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명확)
어떤 것이 바른 견해인가.
보시도 있으며, 재도 있고 또한 주설(呪說)도 있으며,
선악의 업도 있고 선악 업의 과보도 있으며,
이승과 저승도 있고 아버지와 어머니도 있으며,
세상에는 참 사람이 좋은 곳에 이르러 잘 가고 잘 향하여
이 세상과 저세상에서 스스로 알고 스스로 깨닫고 스스로 징험하여
성취하여 노니는 것이 있다고 보는 것이니라.”
<중아함 189경 성도경(聖道經)>
세속에서는 사람을 평가할 때 그 사람이 소유한 금전이나 지식 지위 등이 많거나 높을 때 우러러본다.
불교에서는 어떤 사람을 우러러보는가.
깨달은 부처님을 가장 존귀한 분으로 보듯이
수행을 열심히 하여 부처님 수준과 가까워진 사람을
참사람[眞人] 아라한이라고 하여 존경한다.
부처님은 수행을 하여 진리를 깨닫고 이를 향유하는 사람
즉 ‘진인’이라고 번역된 아라한이
좀 더 가치가 있는 존재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세상에는 이렇게 진리를 깨닫는 것에 의미를 두지 않는 생각 방식도 있다. 이러한 생각은 정견이 아니라는 것이다.
불법 수행의 가치를 알아야 하고
그러한 수행의 결과로 얻은 경지가 있다는 것을 알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경지는 현재의 생과 죽은 후의 생에 걸쳐서
가치를 발휘한다는 것이다.
“이 세상과 저세상에서 스스로 알고 스스로 깨닫고 스스로 징험하여
성취하여 노니는 것이 있다고 보는 것이니라.”
이생에서는 아무리 부자라 하더라도 죽은 후에는 쓸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이승에서의 재산은 저승에서는 쓸모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불법의 진리는
이승에서나 저승에서나 동일하게 가치를 발휘하는 것이다.
지금의 훌륭한 견해와 수행과 좋은 업은
사후(死後)에도 그 가치가 변치 않는 것이다.
그러기에 저승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정견이 아니다.
저승이 없다는 사견을 가지면
이승을 마침과 함께 모든 좋음과 나쁨 또 그 행위 결과 등이
사라진다고 생각하는 단멸론자(斷滅論者)가 된다.
그리고 단멸론자가 되면 과보를 무서워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빚을 지면 죽을 때까지 갚지 않는 편안함을 선택할 가능성이 많다. 왜냐하면 죽으면 끝이니까. 그런데 이것은 악업이다.
그리고 이러한 견해는 부처님이 아주 경멸하는 견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