蓮이를 위하여 14
(©장명확)
기실 나를 망하게 한 것은 공산주의도 아니었고, 박헌영도, 김일성도 아니었다. 나로 하여 완장을 찼던 많은 동무들, 나를 따르던 그 사람들이 나를 망하게 하였다. 나를 살 수도 죽을 수도 없게 만든 장본인들은 모두 나를 아끼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내게는 독약이었다. 혼자 가는 길의 편안함. 나는 그걸 알지 못했다. 모든 길은 함께 가는 걸어야만 되는 줄 알았다.
낙동 쪽으로 길을 잡았다. 비가 내리고 있다. 아주 잘된 일이다. 비를 맞으며 청리산을 넘기로 하였다. 하기야 다른 방법이 있을 수 없다. 언제나 경묵이가 오는 오리나무길 숲속을 택하지 않고 청리산 꼭대기를 돌아가기로 했다. 외설리에서 원석골 샛길을 통하면 금방 가는 거리를. 낙동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물론 우산도 쓰지 않았고, 비옷도 입지 않았다. 다만 느끼고 싶었다. 무작정 함빡 비를 맞고 싶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비가 곧바로 내 몸에 떨어지는 그 편안함을.
천천히 걸었다. 나와 똑같이 비를 맞고 서 있는 수많은 나무들, 그 늠름한 동지들을 바라보는 일은 내가 겪었던 그 어떤 일보다 행복한 일이다. 유년처럼 어두운 하늘에서 떨어지는 비를 보며 환성을 지르고는 아무도 없는 늑대 못 속으로 뛰어들었던 나 자신을 되찾는 그런 시간이었다. 메마른 땅에 금세 작은 도랑이 겹겹으로 쌓이고, 또 그 물들이 모여 작은 냇가를 이루는 모습, 그것은 아름다움이었다.
멀리 배 밭이 있고, 연 밭이 있는 외설리의 동구, 죽문이 뿌연 안갯속에서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있다. 시시각각 모습을 달리하는 대밭 속의 옛 죽문 집을 바라보면서, 잠깐 아내 임순을 생각을 했다. 눈으로 보면, 어김없이 생겨나는 괴로움, 그래서 그냥 지나치기로 했다. 청리산에서 내려온 물들로 낙동으로 가는 냇가의 물들은 벌써 많이 불었다. 아무도 없는 비 내리는 숲속, 조금은 불길했다. 그러나 다시 돌아갈 수는 없다.
냇가를 타고 내려가는 빗줄기들은 뽀얀 안개를 일으키면서 바람을 따라 흐느적이고 있다. 계곡의 물들이 모여 비교적 넓은 냇가를 이루는 낙동리 초입, 청리산의 빽빽한 나무 탓도 있고, 또한 바위들로 이루어진 계곡이라 물은 더할 수 없이 맑다. 산길로 산길로만 청리역을 향해 걸었다. 하루에 한 번 있는 경북선 시간을 맞추려면 걸음을 빨리해야 했다. 그렇다고 너무 빨리 도착하는 것도 문제다. 청리의 삼성산 기슭에서는 엉금엉금 기어서 내려왔다. 무릎이 아프다.
다행히 주위에 사람들이 없다. 비도 그쳤다. 대강 젖은 옷을 닦았다. 널따란 신작로로 나왔을 때 비로소 내가 아직 죽지 않았음을 실감했다. 청리역으로 가는 길목엔 사람들이 빽빽하다. 그들의 몸도 나와 같이 비에 젖어 있다. 닷새 장날인 것이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은 땅 위에도 장은 열린다. 살아남은 사람들을 위한.
사람들 틈바구니에 섞여 발걸음을 옮기면서 눈물을 흘렸다. 까닭 모를 눈물이었다. 청리역까지 걸어오는 동안, 혹여 아는 얼굴들을 피하기 위해 한껏 사람들을 외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혹시라도 아는 얼굴이 있지 않을까 하고 사람들을 살펴야 하는 이중고를 겪었다. 다행히 외설리에서 그렇게 일찍 장을 보러 나오는 사람은 없었다.
사거리 집.
경묵이와도, 아내와도 함께 자주 들렀던 선술집, 삼나무가 늘어선 옛 일본인 마을 끝에 여전히 자리 잡고 있다. 먼지를 뒤집어쓴 처마, 군데군데 무너진 흙담, 동그만 우물이 있던 자리는 거적때기로 덮여 있다. 우물을 지키고 있던 커다란 회화나무는 양쪽으로 찢어진 채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표지판이 있던 자리, 그러나 표목은 온데간데없다. 서울을 다녀올 때면 아내 임순이는 이곳에서 나를 기다렸었다. 몇 번이었던가. 우리의 결혼 생활이 채 6개월을 넘기지 못했으니 많아야 서너 번이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총탄 세례를 받고 갈라진 회화나무를 보자 나무 그늘 밑에서 나를 기다리던 임순이 생각이 났다. 임순이는 원래 말이 없었다. 내가 기차를 타고 내리는 청리역이 아니라 이곳에서 나를 기다린 건 사람들 눈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만큼 수줍음이 많았다.
밖으로 나가는 길은 청리역뿐이다. 들어올 때도 마찬가지다. 그럴 때면 청리역 맞은편에 있는 이곳에 들렀다. 그렇게도 맛있던 장국밥,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들어가고 싶은 충동을 얼마나 참았는지. 그곳에 들어가면 맨 구석자리에 아내가 있을 것만 같았다. 언제 내가 다시 이곳에 올 것인가. 청리역 쪽으로 늘어서 있는 용케도 살아남은 삼나무들, 그리고 사거리 집 안의 오동나무, 그것이 예사로울 수 없다.
처음 내가 기차를 탔던 기억, 그 여름날 저녁. 청리역, 역사의 이름과 플랫폼, 그리고 철로 변에 늘어선 꽃들, 어느 것 한 가지 예사롭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또 아내를 생각했다. 저 삼나무를 아내가 보았을 테고, 저 좁다란 광장에 서서 나를 기다렸을 것이다. 나는 눈물 젖은 눈으로 조그만 역사 뒤편의 창고 같은 관사를 따라 걷다가 그만 김천 쪽의 철로 변을 걷고 말았다.
이제는 나와 아무 상관이 없는 곳인데, 그 옛날에도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곳이라고 여겼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임순이도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저 구름을 보았을 테고, 이 바람의 냄새를 맡았을 테고, 뿌옇게 흐려진 철로 변의 집들을 보았을 테고, 그리고 뿌우, 뿌! 쉰 소리를 내는 기적소리를 들었을 것이고……, 그러다가 철로변 옆의 흐르는 물을 보았고, 결국 같은 청리산 기슭 아래지만 외설리의 맞은편 내서까지 걸어오게 되었다. 할아버지의 땅, 아버지의 땅, 그리고 임순이와 나의 땅이었던. 그때 왜 목숨을 걸고 만나던 그녀와 혼인하지 않고, 경묵이의 누이 임순이와 혼인했는지 아직까지 알지 못한다.
그때 경묵이는 왜 내게 그녀가 있다는 사실을 번연히 알면서도 선뜻 임순이를 내주었는지 알지 못한다. 얼굴은 한 번도 보지 못했지만 경묵이도 그녀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어쨌든 나는 임순이와 혼인을 했다……. 말이 되지 않지만 그녀를 사랑했고, 내 아내 임순이도 사랑했다. 임순이를 생각하면 호흡이 가빠진다. 눈앞이 침침해진다.
나로 인해 임순이가 겪었던 고통 때문이 아니다. 난리가 나기 전에도 마을을 떠나 있으면 항상 임순이만 생각했다. 동구 밖에 서 있던 미루나무, 임순이는 내게 그런 존재였다. 마을만 들어서면 가장 먼저 팔랑거리며 맞는 희디흰 잎사귀들. 임순이는 항상 마을에만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언제나 서울에 있었다. 그녀와는 만남만이 있었다. 신의주, 서울역, 인사동, 청주……, 그리고 산을 헤매고 다녔다. 함께 머무르지 못했다. 항상 떠돌아다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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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득하지 않은 옛날 3월.
눈이 내리고 있었다. 싸락눈이었다. 윗녘 백천사의 종소리가 울렸다. 삽짝 밖으로는 샛말 벌을 지나는 바람이 웅성거렸다. 가끔씩 청리역의 기적소리도 울렸다. 그을음 없이 타오르는 등잔, 나는 누워 있고 그녀는 앉아 있었다. 안방에서는 담뱃재를 터는 아버지의 기침소리.
윗목엔 이미 나들이옷, 양말, 모자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질척하던 마당에는 냇가의 잔돌들이 박혀 있었고, 그렇게 어둡던 부엌은 밝아졌고, 마루 기둥은 윤이 났다. 뒷간 거적은 노란 새 거적으로 바뀌었다. 모두 임순이가 집에 들어온 이후의 일이다. 나는 마을 우물가에 한 번도 가지 못했다. 아내는 내가 집 밖으로 나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 조그만 몸체에 물동이를 인 모습.
“꼭 가셔야 돼요?”
“봄에 오세요?”
그녀의 목소리는 간절했다. 그날 밤 마을을 가로지르는 도랑은 다시 얼어붙었고, 돌담 옆에 서 있던 감나무 한 그루가 얼어 죽었다. 아마도 그것이 그 해의 좋지 않은 징조였는지도 모른다. 겨울 동안 울안에 사는 것이 죽으면……,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때 그녀는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어디로 가세요?”
신의주나 평양은 가지 말라는 이야기. 그러나 나는 38선을 넘어야 했다. 내가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녀가 고개를 흔들었다.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매달렸다. 스물두 살……, 하얀 목덜미 위 낱낱 보송보송한 귀밑머리가 솜털처럼 일어났다. 나는 그때 벌써 전쟁을 예감하고 있었다.
“편지할게요.”
마지못해 주소를 주었다.
“원산?”
그러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날 밤 등잔불은 한 번도 꺼지지 않았다. 나는 어둠이 채 가시기도 전에 집을 나왔다. 아버지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고, 그녀는 부엌 앞에서 앞치마로 젖은 손을 만지고 있었다. 나는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리고 모래알 같은 싸락눈을 밟으며 청리역을 향했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