蓮이를 위하여4
(©장명확)
한보경.
그녀는 4개나 되는 이름을 달고 다녔다. 일본 경찰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해방되기 전부터 그녀는 남로당원 이었다. 남로당원에 대한 일제 검거가 실시되던 시절. 신의주역 부근에서 지하 비밀회의를 하던 중 경찰이 몰아닥쳤다. 육중한 철문이 있는 집이었다. 그 철문은 한 번 닫히면 안에서도 밖에서도 열쇠가 없으면 도저히 열 수 없도록 되어 있었다.
그런데 밖에서 망을 보던 당원 하나가 급한 나머지 서둘다가 오른팔이 끼인 채 문이 닫히고 말았다. 얼마나 문을 세게 닫았는지 안쪽의 팔과 바깥쪽의 팔이 따로 놀았다. 시간은 분초를 다투고 있었다. 한 사람이 잡히면 모든 당원들의 신상명세가 밝혀지는 것은 너무도 자명한 일. 그런데도 아무도 어쩌지 못했다. 의견이 분분했다. 그 당원을 남겨두고 달아나자는 당원도 있었고, 심지어 후환을 염려해서 아예 목숨을 끊어주자는 의견도 있었다. 그 당원은 벌벌 떨고 있었다. 그때 유일하게 여자였던 그녀가 대뜸 손도끼를 쳐들었다. 그리고는 문틈에 끼인 당원의 팔뚝을 내리찍었다. 물론 그 방안에 있었던 다른 당원들도 살아남았고, 팔이 잘린 당원도 살아남았다. 함박눈이 내리는 한겨울 밤이었다.
임순이.
가버린 내 아내다. 이 땅에 살고 있지 않은 나의 아내. 난 사람들의 눈을 피해 아내의 무덤을 밤마다 다녀온다. 아내의 무덤을 마을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아내의 오빠인 경묵이가 삼태기 두 장을 겹쳐 마을 사람들 몰래 이 청리산에 묻었기 때문이다. 나는 아내가 어떻게 죽었는지 보지 못했다. 그러나 이야기를 듣지 않아도 알고 있다. 임신한 채로 마을 사람들의 몽둥이세례를 받았을 것이다. 그나마 아내가 그 자리에서 죽지 않고 아이를 낳을 수 있었던 것은 남산만 한 배를 움켜잡고 쓰러진 덕분일 것이다. 사람들의 털끝만 한 동정, 아니면 아직 태어나지 않은 생명에 대한 두려움이 잠시나마 아내를 살린 것이다. 내가 밤이면 밤마다 삐라를 들고 평양과 서울의 밤거리를 헤매고 있을 때 아내는 편지를 보냈었다.
이곳은 편안합니다.
당분간 청리는 오지 마세요.
그러나 정작 편지에 그렇게 썼으면서도 아내는 마루에 정사각형의 신식 등잔을 내걸었다. 마을 사람들은 그 등불을 가리켜 ‘빨갱이 등불’이라고 했다. 전쟁 전에도 아내가 밤낮으로 나를 얼마나 기다렸을지 알고 있었다. 아내가 숨을 놓기까지 마루에 걸린 등불은 한 번도 꺼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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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 무성한 내 머리 위에
새들이 집을 짓고,
새끼들을 키우고,
그것이 몇 대로 이어진다면…….
눈이 내리고,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고,
천둥이 치고
번개가 일어도
꼼짝하지 않고…….
아래로 아래로
낮게 낮게 숨을 쉬면서,
수많은 생명들의 둥지로 살다가
소리 없이 목숨을 마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이제
떨어질 것은 떨어지고,
끝까지 남는 것은 남고…….
객쩍은 가을비가 내리고 있다. 앙상한 청리산에 비가 내리는 날은 움직임이 없다. 침상으로 들어가 배를 깔고 드러눕는다. 굴 안은 어두컴컴하다. 밖에 비가 내려서가 아니라 이 동굴 안은 대낮에도 늘 어둡다. 이따금 머리맡의 요강을 끌어당겨서 가래를 뱉는다. 눈 가장자리가 짓물러 있다. 손등은 얼음처럼 차갑다. 몸 안은 불덩이처럼 뜨거운데.
청리는 상주 읍에서 동쪽으로 이십여 시오리 떨어진 곳이다. 그런데도 오지. 눈 쌓인 한겨울, 청리 사람들은 도토리와 버섯과 산나물로 허기를 달래다가 나중에는 그것도 모자라 감자껍질, 메밀꽃, 콩깍지, 송기, 보릿겨, 밀기울 따위를 닥치는 대로 가루로 빻아서 콩가루에 풀거나 감자에 섞어 죽을 끓여 먹으며 목숨을 지켰다. 대부분 자기 땅을 가지지 못하고 소작을 부치는 형편에 겨울까지 곡식이 남아있질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곡식을 제 몸보다 더 귀하게 여겼다. 명절 때나 제사 때가 되면 주린 배를 참아가며 아끼고 숨겨두었던 곡식으로 쌀밥을 짓는다. 여름에 가파른 산등성이에 올라 일을 할 때에도 그들의 점심은 감자 몇 개가 고작이다.
그러나 나는 이 동굴 속에 숨어서 끼니마다 쌀밥을 먹고 있다. 한사코 거절하지만 경묵이는 자신이 일 년에 한두 번 먹는 쌀밥을 끼니마다 해준다. 그가 자주 이 동굴을 오르는 이유 중의 하나가 내가 끼니를 거르지 않을까 하는 조바심에서 인 것을 알고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어떤 땐 경묵이를 위해서 밥을 먹는다. 경묵이가 동굴 오른쪽 구석을 파서 만든 창고에는 온갖 간식거리가 있다. 감자와 고구마는 물론이고, 덜 마른 곶감이 한 접 이상이나 있다. 그러나 그걸 혼자 먹어본 적은 없다. 경묵이는 이곳에 오면 제일 먼저 내 양식 창고부터 살핀다.
백천 동굴은 거의 완벽하게 비와 바람을 피할 수 있다. 근처에는 소나무가 거의 없고 오리나무와 굴참나무가 많다. 바깥에서 흘러 들어오는 빗물을 막기 위해 동굴 입구에 동그란 웅덩이를 팠고, 그것은 유사시에 식수로도 사용할 수 있다. 바깥의 날씨가 아무리 매워도 동굴 속의 밤이 그렇게 추운 것은 아니다. 청리 선조들이 대대로 전해준 특수한 난방법이 추위로부터 나를 지켜주기 때문이다.
화투는 동굴 구석에 흙과 돌을 쌓아서 만들어 놓은 큰 화로다. 화투의 잿속에 묻어둔 불씨는 하루도 꺼져서는 안 된다. 밥을 짓거나 다른 것을 삶을 때 또는 군불을 지필 때 이 화투의 불씨가 없으면 아궁이에 불을 붙일 수가 없다. 성냥이 귀하므로 나나 경묵이는 화투의 불씨를 소중하게 다룬다.
코쿠리는 유일한 조명 수단이다. 코쿠리라는 이름은 그것의 모양이 사람의 코처럼 생긴 데서 나온 것으로 코굴이 변해서 코쿠리가 된 것이다. 동굴 입구에 연통을 세워 묻고 그 가운데에 구멍을 뚫어 관솔로 불을 밝힌다. 관솔에서 나온 연기는 연통을 따라 굴 바깥의 출입문 밑으로 빠져나간다. 그렇지만 아직 그렇게 연기 나는 관솔로 불을 밝힌 적이 없다. 그리고 이곳에서는 관솔을 구하기도 어렵다. 그래서 흰 사기 등잔에 초롱불을 쓰고 있다. 아주까리기름으로. 그러나 동굴과 마찬가지로 이 등잔의 주인도 내가 아니다.
주왕산 빨치산 토벌대에 쫓겨 경묵이와 함께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청리산에 올라왔던 첫날. 산속에서 밤을 새운 우리는 동이 트자마자 이 동굴로 들어왔다. 마을 사람 거의가 생매장 당했다는 곳, 캄캄한 밤이면 도깨비불이 반짝이는 곳, 사람들은 그것을 죽은 사람들의 원혼이라고도 했고, 호랑이의 눈빛이라고도 했다. 그래서 마을 사람 누구도 이곳을 찾지 않았다. 겨우겨우 마을에서 짐작하고 있던 백천 동굴은 뜻밖에도 바위틈이나 높은 절벽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 아니라, 청리산 정상의 후미진 구릉에 자리 잡고 있다. 한눈에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곳이었다.
우리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마을에서는 보이지 않던 동굴, 그런데 그 입구에 서자 마을이 너무도 또렷하게 보였다. 임란 때 마을 사람들은 왜군들이 이곳에 올라오는 줄 알면서도 왜 도망가지 않았을까? 혹시 더 처참한 살육을 피해 동굴 밖에 있던 마을 사람들 일부가 동굴의 입구를 막은 것은 아닐까? 정말로 살기를 원했다면 이 동굴에서 그렇게 대책 없이 죽임을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마을 사람들은 깨끗하게 죽기를 원했을 것이다. 그 생각을 하자 가슴이 울렁거렸다.
조심조심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비어 있는 곳의 냄새가 아니었다. 훈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희미한 불빛과 꿈틀대는 물체가 있었다. 직감적으로 사람의 냄새를 맡았다. 경묵이가 즉각 동굴 옆으로 비켜섰다. 나는 그냥 멍청하게 서 있었다. 경묵이의 손에는 뒤꼍에서 자른 죽창이 옹골차게 들려 있었다. 경묵이는 살금살금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후닥닥……, 송장 형상의 사람 하나를 끌고 나왔다.(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