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이를 위하여 29
(©장명확)
“이런 짓 하지 말라구 했지?”
아무 감정 없이 말하기 위해 될 수 있는 대로 짧게 말했다.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눈물로 얼룩진 뺨만 가린다면, 운동화에 한껏 모자를 눌러 쓴 그녀는 언제나 멋쟁이 아가씨다. 산에서 함께 투쟁을 할 때도 한 번도 맨 얼굴을 보인 적이 없다. 산초를 짓 빻아서, 혹은 산수유 열매의 진액을 머리칼이나 얼굴에 바르는 그녀였다. 그것 때문에 몇 번이나 선배 동료들로부터 경고를 받았지만 누구도 그녀를 막을 수는 없었다.
“이러지 않으려고 했어요. 갈방산에서 죽은 줄 알았어요.”
의외로 표정을 바꾼다. 그리고 살림들을 살폈다. 이곳저곳 어지럽게 널려진 내 사물들. 보여주기 싫다.
“빨리 내려가!”
그러나 그녀는 가져온 보따리를 풀었다. 나무 찬합에 켜켜로 쌓인 반찬들……, 색색으로 화려한 음식. 하얀 쌀밥에서 김이 올랐다. 백천사에서 마련했을 것이다. 성냥을 들었다. 그러나 그녀의 손이 슬그머니 담배를 뺏어든다. 그녀의 하얀 손, 그녀를 생각하면 언제나 그녀의 둥근 얼굴보다 가늘고 긴 손이 먼저 생각난다. 그녀의 손이 내 손에 닿는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지려고 하는 걸 억지로 참는다. 난 자나 깨나 그녀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만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조금 있다가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내려가.”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이거 드시면 내려갈게요. 정말이에요.”
그녀가 아직 온기가 가시지 않은 더운물을 내밀었다. 얼굴을 찡그렸다. 이상한 일이다. 조금도 싫지 않으면서 고개를 돌린다. 그녀가 수저를 들어 내 입에 밥을 퍼 넣었다. 못할 노릇, 까닭 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한 숟갈의 밥과 반찬, 그러나 두 숟갈을 넘기지 못하고 왝왝거렸다.
“나중에 먹지.”
“지금요.”
목소리가 너무 간절하다. 다시 한 숟갈의 밥과 한 젓가락의 반찬……, 따뜻한 물, 떠먹이는 그녀의 정성 때문인지 아까보다 한결 부드럽게 넘어간다. 그러나 그녀가 바라는 대로 많이는 먹을 수 없다.
“몸이 차서 그래요.”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여긴 언제나 따뜻해. 저기 화덕 좀 보라구.”
그건 사실이다. 입구를 거적 데기를 막고 화덕에 숯을 피우면 아무리 추운 날씨에도 끄떡없다. 경묵이가 만든 나무 침상이 진시황의 침실보다 더 편안하다. 게다가 이불도 얼마든지 있다. 아마도 경묵이는 이불 한 채 밖에 없을 것이다. 자신이 덮으려고 이불을 새로 살 사람도 아니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좋아요. 내가 와서 살고 싶을 정도로…….”
그러나 여전히 몇으로 갈라지는 음성. 왱왱! 동굴 밖에서는 가랑잎이 바람에 날리고 있다.
“물은?”
“조금 내려가면 샘이 있어. 나하고 경묵이 하고만 아는 샘이지. 하기야 나하고 같이 사는 다른 짐승들도 알지.”
“동굴에 물도 없고 습기도 차지 않는 게 이상해요.”
“자연 동굴이 아니거든.”
“그럼요?”
“사람이 만든 동굴이지. 눈에 띄지 않게 이렇게 파놓은 거지.”
“이렇게 산을 파서?”
비로소 그녀가 평상으로 돌아왔다. 처참했던 왜란 때 얘기는 하지 않기로 했다.
“설명하자면 길지. 하여간 천혜의 도피 장소지. 이곳은 항상 비지 않는 곳이야. 누군가는 이곳에서 살아가고 있지. 세상에서 버림받은 나 같은 사람이 어디 한둘이며, 또 잠깐 사람이 없으면 짐승들의 소굴로도 아주 적격이지. 살아 숨 쉬는 터야.”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너무 많은 반찬을 한꺼번에 맛본 것이다.
“스님 만났어?”
“오늘 새벽에 도착했어요.”
“이건 날 도와주는 게 아니야. 잘 알면서.”
“할 얘기가 있어요.”
“해.”
“여기서는 할 수 없어요.”
그녀가 내 외투를 집어 들었다.
“내려가자구?”
“그래요. 우리 같이 내려가요.”
무슨 까닭인지 목소리가 한결 밝다. 그러나 그녀의 눈엔 여전히 눈물이 고여 있었다.
“……?”
그녀는 백천사에서 가져왔을 작은 연등을 두 개 들고 있었다. 노란색, 흰색.
“웬 연등? 신의주 생각나서?”
“…….”
그녀가 쓸쓸하게 웃었다.
“산 생활할 때도, 집 생각나는 동지들이 낙엽 등을 만들어 물 위에 띄워보냈어요. 가족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깨알같이 적어서……. 그것 때문에 경찰의 추적을 받기도 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렇게라도 하지 않았으면 견딜 수 없었을 거예요.”
충분히 이해가 가고도 남음이 있다. 흔적을 남기고 싶어 하는 인간의 헛된 욕망, 그러나 아름다운 모습, 그 순간 내 머릿속에는 줄줄이 열을 지어 떠내려가는 가엾은 동지들이 만들어 띄운 조각배, 나뭇잎들이 떠올랐다. 오죽하면 종이가 없는 곳에서는 나무판에다가 가족들의 이름을 새겼을까?
“얼른 옷 입으세요.”
아까까지의 삐걱거림 없이 선뜻 일어섰다. 이상하게도 몸이 말을 듣는다. 그 옛날처럼 몸이 가볍다. 그녀와 함께라면 이 세상 어디든 갈 수 있을 것 같다. 이상한 날이다.
“연등을 띄우러 가자 그 말이지?”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미리 준비해 온 바랑에 먹다 남긴 도시락을 넣고, 조심스럽게 대나무로 얽은 연등을 넣었다.
“낙동강? 아니면 남장사?”
그녀는 입버릇처럼 남장사를 가자고 했다. 나는 스님에게 받은 조선 한시집(漢詩集)을 그녀의 바랑에 집어넣었다. 그러니까 11월의 아침……, 저녁이면 낙동강변 어디에도 우리를 재워줄 집은 없다. 수상 냇가의 끝, 낙동강 어귀에 다다르면 우리가 어둠에 완전히 갇혀버릴 것은 뻔한 일. 도대체 무슨 이유로 나를 끌고 낙동강으로, 남장사로 가려고 하는지 종잡을 수가 없었지만, 신발 끈을 졸라맸다.
너무도 맑은 햇살. 청리산을 넘어 낙동으로 가는 길은 이미 익숙한 길. 숯을 굽던 아버지는 언제나 청리산 정상에서 숯을 만들어 낙동 장에 내다 팔았다. 아버지와 걷던 길. 그때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좁은 길, 색색으로 물든 숱한 나뭇잎들, 기러기 떼가 행렬을 지어 어디론가 날아가고 있었다. 지게를 진 아버지와 함께 청리역으로 걸어가던 그 겨울날, 아버지는 연신 뒤를 돌아보았지만 나는 상상도 되지 않는 서울을 그리고 있었다. 그것이 불씨가 되어 고향과 영원한 이별을 하는 줄도 모르고. 그때 처음으로 기차를 보았다. 그리고 그 기차를 타고 어디로든 떠나야겠다는 열망을 품었다. 청리산에서 낙동리로 내려가는 울창한 숲. 우리는 손을 잡고 마을을 향해 내려가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을 자꾸 쳐다보았다. 어쩌면 그녀의 얼굴이 내 어머니의 얼굴과 닮아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그녀가 내 손을 꼬옥 쥐었다. 우리는 몇 개의 언덕을 지났다. 물론 인적이 드문 길만을 골라. 군부대가 있는 알량 쪽의 길을 피하느라 몇 개의 못도 건넜다. 나에겐 둘둘 말린 공책이 있었다. 어디서 건 끄적거릴 수 있는 유일한 나의 무기. 우리 뒤를 쫓는 사람은 없어 보였다.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군화 끈을 졸라매면서 들었던 불길한 생각. 그녀와 함께 마을로 내려간다면 이곳에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 나는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곳보다 더 깊은 곳, 아니면 이곳보다 몇 배나 얕은 곳, 그곳에서 보내게 될 그녀와의 시간을 가늠하고 있었다.
무려 한 시간 이상을 걸어왔을 때 비로소 멀리 낙동리와 하운리가 보였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낙동 쪽으로 내 손을 잡아끌었다. “오늘은 전적으로 그녀에게 맡기는 거다.” 그녀는 투쟁 경력자답게 잘도 걸었다. 낙동으로 가는 길. 우리는 소풍을 가고 있었다. 손을 잡았다가 놓고, 놓았다가는 다시 잡았다.(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