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침 햇살이 아직 안개의 품에 있을 때, 강가는 풍만한 허리를 풀고 기도를 시작한다. 강가의 음부에서는 보석처럼 빛나는 망자의 횃불이 영겁의 무상을 태우고, 도도히 흐르는 드러누운 자의 기도 속으로 사람들은 몸을 담근다.

인간의 역사 속에서 기도와 무상함을 뺀다면 무엇이 남을까. 

 정찬주 작가의 대하소설 <아소까 대왕>의 첫 장을 읽으며 느꼈던 이미지다. 

 정찬주 작가의 인도 여행. 그가 붓다의 향기를 쫓아 인도를 여행하며 마주친 아소까의 석주. 폐허 속에 장대하게 서 있는 기둥 위로 앉아 있는 사자의 포효, 깨어진 기둥 표면에 고대 인도어로 새겨진 마법 같은 문장, 석주의 몸을 잃고 홀로 남아 있는 네 마리 사자의 아름다움. 상서로운 큰 코끼리 조각. 아소카 대왕이 없었다면 세계적인 종교가 되지 못한 채 인도에서 소멸했을지도 몰랐을 불교. 이후 작가는 그의 흔적을 쫓아 무려 15번의 발걸음을 인도로 향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2.

 문학작품을 읽는다는 것은, 작품 속에서 사건들에 공감하기에 계속 새로운 나를 발견해 가는 일이고, 작품 전개가 생소하기에 작가에게 계속 질문을 던지는 일은 아닐까. 

 <아소까 대왕>을 읽고 근 한 달 동안을 아소까와 동해의 한섬해변을 함께 걸었다. 부서지는 파도의 변화를, 맨발의 백사장을, 갯바위에 올라 너울대는 바다의 거대한 춤을 같이 보았다. 달빛과 별, 원색으로 빛나는 꽃들의 정원, 이국적인 도시와 사막의 냄새가 아름다운 묘사로 흘러가고, 음모와 질투가 난무하는 왕궁의 눈동자들, 수많은 죽음의 아우성들이 할퀴는 하늘의 생채기를 보았다. 그리고 마지막 식사마저 승가에 보시하는 왕과 그것을 갈아서 넣은 국을 모든 사문이 나눠 마시는 장엄한 광경도 보았다.

 “이 애벌레들이 나뭇잎을 갉아먹는다고 시녀 누나가 알려 주었어요, 그래서 애벌레를 죽이는 거예요.” “작은 새들이 까마귀를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저는 작은 새들을 위해 까마귀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무엇이 잘못입니까?”

 유년의 아소까가 새소리만큼 아름다운 산스끄리뜨어를 배우는 날, 걸음마다 연꽃이 피는 것 같은 스승 목갈리뿟따띳사와 대화를 나누는 대목이다. 이러한 아소까의 약한 것에 대한 보호의지는 칼의 양날과 같은 예언이 되어 그의 인생을 꿰뚫는다.

 왕자 독살 미수의 암투 속에서 요리 별실의 궁녀들이 산 채로 묶여 장작더미 불길에 던져질 때 그는 성 밖으로 나가 목숨을 보전해야 하는 나뭇잎이었고, 대신들의 음모로 왕위 계승자였던 왕자가 죽었을 때 그는 왕권을 바라보는 작은 새였다. 자신의 말도 안 되는 명령을 거부하는 경비대장을 손수 처단하고, 대신과 왕자들이 하나둘 죽어 나갈 때 아들의 공후 연주에 위로받는 그는 반란이 두려운 나뭇잎이었고, 벵골만 진출을 위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불교를 신봉하는 깔링가국을 정복할 때에는, 강소국을 정벌하는 제국의 이기주의가 그가 지켜야 할 작은 새였다.

 전사자의 핏물로 붉어진 다야강에서 아들의 죽음에 미쳐버린 노파와 아비를 잃고 울부짖는 아이들, 까마귀 떼를 부르는 피투성이의 시신들을 보며 아소까는 큰 충격에 빠진다. 그에게 전장의 참상은 익히 겪어 왔던 일이다. 다만 인연이 무르익어 지금 새삼스럽게 충격으로 발견된 것이다. 이제 그가 보호해야 할 작은 새는 자신이나 자신의 왕국이 아니고, 모든 이들의 기쁨이다. 

 “나의 군사들이여, 나는 오늘 애지중지하던 칼을 다야강에 버렸다. 칼은 결코 나에게 기쁨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놀라지 마라. 나는 오늘 이후로부터 칼 대신 담마(붓다의 가르침)로 세계를 정복할 것이니라. 담마는 우리 모두에게 기쁨을 주기 때문이다.”

 자비를 베푸는 성군이 되기를 눈물로 호소하던 어머니 다르마 왕비와 붉은 연꽃처럼 아름다운, 믿음이 깊은 아내 웨디사데비가 산치 동산의 사원에서 대왕을 그리며 드리던 기도. 자신과의 권력투쟁 속에서 죽은 수시마 형님의 아들 니그로다. 그 어린 사문의 짧은 붓다의 담마 이야기. 아소까가 담마의 왕이 되기까지 모사와 이간질과 살인을 서슴지 않던 두 신하, 왕이 어여삐 보려던 붉은 꽃나무를 질투해, 대나무 상자 속에서 비명을 지르며 화형을 당한 우두머리 궁녀, 순행의 길에서 만난 사문들의 부드러운 바람 같은 설법. 마지막 전쟁을 함께한 코끼리가 끄는 이동식 법당 수레. 수없이 많은 인연들이 아소까의 약한 것에 대한 보호의지로부터 자비의 씨앗이 싹트기까지 세월을 같이 했다.

“이것이 존재하면 저것 또한 존재한다.

이것이 생기면 저것 또한 생긴다.

이것이 존재하지 않으면 저것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이 소멸하면 저것 또한 소멸한다.”

 불교의 성지를 순례하던 아소까왕이, 싯다르타 태자가 붓다가 된 순간의 일성을 우빠굽따 장로에게서 듣는 대목이다. 저 문장 속에 시간과 공간과 사건들을 집어넣는다면, 그 속에서 벌어지는 화학반응은 헤아릴 수도, 짐작할 수도 없다. 그러나 보는 즉시 자명하게 알아들을 수 있는 담박하면서도 신비로운 문장이다.

 세계의 정복자들 앞에는 위대한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고, 그의 업적과 인생은 추앙받는다. 그러나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희생한 적이 없는 셀 수 없는 억울한 주검들은 어찌할 것인가. 죽음의 북소리는 이미 위대함으로 거듭나있고, 그들이 오히려 만민을 구원하려 들 때, 억울한 주검의 원한들은 구천에서도 돌아갈 자리가 없다. 세상에서 버젓이 일어나고 있는 도무지 용납할 수 없는 일들. 

 아소까와 함께 맨발로 파도의 끝을 밟으며 수없이 되뇌었던 질문이다. 바다는 기차 소리를 내며 달려와 발 앞에서 퍽퍽 엎어지고, 풍속을 거스르며 허공에 멈춰 있던 갈매기는 바람의 결 사이로 몸을 틀며 날아간다. 의미와 가치가 있고 없음에 얽매였던 삶의 아우성. 얼마나 많은 시간과 공력들을 선과 악, 천당과 지옥 사이에서 허망하게 소비해 왔던가. 저 무진의 화학반응은 의미가 아닌 것, 가치가 아닌 것의 모습으로 제 모습을 드러내고 변화해 가고 있을 뿐이었다.

 아소까는 붓다의 8만 4천 법문을 기리기 위해 마우리아 왕국 전 도시에 8만 4천 개의 사원을 건립한 승가의 보호자에서, 아들과 딸을 출가시킨 믿음의 상속자로, 탑을 세우고 석주와 바위에 붓다의 가르침과 칙령을 새겨 거꾸로 돌릴 수 없는 수레바퀴를 굴리는 담마의 정복자가 되었다. 사문의 입을 빌어 아소까에게 붓다의 가르침을 전하는 작가의 대화법은 마치 사막을 흐르는 달빛처럼 조용하고 섬세하다.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걸음마다 연꽃이 피는 것 같은 사문들의 이야기는 부드러운 바람처럼 다가온다. 그들의 설법은 깨달음을 강요하지 않으며, 어렵고 놀라운 말로 현혹하지도 않는다. 인간의 삶을 관통하는 괴로움. 괴로움이 만들어지는 이유.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그 상황과 알맞은 때에 맞춰 가장 편안한 언어로 겸손하고 친절하게 사끼야무니 붓다의 이야기를 전해준다. 

3.

 마지막 식사마저 승가에 보시하는 아소까의 긴 참회와 기도. 그것을 갈아 국을 만들어 모든 사문이 나눠 마시는 장면에서, 중도의 한 모습을 엿보았다. 연꽃이 피는 것 같은 사문의 발걸음을 따라 하게 되었고, 의미가 아닌 것들에 현혹당하지 말라는 당부의 목소리도 들었다.

 아소까와의 한 달. 영화를 보는 것처럼 생생하게 보여지던 소설 속의 장면들이 무상하게 지나가고, 강가의 기도는 동해의 바다에 중도의 만다라를 그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