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이를 위하여 28
(©장명확)
“그게 남로당 입당 원서였어. 거역할 수 없었지. 그녀는 새벽에 떠날 때까지 내게 한 마디도 하지 않았어. 내 이름을 적고 손도장을 받고는 그림자처럼 사라졌지. 난 그때 남로당이 무얼 하는지 알 수도 없었고……, 설사 가미가제 특공대에 가입하라고 해도 별 수없이 손도장을 찍었을 거야. 나 때문에 스님 모르게 절에 온 것이 확실했거든. 그녀에게 내가 필요하다면……, 남녀를 떠나서 나를 그렇게 믿어주는 사람, 그녀가 처음이었어. 목숨이 열 개 있다면 열 개 다 내놓았을 거야. 그녀가 떠난 이후로 불경이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지. 꼭 한 달 만에 그녀는 다시 내 방을 찾아 들었어. “서울로 가셔야겠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지. “내가 필요해요?” 이번에는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어. 내가 마을에서 죽었다고 소문이 난 것은 아버지에게도 내가 서울로 갔다고 스님이 이야기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지. 내가 무려 5년 동안 소식이 없었던 것은…….”
“쫓겨 다녔겠지.”
“흐흐, 좋은 시절이었지. 오로지 고통받는 민중들을 위해 살았으니까. 이 나라가 해방이 되지 않았다면 행복하게 죽을 수 있었을 거야. 흐흐, 그 해방이란 것이 나를 이렇게 바꿔놓았어. 조국이 해방만 된다면 죽을 수도 있었는데……, 이제 끝났어. 아무도 통일을 바라지는 않으니까.”
나는 일부러 경묵이를 향해 눈썹을 한번 위로 밀어 올렸다가 싱긋 웃었다.
“그러면 왜 그 얌전이라는 처자하고 혼인하지 않고 내 누이하고 혼인을 했나?”
그런 식의 대화는 처음이었다.
“모르는 소리!”
“뭘?”
경묵이의 음성이 떨리고 있다.
“그만하지. 자네에게 부탁이 있네.”
“난 자네에게 부탁이 없어.”
내가 힘없이 웃어주었다.
“갈방산에 사방으로 날아간 시체들, 그 시체들을 수습해 주게.”
이번에는 내 목소리가 떨렸다.
“위험한 줄은 알지만…….”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난 그런 문제에 끼어들고 싶지 않아. 잘못해서 사람들에게 발각돼서 몽둥이로 두들겨 맞아 죽는 것이 두려워서가 아니야.”
“알고 있어. 자네 마음은……, 마을 사람들 몰래 내 뒷바라지하는 것도 힘든데……. 이젠 숯 같은 거 가져올 필요 없네.”
그는 지금도 내 겨울나기를 위해 마을 사람들 몰래 집에서 참나무 숯을 만들고 있다.
“맨 먼저 죽을 사람은 나지. 나야말로 마을 사람들에게 무참하게 몽둥이로 맞아죽어야 돼. 그 어린애들은 아무 잘못이 없어. 그저 총을 주고 나가서 싸우라니까 싸웠고, 후퇴하라니까 후퇴를 한 거야. 그렇지만 그들은 갈 곳이 없었어. 그들을 받아들여 줄 곳은 아무 데도 없었네. 차라리 인민군이라면 이북으로 도망질이라도 해 보지. 그들의 고향은 모두 이곳 상주야……, 그들을 맞아줄 집과 가족들은 모두 바람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 내가 알기로는 이곳 상주에서 빨치산들이 가장 많이 죽었어. 그런데 정작 그 아이들이 그렇게 하도록 만든 난 비겁하게도 고향 마을 뒷산에서 구차한 목숨을 연명하고 있지. 내가 붙잡히면 자네가 어떻게 된다는 것도 뻔히 알면서, 흐흐흐!”
“자네는 어떻게 무사할 수 있었나?”
“그들이 내 말을 듣지 않았어. 난 될 수 있으면 마을 쪽으로 내려와야 한다고 이야기를 했는데, 그들은 자꾸 산속으로 들어간 거지. 산길로 산길로만 얼마를 걸었는지 발은 부어서 꼭 터지기 직전의 풍선 마냥 부풀었지. 명주실을 대바늘에 꿰서 꿰맨 그들의 발을 보면……, 그래서 날 따라올 수가 없었네. 그중에 넷은 나를 따라오다가 청리 부근에서 헤어졌어. 지금 청리의 감탕골에서 꼼짝하지 못하고 있을 거야. 산 생활 경험이 없는 아이들이니까. 아마 붙잡히지 않았다면 이곳으로 올 거야. 그렇다고 너무 걱정하지는 말게. 그들의 생사까지 자네에게 부탁하지는 않을 테니까.”
“난 안 가네. 그렇게 불쌍한 아이들이 어디 한둘인가. 그러다가 정말 발각이라도 되면 우리 모두 끝이야. 난 자네 같은 사내가 아니야.”
“그곳에 영국이와 정운이가 있네.”
“……?”
경묵이의 표정이 바뀌었다.
“북으로 올라가지 않았나?”
“나도 그렇게 알고 있었지. 그런데 아니야.”
경묵이가 한숨을 내쉬었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눈빛에 말 못 할 쓸쓸함이 묻어 있었다. 그러나 원망하는 눈빛은 아니었다. 정운이와 영국이는 그냥 동무가 아니었다. 경묵이는 한 손으로 입을 막고 생각에 잠겼다. 나는 알고 있다. 설령 죽는 일이 있더라도 경묵이는 정운이와 영국이를 만나러 갈 것임을. 그것이 미안하다.
어떻게 하다가 외설리라는 깡촌 마을로 들어온 함흥 땅의 정운이 아버지, 그래서 늘 마을 아이들에게 ‘북선 애’ 라고 놀림을 받던 정운이, 녀석의 어머니는 늘 냇가의 자갈을 감자라고 했고, 모래를 쌀이라고 했다. 실성해서 날뛰는 어머니의 이름을 따서 옥순이라고도 불렸다. 난리가 나서 인민군이 마을로 들어왔을 때 제일 먼저 빨간 완장을 찬 정운, 그와 앞뒷집으로 있는 영국. 정운이가 제일 먼저 포섭한 해방 전사가 바로 영국이었다. 그들이 그렇게 쉽게 붉은 깃발을 흔든 이유는 아주 단순하고 명백하다. 변변한 땅뙈기 하나 갖지 못한 그들에게 김일성의 토지 개혁은 너무 기쁜 일이었다. 그러나 유엔군의 인천 상륙 작전으로 인민군이 퇴각할 때 그들은 가족들에게 변변한 인사 한마디 하지 못하고 마을을 떠났다. 그들이 죽인 양반 최 씨들. 최 씨 집안을 재판할 때 완장을 찬 오른팔을 힘차게 들어 올리던 영국과 정운을 생각하면 부질없는 웃음이 나온다.
나와 경묵이는 날이 새는 줄도 모르고 이야기를 했다. 하늘의 이야기를, 아니면 땅의 이야기를. 하늘의 이야기는 쉽다. 이미 가버린 사람을 이야기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땅의 이야기를 하면 손발이 떨린다. 아직 생사도 알지 못하는 동무들, 그리고 이 동굴 속에서 짐승처럼 살고 있는 나. 그래도 우리들 중 가장 행복한 경묵이는 해가 중천에 떴을 때야 비로소 마을로 내려갔다.
* *
* *
國破山河在
나라는 부서져도 산과 강은 남는다.
누구도 생각지 못한
전쟁의 참화가 휩쓸고 지나갔다.
그렇지만 청리산은,
샛말 들녘은
이런 인간의 세세한 사연에는
아랑곳이 없다.
봄이 오면 꽃을 피우고,
가을이 되면 나뭇잎이 진다.
이제는 하얗게 목덜미만 남은
오리나무와 굴참나무가
산을 지키는 겨울의 초입.
눈부신 햇살은 벌써
다음의 봄을 잉태하고 있다.
아마도 나는
다음 해 봄을 보지 못할 것이다
아지랑이처럼 솟아오르는 들찔레 순과 진달래 꽃망울들을.
단 한 번이라도 더 동굴 밖으로 나가 숨을 쉬어야 한다. 이 음습한 곳에서의 숨쉬기는 저승에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온몸이 저려 꼼짝을 할 수 없었다. 양쪽 목덜미를 타고 올라온 열기로 하여 숨을 쉬기도 어려웠다.
입구를 가로막은 거적때기 사이로 내비치는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버적버적! 그러나 긴장하지 않았다. 멀리서 점차로 가까이 들리는 그 소리를 들으면서 눈을 감았다. 경묵이도 아니고, 동봉 스님도 아니고, 그렇다고 이 동굴의 원주인인 늑대일 리도 없었다. 그렇다면……, 나는 마지막을 생각하고 있었다. 오히려 마음이 홀가분했다. 군인이나 경찰일 것이다. 마을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개처럼 끌려갈 것이다. 그러나 뜻밖에도 그녀가 굴 입구에서 나를 보고 있다.
“이곳에는 오지 말라고 했잖아.”
꾹꾹 눌러 참은 말이 나왔다. 말없이 그녀가 다가와 선 채로 나의 소굴을 바라보았다. 울지 않으려고 이를 앙다물었지만 기어이 울음을 터뜨린다. 나는 그녀를 외면한 채 담배를 말았다. 담배를 마는 손을 그녀가 움켜잡았다. 그녀는 떨고 있다.(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