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불교를 마음의 종교라고 말한다. 또 마음을 닦고, 길들이는 것을 수행이라고 한다. 붓다는 수행승들에게, 길들여지지 않고, 자제되지 않고, 수호되지 않고, 제어되지 않은 마음처럼 크나큰 불익(不益)으로 이끄는 다른 하나의 원리를 보지 못했다고 가르치셨다. 또한 길들여지고, 자제되고, 수호되고, 제어된 마음처럼 크나큰 이익(利益)으로 이끄는 하나의 원리를 보지 못했다고 설법했다.
붓다는 길들여지지 않고, 자제되지 않고 수호되지 않고. 제어되지 않은 마음을 ‘잘못 놓인 마음’으로 표현하셨다. 반면 길들여지고, 자제되고, 수호되고, 제어된 마음을 ‘올바로 놓인 마음’으로 표현하셨다.
이와 같이 마음 수행을 하는 것과 관련하여 붓다는 ‘벼이삭’이나 ‘보리이삭’을 비유로 들어 수행승들에게 마음 수행에 대해 명쾌하게 설명했다. 어릴 적 농촌에서 자란 이들은 한 번쯤 경험해 보았겠지만 벼 이삭이나 보리 이삭은 날카롭고 깔깔해서 자칫 맨살이 스치게 되면 베어서 피가 나거나 상처를 입게 한다. 이삭에 베었을 때 쓰라림은 제법 고약한 수준이다.
벼 이삭이 패는 시기는 대략 음력 칠월쯤이다. 이 무렵이면 한 해 농사의 풍흉을 짐작할 수 있다. 병충해를 입어 벼의 잎과 줄기가 검고 무성하면 풍성한 소출을 기대하기 어렵다. 그럴 경우, 농부들은 일 년 농사에 대한 기대가 무너져 한숨만 짓는다. 이런 지경에 놓인 농가에서는 아무리 귀한 손님이라도 마음으로 따뜻하게 대접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조록싸리 피거든 남의 집에 가지 마라.’는 속담이 생겨났다. 이삭 패는 시절, 흉작이 들 것 같은 집에 가서 대접을 받기는 어렵다는 이야기다.
벼 이삭이 팰 시기부터 수확할 때까지는 새떼들이 날아와서 벼 이삭을 쪼아 먹는 본격적인 시기에 해당한다. 그 피해를 막기 위하여 예전 농가에서는 짚을 묶어 많은 허수아비를 만들어 옷을 입히고 모자를 씌워 논떼의 중앙 및 각처에 세웠다. 깡통 여러 개를 긴 줄에 매달아 흔들거나 공포를 쏘기도 하고, 냄새나 빛을 번쩍이게 하는 등 농촌의 바쁜 일손은 벼 이삭 팰 때쯤 더욱 번거로워진다.
요즘은 뜸해졌지만 예전에는 추수를 마친 후에 벼 이삭을 줍는 사람들의 행렬이 논둑을 오가는 모습이 자주 눈에 띄곤 했다. 프랑스 노르망디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화가 밀레의 대표작 ‘이삭 줍는 사람들’은 석양 노을을 배경으로 벼 이삭을 줍는 농민들의 생활모습을 잘 표현한 명화이다.
(사진=픽사베이)
붓다는 이삭이 지닌 날카롭고 예리한 특성에 착안하여, 벼 이삭이나 보리 이삭이 잘못 놓이면 손과 발을 베어서 피가 흐르게 할 수 없고, 올바로 놓이면 손과 발을 베어서 피가 흐르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마음공부의 원리에 적용했다. 관련된 붓다의 가르침은 <앙굿따라니까야>에 등장한다.
“한때 세존께서는 사왓티 시에 계셨다.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벼 이삭이나 보리 이삭이 잘못 놓였다면, 손이나 발이 스치면 손이나 발을 베어서 피가 흐르게 할 수 없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수행승들이여, 이삭이 잘못 놓인 까닭이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수행승들에게 마음이 잘못 놓이면, 명지를 흐르게 하지 못하여 무명을 베어서 열반을 실현시킬 수 없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수행승들이여, 마음이 잘못 놓인 까닭이다.” - 전재성 옮김 <앙굿따라니까야> 1:41(5-1) 무명의 경(Avijjāsutta)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벼 이삭이나 보리 이삭이 올바로 놓였다면, 손이나 발이 스치면 손이나 발을 베어서 피가 흐르게 할 수 있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수행승들이여, 이삭이 올바로 놓인 까닭이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수행승들에게 마음이 올바로 놓이면, 무명을 베어서 명지를 흐르게 하여 열반을 실현시킬 수 있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수행승들이여, 마음이 올바로 놓인 까닭이다.” - 전재성 옮김 <앙굿따라니까야> 1:42(5-2) 명지의 경(Vijjāsutta)
이 경에 등장하는 명지(Vijjā)란 ‘업이 자신의 주인임을 아는 지혜’를 말한다. 무명이란 ‘업이 자신의 주인임을 모르는 무지함’이다. 누구든 마음공부를 통해 업이 자신의 주인임을 아는 지혜, 즉 명지가 생겨나면, 저절로 마음을 단속할 수 있게 된다. 반면 무지함이 커지면 자신은 물론 이웃이나 사회에도 크나큰 죄악을 짓게 된다. 올바르게 놓인 마음은 양심과 수치심이 있는 마음이고, 잘못 놓인 마음은 양심과 수치심이 없는 마음이다. 양심과 수치심은 명지를 흐르게 하여 열반으로 이끌게 되지만, 양심 없음과 수치심 없음은 자신은 물론 세상을 무너지게 한다.
<청정도론>에 따르면, 양심이란 부끄러워함에 확고한 마음이고, 수치심이란 악행을 두려워함에 확고한 마음이다. 그러므로 ‘양심 없음’은 부끄러워하지 않음에 확고한 마음이고, ‘수치심 없음’이란 악행을 두려워하지 않음에 확고한 마음이다.
몸으로 짓는 나쁜 행위 등에 대해 부끄러워한다고 해서 양심이라 하는데, 이것은 부끄러움의 동의어이다. 또한 몸으로 짓는 나쁜 행위 등에 대해 두려워한다고 해서 수치심이라 하는데, 이것은 악행에 대한 불안의 동의어이다. 양심은 부끄러워함 때문에 악행을 짓지 않는 역할을 하고, 수치심은 두려워함 때문에 악행을 짓지 않는 역할을 한다.
양심은 자기를 중히 여기고, 수치심은 타인을 중히 여긴다. 마치 좋은 가문의 규수처럼, 자신을 중히 여겨 양심상 악행을 버린다. 마치 궁녀처럼 타인을 중히 여겨 수치심으로 악행을 버린다. 이 두 가지 마음, 양심(慚)과 수치심(愧)이 세상의 보호자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