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없이 감꽃이 떨어지는 6월의 초입.

 한창 노을빛보다 붉은 석류꽃이 빨갛게 물드는 시절이다. 장마도 오기 전에 창틀에서 죽는 것은 날벌레들뿐만이 아니다. 창문이 아니라 창틀을 기웃거리는 것들은 항용 창안의 허점이나 빈틈을 노리는 눈들이다. 제 스스로들의 삶에만 충실하면 될 것을 왜 남의 창문을 엿보는 것일까? 날벌레도 아닌데.

 그래서일까? 그리 아름답지도 않은 현수막이 이 작은 도시의 우체국 옆에도, 면사무소 옆에도, 바람에 펄럭이고 있다. 한 가지의 사안을 두고 다른 두 개의 판단이 엇갈린다. 별반 정치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도대체 누구의 판단이 옳은지 알 수가 없다. 

 제 편이면 도둑도 감싸고, 제 편이 아니면 선인(仙人)이라 할지라도 살아남을 수 없는 혼돈의 연대. 하기야 임진왜란 때는 당파로 갈라진 두 개의 판단으로 하여 전 국토가 초토화되었고, 그리고 해방 후 신탁통치 때도 그러하여 종내는 남북이 갈리는 분단이 고착화되었다. 도대체 무엇이 우리를 두 갈래 철길처럼 이토록 갈라놓았는지는 알 길이 없다. 

 날벌레처럼 남의 창틀을 엿보는 사람들, 기실 그들이 사사건건 제 편을 든다고 하지만 남이야 죽든 말든 제 편 속에 숨어 자신의 입신과 양명을 챙기겠다는 얄팍한 속셈에서 비롯된 것임에랴. 실제로는 제 편도 없고 오로지 자신만 있을 뿐이다. 벌써 해방이 되고 분단이 시작된 지 한 세기가 다가오는데도 여전히 우리의 거리는 그 몹쓸 구호로 넘쳐난다. 

 분단으로 하여 세계 속의 유일하게 갈 곳 없는 섬, 이 작은 땅의 몇 푼도 되지 않는 권력을 부여잡기 위해 몸부림들을 치고 있다. 동과 서, 남과 북이 서로를 향해 삿대질을 하고 있다. 거기엔 웃음도 없고, 물기도 없다. 못나고 헛된 욕심을 아직도 버리지 못함이다. 마치 몇 백 년이나 살 것처럼.

 그러한 때. 인구가 줄어 피폐해지는 작은 소도시 상주의 면소재지 <감꽃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떫으면서도 한번 맛을 보면 잊을 수 없는 덜 익은 곶감 같은 사람. 명색은 거창하게 필자가 만나는 진불제자라는 타이틀을 달고 부정기 연재를 하지만, 작은 절의 주지스님조차도 인터뷰에 난색을 표했다. 그건 필자의 능력 부재함이 일차적 원인이기도 하지만, 작은? 인터넷 신문의 역량을 외면하는 세태의 한 단면이다. 그래서 판단해야 했다. 흔하게 고래로부터 내려오는 언어 하나.

 등잔 밑이 어둡다.

 아하, 그래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방향을 틀었다. 대상을 잘못 잡은 것이다. 진불제자가 어찌 깊은 산문에만 있고, 헛된 명망에만 있으랴. 언제나 귀하고 편한 것은 가까운 곳에 있다. 그리하면 아주 스펙트럼이 넓어진다. 

 참으로 편한 사람, 그리고 상대방을 위해 능히 거짓말을 할 줄 아는 사람, 상대의 모자람을 자랑으로 이야기할 줄 아는 사람. 그래서 그를 만나면 웃음이 절로 나온다. 정직을 가장하여 솔직한 사람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필자의 입장에서 보면 땡큐다.

 세상의 중심은 

 가족입니다.

 TV만 틀면 나오는 우리나라 광고의 주제다. 따뜻함을 미화한 정말 역겨운 말씀이다. 그렇지 않아도 제 식구, 제 새끼 감싸느라 세상의 법도마저 온데간데없는 이들에게 또다시 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다. 정말 세상의 중심이 가족이라면 우리 공동체는 어떻게 돌아가는가? 한국사변이 끝나고 남은 그 수많은 우리의 고아들은 모두 어디로 갔는가? 세상은 별반 피를 나눈 가족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몸소 실천한 세계 속의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나마 가엾은 우리의 아이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어떻게 하다가 그야말로 대박이 난... K팝이 어쩌고, K영화가 어쩌고, 아무리 떠들어봐야 우리의 현주소는 세계속의 유일한 분단국이고, 축구 운동장에서 아무리 대한민국을 외쳐봐야 아직은 대-한-민-국이 될 수 없다. 어째서 우리는 꼭 대(大)자를 넣어야만 직성이 풀릴까? 작아도 큰 나라 내덜란드나 덴마크 같은 나라들은 그런 허황한 단어들을 꿈도 꾸지 않는다. 일본을 그리 미워하면서, 필시 대(大)일본제국이라고 떠벌리던 일본을 따라가고 있음에랴. 

 부끄러움이여! 

 초라함을 감추기 위해, 못남을 감추기 위해 올인한 세월, 그것이 마침 교육열이라는 열병으로 나타났고 어느 정도의 성과는 보았지만, 작금 우리의 아이들은 유치원부터 19살 성인이 될 때까지 엄청난 입시 고문에 시달리고 있다. 한 줌도 되지 않는 학력 칸의 번듯한? 한 줄을 넣기 위해 아이들을 사지로 몰아넣고 있다. 

 나날이 시들어가는 아이들을 채찍질하여 자신들의 열등감을 채우려는 부모들이 한가득인 우리의 공동체, 그 땅의 우리가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 그래서 우리는 아이들이 없어지는 나라에 살고 있다. 아니 이미 아이들이 없어진 나라에 살고 있다. 대부분 제 자식만을 세상의 중심으로 놓고 사는 젊은 엄마들의 환심을 표로 얻고자 각 학교마다 '30킬로미터' 제한의 표지판을 세웠다. 

 그리고 부모님의 날을 제치고 어린이날을 거창하게 기념하나, 정작 결혼을 하여도 아이를 낳지 않는 불임의 나라가 되고 말았다. 

저 산벚꽃 핀 등성이에

지친 몸을 쉴까

두고 온 고향 생각에

고개 젓는다.

도피안사(到彼岸寺)에 무리지던

연분홍빛 꽃너울.

먹어도 허기지던

삼춘(三春) 한나절.

밸에 역겨운

가구가락(可口可樂) 물 냄새.

구국구국 울어대는 

멧비둘기 소리.

산벚꽃 진 등성이에

뼈를 묻을까.

소태같이 쓴 입술에

풀잎 씹힌다.

 산벚꽃이 아니라 고향 가는 길목에 핀 벚꽃이 지고도 한참 지난 초여름의 오후 꼭 안성의 도피안사(到彼岸寺) 냄새가 물씬 풍기는 카페로 들어섰다. 가히 앞에서 말한 이 나라 많은 이들의 부류에서 멀찍 벗어난 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 그리고 습관대로 바로 치고 들어갔다. 

 농협에서 업무에 분주한 그의 사진은 이미 찍어두었고, 그냥 차 한잔하자는 약속도 받아놓은 터였다. 꾹꾹 카페 밖 화단에서 먹이를 줍는 멧비둘기 소리가 시인 민영의 호곡처럼 울린다. 아직도 건재한 정미소 옆. 김포에서 이 먼 곳까지 찾아와 카페를 열었다는 공예가 안주인께서 예나 없이 맑은 얼굴로 맞는다. 

 "오늘은 시간이 좀 걸리겠어요."

 "편히 말씀 나누세요."

 매양 주문하는 아이스아메리카노를 접어두고, 밸에 역겨운 민영의 가구가락도 접어두고, 육사의 청포도 주스를 시키는데, 때 없이 그는 흑임자를 시킨다. 기실 나는 흑임자가 뭔지도 모른다. 일단 청포도 주스는 초록이고 흑임자는 검다. 일단 청포도는 달고, 흑임자는 모른다. 마셔본 적이 없으므로. 아 참, 가구가락은 미쿡을 상징하는 코카콜라의 별칭이다. 

 "이게 몸에 좋답니다."

 한 모금 마시고 빙긋 웃는 그의 이빨이 검다. 그렇게 검은 그의 별호가 포청천이다. 오늘은 더 잘 어울린다. 한때, 아니 얼마 전까지 그는 커다란 점 하나를 코 밑에 달고 다녔다. 여러 스님들과 교유하는 그에게 스님들이 절대로 그 점을 빼면 안된다고 하여 족히 십수 년을 마스코트로 달고 다닌 그 검은 점 하나. 

 "그걸 빼면 주위 사람들이 다쳐요."

 어느 스님의 그 한 마디에 그 무거운 점을 가볍게 달고 다닌 그의 성정, 생각해 보면 그때가 훨씬 좋았다. 어떤 땐 달마대사의 동생 같기도 하고, 일단 해학이 좋았다. 팍팍한 세상, 게다가 그는 누구도 따라오지 못하는 유머까지 갖췄다. 유쾌하면서도 따뜻한 말들을 구사한다. 그는 항상 단내를 몰고 다닌다. 

 감을 좋아해서일까? 

 부업으로 복숭아를 키워서일까? 

 대학원까지 농학을 전공하고, 나무에 매달린 인생, 그는 가히 이 나라 유실수에 관한한 전문가다. 유튜브를 점령한 아마추워? 농법 전문가들이 판을 치는 세상, 그는 몇 되지 않은 전문가다. 농협의 돈보다, 농협 앞의 푸르고 푸른 플라타너스를 더 사랑하는 사나이. 그 까닭은 그늘이 넓어 담배 피우기가 좋단다. 

 "처음엔 군청에 근무했지요. 새마을과."

 "새마을?"

 "그런데 자꾸 농업이 생각이 나대요."

 "농업?"

 "그래서 한 5년인가 근무하다가 농협으로 자리를 바꿨지요."

 "이제 올 정년이 12월인데.... 보람은?"

 "아이고, 농협으로 옮기고 우리 색시를 만났잖아요."

 "옳지. 무려 10살이나 어린......?"

 필자의 입에서 말로도, 글로도 표현할 수 없는 어떤 단어 하나가 맴돈다.

  도둑님.

 그렇지만 말은 하지 않았다.

 "복이지요. 그래서 함께 절에 다닐 수 있었지요."

 "어디, 절만 다니셨나?"

 "그렇지요."

 그가 대뜸 필자의 말을 알아듣는다.

 "초반기엔 매일 술이었어요. 바빴지요. 술 마시느라. 저를 찾아오는 선후배를 마다할 수가 있어야지요. 허구한 날, 골비."

 필자는 처음 그에게서 골비를 배웠다. 술을 마시고 고주망태가 되면 꼭 골뱅이처럼 웅크리는 그 형상을 두고 하는 '골뱅이'의 사투리가 '골비'다. 

 "그래도 집식구가 그걸 다 받아주었지요."

 언젠가 겨울, 밤이 깊은 시간, 예외 없이 그가 여러 사람들과 골비가 된 그 시점에 서울 서대문에서 전화가 왔단다. 전 단위 농협 전국구인 그에게 후배 몇이 서대문 본사 부근에서 곡차를 마시다가 객기를 부린 것이다.

 "지금 이 자리에 형님이 계시면 참 좋은데 너무 멀리 있어서 아쉽습니다."

 "멀다니......?"

 그리고 그는 단 두 시간 남짓 후에 서대문 그 술집으로 쳐들어갔단다. 그는 그런 사람이다. 친구가 부르면 마다하지 않는 사람, 게다가 그는 식당 술집의 계산대에 가장 먼저 서는 사람이다.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 사람들의 형편을 너무도 잘 알기에 그것이 습관화된 것이다. 

 "우리야 뭐 하는 일이 있습니까? 그들의 어려운 형편을 그저 들어주는 사람이지요. 지금이야 농부들도 형편이 많이 나아졌지만 십수 년 전만 해도 시내에서 술 한번 먹기도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그는 남상주의 포청천이 되었다. 그런 그도 아내의 성화는 당하지 못하는 모양. 결국 성형수술?을 하고야 말았다. 점 없는 얼굴이 말끔하다. 그래서 처음엔 어색했는데, 이젠 근엄한 농협의 지점장님 포스다. 그런데 오늘은 얼굴이 포청천이 아니고 이빨이 포청천이다. 그를 닮은 흑임자를 마셨기 때문이다. 그는 항상 바쁘다. 오히려 농협의 볼 일보다 농협과 관계없는 일로 그를 찾아온다. 저녁시간, 당연히 그가 골비가 될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아우님, 초파일 날은 뭐했어요?" 

 "반야사 다녀왔습니다."

 "황간?" 

 "교회 다니는 사람들도 함께 갔습니다."

 그게 그의 도량이다. 그의 품이다. 그는 다른 것은 문제 삼지 않는다. 오직 사람만을 문제 삼는다. 그의 안주인은 진불자 중의 진불자다. 자주 가는 사찰도 한두 곳이 아니다. 상주만 해도 남장사, 광덕사, 불지사, 문경의 대승사, 윤필암, 김천의 직지사, 불교 물을 조금 먹었다는 필자도 가보지 못한 인근의 사찰이 수두룩하다. 

 "그걸 다 다녀요?"

 "남장사는 원래 다니는 본찰, 광덕사는 아버님을 모셨고, 불지사는 막역한 분이 주지스님이시고, 반야사는 우리 부부가 좋아하는 문수보살님이 주석하고 계신 곳이고, 대승사와 윤필암은 아이들......"

 언젠가 그가 손수 지은 청리역 부근의 농막으로 찾아간 녘, 따뜻한 차 한 잔보다 더 따스하게 맞았던 그의 안식구 미소, 천진한 보살님의 미소가 떠올라 대뜸 또 들이댔다.

 "그러니까 두 분이 애들 잘 되라고 그렇게 줄곧 절에 다니셨구먼?" 그들에게는 아들만 둘이다. 

 그러자 그가 빙긋 웃는다.

 "그럼요. 우리 애들." 

 "응?" 

 "여기 사는 애들은 모두 우리 애들 아닌가요?"

 할 말이 없다. 그는 언제나 이렇게 사람의 말문을 닫는다. 한마디로 걸작이다. 

 "이제 정년하고 나면 뭐하실꼬?"

 "글쎄요. 이곳저곳... 우선 월정사로 달려가고 싶습니다."

 "그곳은 왜?"

 그러면서도 그 늠름한 전나무 숲 길이 스크린처럼 떠오른다.

 "편하잖아요. 저는 그래서 절에 다녔습니다. 어머니를 따라다닌 절이 처음엔 무서웠습니다. 우선 사천왕도 그렇고, 무엇보다 변소가 깊어서 무서웠습니다. 그런데 이제 아주 편합니다."

 "부처님은 어떻게 만났어요?"

 부산의 작은 아버지가 스님이시고, 고모가 스님이시고, 그래서 그는 아주 듣기 거북한 어느 종교의 모태신앙? 단어처럼 모태불자가 되었단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가장 행복하셨던 순간은 시내 상락 유치원에 다니는 우리 아이들이 사람들 앞에서 반야심경을 줄줄 외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면 과자를 사주니까 아이들은 자꾸 외웠고...... 저는 어머니가 좋으셔서 웃는 그 모습이 좋았고......"

 이야기가 이야기로 이어졌다. 웃음이 웃음으로 이어졌다. 이제 수첩을 접고, 사진도 접고, 시내 유명하다는 밥집 이야기를 하였다. 또한 어느 7080 집의 리더싱어가 긴급 서울에서 공수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번 내린 우박으로 농작물 피해가 컸다는 현실로 이어졌다. 

 하여 벌써 5시.

 농협의 마감시간이다.  

 "빨리 우리 아이들 퇴근시켜야지요. 안 그럼 욕먹어요."

 그는 그렇게 젊은 농협 직원들에게 아버지요, 오라비요, 큰 형이다. 그렇다면 이제 슬슬 마칠 시간. 무언가로 끝막음을 해야 한다. 그래서 제법 거하게 물었다.

 "불교를 뭐라고 할 수가 있어요?"

 "전 절에만 다녔지 아는 게 없어서...... 그런데도 굳이 말하자면 인연이라는 단어. 특히 경허스님을 꼽지 않을 수 없지요. 형님이 쓰신 책 있잖아요?"

 흐흐. 그렇다. 오래전, 필자 나름대로 경허스님의 행적을 기록한 적이 있다. 그게 벌써 언제던가? 아득하다. 그렇지만 그 때의 첫 기록을 그대로 다시 소환한다. 

 안성 천장사(天藏寺)의 겨울 저녁. 

 문둥이 거지 여인이 밥을 얻으러 왔다. 미친 바람은 제 갈 곳을 모르고 있었다. 그야말로 천지사방으로 흩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두 눈만 빠꼼한 여인. 온몸 전체는 피고름 범벅이었다. 여인은 부엌에 가서 동냥 통을 내밀었다. 악취가 사람들의 코를 찔렀다. 당연히 부엌문이 닫혔다.

 “어서 꺼져!”

 그러나 거지 여인은 부엌문을 잡은 채 울고 있었다. 생사의 갈림길. 거지 여인의 입장에서 보면 삶의 마지막 끈이었다. 생살을 그대로 얼려버릴 것 같은 추위. 게다가 먹을 것마저 없다면 ……. 여인은 끝끝내 한번 잡은 부엌문을 놓지 않았다. 사람들이 부엌문을 흔들었다.

 “안 가면 죽여!”

 “으으!”

 그 소란에 경허는 무서운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처절한 몸부림. 생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여인의 외마디 신음 소리를 듣고 경허는 조용히 손짓을 했다. 그 거지 여인은 처음에는 경허가 부르는 손짓을 감지하지 못하고 여전히 부엌문을 붙잡은 채 울부짖고 있었다. 아무도 자신에게 손짓을 할 사람은 없었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건 미친 사람일 뿐이었다. 세상천지에 자신에게 단 한 번이라도 따뜻한 몸짓을 해 줄 사람이 없다는 사실은 그녀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경허의 그윽한 눈빛과 마주친 여인은 황급히 달려갔다. 달랐던 것이다. 이제까지의 사람들 눈짓이 아니었다. 손짓이 아니었다. 얼굴에는 아무 표정이 없었지만 가슴에 감춰둔 불덩어리를 읽을 수 있었다. 저 사람이라면 틀림없다. 한 덩어리의 밥을 얻어먹을 수 있을 것이다. 경허는 피고름으로 만신창이가 된 그녀를 자신의 방으로 데리고 갔다. 뜨거운 눈물이 고름으로 얽은 여인의 두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것은 아무도 건널 수 없는 강이었다. 누구도 넘을 수 없는 산이었다. 그렇지만 경허의 표정은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묵묵부답 ……. 그리고 같은 밥상에서, 같은 이부자리에서 살을 맞댔다. 이야기는 필요 없었다.

 여인에게는 꿈같은 세월이 흘렀다. 몇몇 대중들의 수군거리는 소리는 경허에게 들리지 않았다. 그는 태연하게 거지 여인과 즐거운 일상을 누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육신은 차츰 병들어가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 그의 손발에 생긴 작은 염증들이 점점 온몸으로 번지고 있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난 후, 태허(太虛) 선사와 몇몇 스님들이 경허를 설득했다. 여인을 떼어버리지 않는다면 강제로라도 내쫓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별이 준비되어 있었다.

 “스님, 저세상에 가서도 잊지 않겠습니다.”

 거지 여인이 떠나면서 경허에게 한 짧은 말이었다. 거지 여인은 이제 거지가 아니었다. 내일 당장 눈 내리는 산허리쯤 어디에서 얼어 죽는다 해도, 아니면 비 내리는 저잣거리 어디쯤에서 굶주림으로 목숨을 마친다 해도 그녀는 더 이상 거지가 아니었다. 육신이 무너진 어떠한 순간에도 비로소 자신이 다른 사람과 똑같은 인간임을, 한 인간으로서의 자각을 하게 된 것이다.

 그것이 거짓이든 거짓이 아니든 문둥이 여인을 품에 안은 이 이야기. 어쩌면 너무나 유명한 이 이야기 하나로 경허는 자신이 맡은 소임을 다했는지도 모른다. 인간이 인간을 사랑하는 방법. 인간이 인간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슬픔. 그가 가지고 있던 그 무서운 구도(求道)가 사실은 ‘어떻게 인간을 사랑함으로써 인간을 극복할 수 있는가’에 놓여 있었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 후 그에게는 고통이 왔다. 그 여인이 남기고 간 피부병은 눈을 감는 날까지 그를 떠나지 않았다.

 “닭똥으로 소주를 다려 개고기와 곁들여 드십시오. 반드시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확실하지는 않으나 이것이 발단이 되어 그의 주량(酒量)과 육량(肉量)은 무서울 정도로 늘어갔다. 전국을 가리지 않고 동분서주하며 선풍을 진작시킨 그가 갑자기 유랑 행각에 나선 것은 그의 나이 쉰여섯 살 때였다. 월정사와 석왕사의 법문을 끝으로 그는 절에서 영원히 자취를 감추고 만다.

 1886년 그는 문득 환속하여 박난주(朴蘭州)라 개명하였고, 함경도의 두메 삼수(三水), 갑산(甲山), 장진(長津)을 떠돌며 때로는 마을 아이들의 훈장으로, 때로는 유랑 걸인으로, 때로는 많은 선비들과 시정을 나누는 유한시인으로 남은 생애를 보냈다. 그리고 그의 나이 예순네 살, 법랍 쉰여섯 살에 홀연 열반에 들었다. 1912년 4월 25일 새벽 갑산에서였다.

 "경허스님 같은 분이 다시 나올까요?"

 검은 얼굴로.

 빙긋.

 오히려 그가 내게 묻는다. 난감하다. 경허스님이 열반한 그 후에 우리 곁에 왔다 갔다는 몇몇 부처님 같은 스님들이 있다고 하지만...... 글쎄다. 하기야 지금도 우리가 모르는 진불제자들이 어디 한둘이랴. 꼭 경허스님처럼 이어야 부처님 제자는 아닐 터, 참으로 진불제자는 그저 말없이 일상 속에서 부처님을 따르며 실천하는 사람들이 아닐까? 선이 어떻고, 수행이 어떻고, 또한 깨달음이 어떻고 하는 허망한? 그 모든 행위는 그저 뜬구름과 같은 것이 아닐까? 

 이제 그는 농협인이라는 이름에서, 농업인이라는 이름의 열차로 바꿔타려 한다. 바라기는 그 열차의 차창 밖을 바라보며 더 많은 여객(旅客)들과 다시 골비가 될 수 있기를, 또다시 바라기는 그 여객들과 젊은 싯타르타의 길로 함께 걸음 하기를! 

 뿌우욱 

 뿍뿍!

 짧지도 길지도 않은 차(茶) 시간을 모두 마친 녘. 청리역에서 영주로 가는 기적이 울린다. 아니면 반대로 청리역에서 김천으로 가는 기적이 울린다. 과연 그는 상하 어느 방향의 열차를 탈 것인가? <감꽃카페> 화단에선 그 기적소리에 놀란 일찍 핀 코스모스가 조용히 떨고 있다.  

 사르륵.

 사르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