 난사람, 된사람에 대해 배웠다. 든사람은 머릿속에 지식이 ‘든’게 많은 학식이 풍부한 사람이고, 난사람은 돈을 많이 벌거나 고위관직에 올라 출세하여 세상에 이름이 ‘난’ 사람이고, 된사람은 인격이 훌륭하고 바른 참‘된’ 사람을 말한다. 선생님께서는 난사람 든사람 보다는 된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쳤고 나는 된사람이 되고자 마음먹었다. 든사람, 난사람, 된사람을 아우르는 완성형 인간이 가장 이상적인 그림인데 당시는 그런 종합적 사고를 할 수 없는 나이였다.
그래서 그런지 살아가면서 경제에 관해 큰 관심이 없었다. 따지고 보면 경제에 관심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그런 환경을 가져보지 못했던 것이었다. 고등학교를 다닐 때까진 부모 밑에서 자랐으며 고교 졸업 후에는 서울로 올라와서 결혼할 때까지 누나네 집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특히 매형과 누나는 친부모님 이상으로 나에게 잘해주어 아무런 불편도 없이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것이다.

젊었을 적 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몇 번 있었는데도 특별하게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안분지족, 청빈낙도를 입에 달고 살았다. 한마디로 아무런 철도 없는 아이였던 것이다. 대학 졸업 후 직장을 다녔으니 나름 돈도 모을 수 있었겠지만 늦은 나이에 결혼할 때 보니 정말로 돈이 한 푼도 없었다. 내가 음주가무를 좋아하지 않아서 허튼 곳에 쓰지는 않았겠지만, 어딘가에는 그리고 누군가에는 썼을 것이다.
지금도 미안한 것은 내가 그때 힘겹게 생활하는 누나 집에서 19년을 살았는데 조카들에게 용돈을 변변히 한 번도 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심지어 누나에게도 생활비 한번 주지 않았다. 나는 그 생각만 하면 눈물이 난다.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 매형 누나를 죄송해서 뵐 면목이 없다. 마음으로야 잘 모시고 싶지만 한 번도 호사를 시키지 못한 것이 늘 가슴에 남아 있다.

결혼할 때 돈이 없어 부모님이 2천만원, 두 형이 각각 1천만원 총 4천만원을 내게 주었다. 거기다 융자금 3천만원을 보태서 7천만원짜리 작은 빌라를 구입했다. 세 아들이 다 커버린 지금 우리집은 너무 좁다. 딸이 없어서 망정이지 딸에게 방 하나 주었다면 누군가는 나가 살아야 했을 것이다. 요즘은 아들만 있는 우리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때는 아들만 있어 다행이었다. 은행 이자를 매달 내면서도 융자는 갚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10만원짜리 내 집 월세를 산다고 편히 마음먹었다.
돈이 생기면 아이들과 여행을 다녔다. 한번은 아내가 3년을 고생해서 모은 돈이 천만원이 있었는데 융자를 갚자고 했다. 그때 내가 한 말이 그 돈으로 아이들과 해외여행을 가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괌으로 가족여행을 갔다. 나는 그때의 결정이 내가 가장 잘한 일 중의 하나라고 여기고 있다. 그러나 공짜점심이 없듯이 혹독한 대가를 치렀는데 원금인 융자금보다 총 지불한 은행 이자가 훨씬 많았다는 것이다.

우리는 결혼하면서 반지 목걸이 등 일체의 패물을 주고받지 않았다. 대신에 건강검진을 했다. 고기를 좋아했던 아내는 4,50대 중년 남성의 몸과 비슷하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 건강한 먹거리 운동에 동참한 계기가 됐다. 야외결혼식을 하였는데 많은 분들의 은혜를 입었다. 천연염색의 선구자라고 하실만한 분이 한복웨딩드레스를 해 주셨으며, 한양대 국악과 학생들이 공연을 했다. 학창시절부터 여전히 나에게 귀인인 친구는 5박 6일의 신혼 해외여행 경비 일체를 모두 내주었다. 내가 노인무료급식을 하는 이유도 이분들에게 은혜를 갚는 심정으로 하고 있다.
결혼 살림은 최소한으로 시작했다. 중고티브이 중고전화기를 샀다. 몇 년 후 티브이가 고장 나자 또 중고티브이를 샀다. 그런데 금방 고장 났다. 그 이후로 가전제품은 새 걸로 산다. 아이들 옷도 사지 않고 다 얻어 입혔다. 받은 속옷은 몇 번 빨고 나면 너덜너덜해져 속옷만 사 입혔다. 아내와 나는 지금까지 속옷을 제외한 외출 옷을 사지 않았다. 모두 합해 다섯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일 거다. 옷을 사 입지 않으니까 많은 사람이 입지 않는 옷을 주기도 하고, 심지어 새 옷을 사주시는 분도 계셨다. 나는 현재도 돌아가신 분의 옷을 10년 넘게 입고 있다.

경제적 어려움을 타개하고자 내가 시민운동을 그만두고 생활전선으로 뛰어들었으나 별무신통이었다. 당연한 결과였다. 경제 관념이 전혀 없는 내가 전쟁에서 승리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다. 아내가 결단했다. 건강한 먹거리 운동을 하던 아내가 공부를 해서 보다 안정적인 직장을 잡겠다고 했다. 그리고 만학의 나이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우리는 생계형 박사라고 농담했다. 그 후로 집안의 형편이 조금 펴졌다. 아이들이 꼬마일 때 오리고기를 사달라고 조르면서 엉덩이로 오리 춤을 추던 시절에서 벗어났다. 이제 아내가 실직한 지금, 우리들은 다시 혹독한 겨울로 돌아갈 것인가? 다행히도 아이들이 컸다. 막내도 고등학교를 졸업한다. 오히려 자기들은 성인이고 생존능력이 있으니 걱정말라고 부모들을 위로한다. 자식들이 고맙고 힘이 된다.

자본주의란 말 그대로 ‘자본’이 최고인 세상이다. 자본의 대표적인 것이 돈이다. 돈은 피도 눈물도 없다. 그런데 난 자본주의 세상을 너무 낭만적으로 바라보았다. 인간의 이기심을 너무 가볍게 생각하였다. 맹자를 읽을 때도 역성혁명에 꽂혔을 뿐 무항산무항심(無恒産無恒心)엔 관심도 없었다. 아니 나는 인의를 중시하는 군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무항산무항심은 일반 백성들은 일정한 생업이나 재산이 없으면 올바른 마음가짐도 없어진다는 뜻이다. 그러면서 맹자는 덧붙였다, 군자는 항산이 없더라도 항심할 수 있다.

모든 결과에는 원인이 있듯이 지금의 어려움은 모두 내가 자초했다. 첫째는 어릴 적 고생은 사서도 해야 한다는 속담이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나는 고생하지 않고 자라 돈은 쉽게 벌어지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흔히 돈은 애인과 같다고 한다. 자기를 아끼고 가장 사랑해주는 사람을 따른다. 자나 깨나 늘 생각하고 예뻐해 주어야 한다. 단순히 좋아만 해서도 안 된다. 끊임없이 노력하고 실천하고 온 관심이 향해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돈이 내게로 온다.

둘째는 경제에 대한 교육을 받지도 않았고 관심도 없었다. 세계 경제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유대인들은 13세가 되면 주식을 하면서 실물경제를 익힌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재벌들은 자녀들에게 어려서부터 경제교육을 시킨다. 자본주의 세상에서 가난한 사람이 합법적으로 최대한 빨리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은 단 두 가지다. 하나는 로또, 하나는 주식. 나는 매주 로또 한 장씩을 사고 있고, 큰아들은 내 권유로 주식을 하고 있다. 일종의 경제 교육이다.

셋째는 돈을 폼나고 우아하게 벌려고 했다. 축구 경기를 보면 매번 멋지게 득점하는 것은 아니다. 억지로 밀어 넣는 경우도 있고 심지어 자책골로 득점하는 경우도 있다. 어찌 되든 반칙만 하지 않고 득점을 많이 하면 이긴다. 그러나 나는 메시나 호날두 손흥민처럼 득점하려고 했다. 개같이 벌어 정승같이 쓰라는 속담과 달리 정승처럼 벌고 싶어 했다, 정승처럼 벌려고 하면 경기에서 이기기 어렵다. 어느 재벌은 개같이 벌면 개가 된다고 말했지만, 천민자본주의에서 현실은 녹록지 않다. 그 말은 가진 자의 여유일 뿐이다. 다만 바르게 회사를 운영해 보겠다는 의지로 받아들이고 있다. 어느 누가 개처럼 벌고 싶겠는가? 그 말을 하려면 최소한 먼저 사회제도가 공정 구도로 바뀌어야 한다.

넷째는 교조적 이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내가 일한 시민단체의 슬로건 중 하나가 땀 흘린 만큼 대접받는 사회였다. 노동의 신성한 가치를 너무 소중히 생각한 나머지 일을 해서 돈을 벌어야 옳은 줄 알았다. 불로소득에 대한 거부감이 심해 돈으로 돈을 번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다. 노동자도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면 의사와 비슷한 생활을 할 수 있는 사회가 되길 희망했다. 재산소득과 사업소득이 훨씬 막대한 부를 창출하는데도 오직 근로소득만을 고집하였다. 생산 수단을 갖지 못한 없는 자의 한계이기도 했다.

다섯째는 내 자신을 과대평가했다. 최고의 패착이다. 우선 자기의 그릇을 봐야 했다. 의상조사 법성게를 보면 우보익생만허공 중생수기득이익(雨寶益生滿虛空衆生受器得利益)란 구절이 있다. 온 세상에는 우리를 위한 보배비가 가득한데 우리는 자신의 그릇 크기만큼만 받는다는 뜻이다. 돌이켜보면 내 그릇은 간장 종지만도 못했다. 돈 없어도 항심할 수 있는 군자인 척 도인인 척 어설프게 흉내나 내고 있었던 것이다. 뱁새가 황새를 따라가려고 가면 다리가 찢어진다고 했는데, 내 꼴이 꼭 그 꼴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가난을 선택할 수 있다. 마음의 편함을 위해 생활의 불편을 감수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가족에게 강요할 수는 없다. 아내의 이해를 구할 수는 있으나 어린아이들에게는 불가능하다. 그들에게 비친 아빠의 모습은 그저 무능한 가장일 뿐이다. 아이가 커서 유학을 간다고 했을 때 또는 그런 자질을 가지고 태어났을 때 뒷받침을 못 해준다면 그것은 아이에게도 부모에게도 불행이다. 그럴 바에는 결혼을 하지 않고 혼자 수행자로 살아야 한다.

내 삶은 전체적으로 보면 실패한 삶이 아니라고 위안하지만, 경제적으로만 본다면 철저히 실패한 삶이다. 고등고시나 자격시험을 볼 때 모든 과목의 점수가 아무리 좋더라도 한 과목이 과락이면 불합격이다. 시민운동을 할 때 동참했던 변호사가 이야기했던 말이 기억난다. “나는 40세까지 돈만 벌었습니다. 이제는 시민을 위해 일하고 싶습니다.” 그 변호사는 몇 년 후 정부 고위직인 차관이 되었다.
거꾸로 나는 남들이 인정하든 안 하든 역사와 사회 앞에 당당해지려고 노력해 왔다. 그러나 40세가 되자 생활고로 인해 돈을 벌고자 시민운동을 떠났다. 경제적으로는 여전히 악전고투 중이다. 하지만 내가 선택했고, 누가 나에게 이 길을 가라고 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묵묵히 받아들이고 있다.
우리가 사는 곳이 자본주의 세상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돈은 아무런 감정이 없다.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을 가리지 않는다. 그저 자기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갈 뿐이다.

무상 2023-10-04 13:34:51

* 아랫글은 비밀글이라고 해서 올렸는데 댓글이 공개되네요~ 제발 삭제해 주세요~ 패스워드를 정확히 쳐도 틀리다고 삭제가 되지 않습니다. 관리자는 제발 삭제해주세요~ 비밀글이라고 믿고 글을 쓴 사람은 뭐가 되나요 ~ ㅠㅠ

화엄 2023-10-04 09:34:08

추석때 차례를 모시고, 언니 49재를 모시기 위해 고향가는 기차를 탓다. 참 마음이 찹찹하다. 어머니와 언니가 생존에 계실때는 만난다는 설럼을 앉고 갔는데, 세상의 무상함을 새삼 느낀다. 어느덧 내 나이 60대 중반이니, 먼저 오신 분은 먼저 가시게 되는 이치로 슬픔을 참으며 받아드린다. 90이 넘으신 어머님을 모신다는분들은 어려움도 많겠지만 부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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