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속의 눈’이 있고 ‘귀 속에 귀’가 있다
정찬주(소설가)
삽화 정윤경
주최측의 사정이 생겨 서울 조계사 강연 대신에 이불재에서 미리 촬영한 영상강연을 생중계했다. 비대면 오프라인 강연이 된 셈이다. 주제는 소설 《아소까대왕》을 집필한 동기, 인도답사, 숨은 일화 등을 집필작가로서 자연스럽게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독자들이 궁금해할 만한 것들을 들려주고자 하는 강연이었다. 인사동 연화정에 있었으므로 나는 생중계한 강연을 일부분만 보았는데, 동시접속자는 50명 안팎인 듯했다.
연화정 이후 시간은 이태원 리움미술관으로 이동해 '조선백자전'을 도예가인 아내와 함께 보았다. 아내가 이불재에서 입장권을 며칠 전에 예매하여 오후 4시부터 조선백자들을 감상했다. 어떤 작품은 나를 압도했다. 작품이 조선후기로 내려올수록 도자기 특유의 발색(發色)과 형태, 그림 등등 그 아름다움은 떨어지는 듯했다. 도자기 감상자 및 사용자가 상류 지배층에서 중하류 평민층으로 널리 퍼지면서 예술성보다는 당장 사용해야 하는 실용적인 수요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도자기의 그림도 마찬가지였다. 궁중화원과 일반도공은 현격한 실력차이가 날 수밖에. 왕실에서 관리한 관요(官窯)와 도공들이 일반평민을 상대로 장사한 민요(民窯)의 차이인 것도 같았다. 다만 아쉬운 점은 수준이 들쑥날쑥한 백자들을 너무 많이 전시하고 있어서 예술적 완성도가 탁월한 작품이 상대적으로 묻혀버린 듯했다. 무엇이건 많아지면 천해지는 것이 아닐까. 빼어난 작품이 귀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만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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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나는 오전 8시에 윤재웅 동국대 총장 부부와 서울 목동을 출발하여 오전 11시 30분쯤 통도사 입구에 도착했다. 동국대 출판문화원 대표와 팀장을 산문 앞에 있는 모식당에서 오후 1시에 만나기로 약속했으므로 시간적인 여유가 좀 생겼다. 나는 그사이에 통도사 산내암자 중 하나인 극락암을 참배하자고 제안했다.
극락암은 자비로운 경봉 큰스님께서 주석하셨던 암자였는데, 나와도 인연이 지중했다. 경봉 큰스님의 일대기 장편소설 《야반삼경에 촛불춤을 추어라》(전2권)를 집필하는 동안 여러 번 찾아가 취재했던 암자인 것이다. 경봉스님의 친근한 화두가 먼저 떠올랐다.
"극락에는 길이 없는데 어떻게 왔는가?"
경봉스님께서 질문하면 각자 근기에 따라서 대답했을 터. 당시 극락암 암주 명정스님께서 경봉 큰스님의 처소인 삼소굴에서 하룻밤 잘 수 있게끔 배려해주셨던 일이 어제의 일인 듯 생생하다. 그때 나는 삼소굴에서 하룻밤 자고 난 뒤 아침에 경봉 큰스님의 가사장삼 속으로 들어갔다가 나온 듯한 체험을 했던 것이다. 아무튼 그 뒤로 소설이 술술 풀려 원만하게 마치고 한두 달 만에 김영사에서 출판했던 것으로 기억난다.
극락암을 참배한 뒤 예정대로 동국대 출판문화원 팀과 유쾌한 점심을 했다. 그런 뒤에야 부산 도림원에서 휴식 겸 차담을 하고서 안국선원으로 이동해 수불스님을 기다렸다. 오늘의 목적지에 온 셈이었다. 윤재웅 총장이 수불스님을 뵙고 싶어 해서 내가 중간에 다리역할을 했기 때문이었다.
시종 화기애애한 차담을 보니 수불스님과 윤 총장의 관계가 호의적으로 발전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수불스님께서 동국대에 물심양면으로 큰 도움을 주시기를 바라며 나 역시 예를 갖추면서 최선을 다해 말씀드렸다. 특히 윤총장의 부인이 수불스님께 간화선 공부한 이야기를 하면서 진심이 오가는 계기가 되었다.
"청력을 상실해가는 절망적인 상태에서 간화선 공부를 했습니다. 공부 중에 스님께서 '소리를 귀로 듣는 게 아니다. 마음으로 듣는다.'고 하신 말씀에 용기를 얻었습니다."
옆에 계시던 안국선원 무량심 신도회장께서도 고개를 가만히 끄덕이시면서 감동이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안국선원에서 채식 저녁공양을 하고 이불재로 향했다. 서울에서 부산, 그리고 이불재까지 무려 7백여 km의 장거리였지만 견디지 못할 만큼 피곤하지는 않았다. 나이 70을 넘긴 탓인지 약간은 고단했지만. 대의명분이 있는 강행군이라는 생각에 고단함이 덜했던 것 같다.
윤총장 부부가 하룻밤 머물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신 쌍봉사 주지 증현스님께도 감사를 드려야 할 것 같다. 분명 윤 총장 부부는 구산선문 중 사자산문의 초석을 닦았던 철감선사의 정신이 깃든 쌍봉사에서 상서로운 기운을 받았을 것이라고 믿어진다. 윤총장 부부가 좋은 생각으로 살고 있기에 그렇다. 생각이 말을 낳고 말이 습관을 낳고 습관이 운명을 낳는다는 경허스님의 말씀이 가슴에 또 새삼스럽게 스며드는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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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여름 같은 날씨가 이어지고 있다. 고온에 세찬 비가 잦은 것이다. 초기경전 <숫따니빠따>에 '비를 뿌리려면 뿌리소서'라는 구절이 가끔 떠오를 때가 있다. 무슨 일을 마치고 난 뒤 마음이 충만해 있을 때이다. 마침 어제 저녁시간에 고추와 토마토, 오이 모종을 텃밭에 심고 아욱씨를 파종했는데, 지금 비가 내리고 있다.
우산을 쓰고 텃밭을 둘러보니 지난주에 미리 심은 상추모종과 어제 이식한 모종들이 이사 온 환경에 적응하려고 기운을 내고 있는 듯하다. 모종들에게 적기에 내리는 이 비는 비타민 같은 단비일 것이다. 모종들이 풋풋하게 잘 성장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모종을 저녁시간에 심은 이유는 손님이 약속시간보다 늦게 온 바람에 오후 5시쯤 아내와 함께 보성군 회천면 바닷가로 나가 바지락을 사왔기 때문이다. 이불재에 도착하자 오후 7시였다. 살아 있는 바자락들이 시식시식 꼬물거리면서 내는 소리를 처음 들었다. 둥그런 고무 통에 든 바지락을 해감시키려고 바닷물을 넣어두었는데, 바지락을 깨끗하게 씻고 냉동고에 저장하는 일은 아내 몫이다.
나는 나대로 아내는 아내로 어제 할 일을 다 하고 빗소리를 들으면서 뿌듯한 마음으로 은근히 즐기는 이른 아침 시간이다. 어제 할 일을 오늘로 미루었다면 갖지 못할 맑은 복, 정복(淨福)인 것이다. 인과(因果)나 인연이란 크든 작든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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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째 이불재 앞뜰에 보라색 자주달개비꽃과 노란 창포꽃, 붉은 작약꽃이 초여름 문턱인 6월을 부르고 있다. 그러자 앞산 뒷산에서는 꾀꼬리가 노래하고 이따금 뻐꾸기와 검은등뻐꾸기가 추임새를 넣고 있다. 어미꾀꼬리가 아기꾀꼬리에게 노래하는 법을 가르쳐줄 때이기도 하다. 나는 아직도 그 소리를 잘 구분하지 못하지만 음감이 뛰어난 차밭농부는 잘 짚어낸다.
꽃의 개화와 새들의 노랫소리는 서로 인과관계가 있는 것 같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소멸하므로 이것이 소멸한다는 부처님의 인연법이 떠오르는 것이다. 시인은 대상을 '눈 속의 눈' '귀 속의 귀'를 가지고 보고 듣는 영감이 발달한 사람이므로 내 말에 공감하리라고 믿는다.
대학시절 나에게 '시창작론'을 가르치신 미당 서정주 선생님의 시 <국화 옆에서>를 다시 외어본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에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미당은 우주의 전언 즉 소쩍새의 울음과 천둥, 무서리를 '눈 속의 눈', '귀 속의 귀'로 듣고 그 사연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미당의 새벽 같은 경이롭고 신선한 시를 대학입시 수험서들은 얼마나 늙게 만들어 버렸는지! 시인이 노래하는 우주의 전언은 사라져버린 채 하나의 아름다움을 만들기 위해 소쩍새의 슬픔이 있었고, 천둥 같은 울음이 있었고, 무서리 같은 몸서리침이 있었다고 해설자의 소견 내지는 지식으로 평이한 단면적인 시가 되고 만 것이다. 머리로 해석을 함으로서 새벽의 시가 가슴으로 들어오지 않고 눈앞에서 녹슬고 늙어버린 것이다.
'내 누님 같이 생긴 꽃이여'를 젊음의 시련과 고통을 뒤로하고 편안한 아름다움이여, 라는 시구 해설도 나는 그저 진부하기만 하여 아쉽기 짝이 없다. 내 눈에는 번뇌가 보리이듯 고통의 자리를 행복의 자리로 치환시켜버린 깨달음의 보살로 비치는 것이다. 하여 나는 '환희의 송가'인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를 외지 않을 수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