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만세운동의 불씨를 만든 제주 법정사 항일투쟁의 주역 방동화 스님 이야기
방동화 스님
제주 천제연 폭포 깊숙이 성천봉 아래 풍광 좋은 터에 광명사가 있다. 이 절은 해방 후 제주불교 교무원장을 하던 방동화 스님이 창건한 것이다.
광명사 입구에는 ‘애국지사 벽담동화대종사비’가 서있다. 비문에 따르면 방동화 스님은 1887년 제주도 서귀포 대포동에서 태어났다. 방성칠의 난과 이재수의 난 등 제주민란을 눈으로 보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한라산 관음사에서 강창규 스님의 불심과 인품에 감화되어 경주 기림사에서 출가하였다. 그리고 대승사 불교 강원을 졸업하고 제주에 돌아왔다. 그해가 1918년이었다.
한라산은 상원(上院). 중원(中院). 하원(下院)으로 구분된다. 상원은 영실 아래 존자암이고 중원은 법정악 아래 있는 법정사이다. 하원은 법화사이다. 사원(寺院)의 사(寺)는 종교적 기능이고 원(院)은 게스트 하우스 역할을 뜻했다. 먼 길 가는 여행자들이나 한라산 산행이나 제천의식을 봉행할 때 중간 대피소 역할과 숙소 역할을 했던 것이다. 그때의 이름이 그대로 남아 있는 곳이 한라산이다.
그 당시 법정사에는 불학이 깊고 민족의식이 투철한 김연일 스님이 계셨다. 그들은 신도들에게 항일의식을 심어주며 독립운동을 준비하였다. 김연일 스님, 강창규 스님, 방동화 스님 세 사람은 산천단에서 의형제를 맺고 비밀유지와 거사 성공을 위해 법정사에서 백일기도에 들어갔다.
1918년 9월 거사를 위한 격문을 만들었다. ‘‥일본의 강제에 의해 조선을 탈취당한 조국의 백성은 이 때문에 큰 고통을 받고 있다. 이번에 옥황상제 성덕 주인이 나와 조선 백성을 구제해야 된다는 명을 받았다. 이때에 동포들은 마음과 힘을 합쳐 후일의 행복을 얻을 수 있도록 각 면, 각 이장은 바로 면민 장정을 모아 솔군하여 동월 3일 오전 4시 하원리 지내에 집합하라.’
(사진=제주일보)
백일기도를 마치고 법정사에서 출발한 35명의 항일투쟁 선봉대는 강정과 도순을 잇는 전선과 전주를 단절시켜 연락을 두절시켰다. 무장봉기대가 하원을 거쳐 중문에 이르니 참여자는 더욱 증가하여 700명에 이르렀다. 그들은 중문경찰서를 습격하여 물건들을 몽둥이로 부수고 문서들을 불태웠다. 강창규는 지붕의 짚을 뽑아 주재소를 불태웠다. 일본 경찰 세 명을 포박하고 옥에 갇힌 민족 투사 13명을 석방시켰다.
법정사 무장 항일투쟁의 총지휘자는 김연일 스님, 좌대장 방동화 스님, 우대장 강민수 그리고 김인수, 김용충 등은 거사 성공 기원을 빌며 법정사에 머물렀다. 이렇게 조직된 법정사항일투쟁운동은 서귀포 기마 순사 대가 총을 쏘면서 공격해오자 일시에 무너져 사방으로 흩어지며 막을 내렸다.
제주도 항일투쟁의 씨앗은 4개월 후에 3·1독립운동으로 크게 분출되었다. 조선이 배라면 제주는 닻이다. 닻을 움직여야 조선을 움직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법정사 항일투쟁에 나선 이들은 혹독한 박해를 받았다. 60명이 구속되고 그중 5명은 고문과 열악한 옥중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옥사하였다.
일제 때 항일독립운동의 중요한 축을 이루는 제주 법정사 항일투쟁은 육지에서는 배우지 않고 있다. 3·1독립운동의 불씨를 만든 주역은 김연일 스님, 강창규 스님, 방동화 스님이다. 그들의 이름을 교과서에 올려 항일독립운동의 공로를 기억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