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륵사(사진=황명라)
물욕 많은 내가 물욕 없는 그에게로 간다.
근심 많은 내가 근심 없는 그에게로 간다.
때는 정확히 2022년 8월 16일, 그래도 아직까지는 우리가 기리는 백중도 지났고, 광복절도 지났고, 말복마저 지났다. 벌써 한 해의 마지막으로 달리는 것 같아 아쉽고 쓸쓸하지만 어쩐지 깔끔하다. 세속의 분주한 날들이 지났음이다.
그래서 지금 무작정 만나러 가는 그도 분명 약간 한가할 시간이다. 누구도 믿지 않겠지만 그것도 단 몇 시간. 그에게는 그만큼 여유의 시간이 없다. 제법 먼 길이지만 내가 살고 있는 산골 초대를 하였건만, 언제나 마음만이라며 웃었다. 그때 그의 흉중에는 무엇이 담겨있었을까? 근기 낮은 내가 그의 마음은 알 수 없지만, 한 가지만은 분명하다.
약속.
그는 그것을 목숨처럼 지킨다.
그래도 나름대로 명망 있는 사찰을 놓아두고 그를 찾아오는 사람은 거개가 가난하고 병들어 구원을 요청하는 사람들일 터. 그들과의 약속은 시공간을 따질 수 없다.. 아마도 지금 그를 지탱하게 하는 것은 그들과의 약속일 것이다. 다른 것은 몰라도 나는 그가 그 오랜 세월, 지장경을 손에서 놓지 않는 이유를 알고 있다. 그 까닭을 알고 있다.
어쨌든 이제 그리도 난폭하게 천둥과 번개, 폭우와 폭염을 동반했던 여름은 끝나가고 있다. 기실 우리들의 여름은 벌레소리가 이미 가을을 머금고, 떨어진 미닫이가 겨울바람을 머금고 있는 여름이었다.
다 자란 잎과 한 아름 입을 벌린 알밤 사이에 끼인 여름이었다. 넘실거리는 여름의 푸른 파도는 흰 물거품으로 부서져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검고 높은 가을의 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있다. 겨울을 향함이다. 그렇게 우리들의 여름은 벌써 저만치 멀어져 가고 있다. 바야흐로 가을의 시작이다. 벌써 아침저녁으로 가을 풀벌레들이 울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8월 초부터 시작된 장마 아닌 장마는 끝날 줄 모른다. 때 없는 물난리로 하여 뉴스가 어지럽다. 좁은 땅, 그런데도 천변만화의 마술을 부린다. 어느 곳은 저수지가 말라 바닥이 드러났고, 어느 곳은 홍수가 나 인명사고까지 있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일러 기후변화로 인한 현상이라고 하지만 우리의 행성은 항상 그렇게 공평하지 못했다.
늘 그래왔다.
불균형이 균형이다.
우리가 바라는 균형 없는 곳이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의 행성이다. 오히려 잘 맞춰진 균형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기야 그게 이승의 변할 수 없는 속성이다. 균형이 있다면 부처님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의 이 정도 균형은 그야말로 행운이다. 여직 우리는 그렇게 운 좋게 살아왔다.
우리 스스로 만든 전쟁으로 불행하기도 했지만, 따뜻한 볕과 적당한 바람과 비, 울창한 수목과 탐스런 열매들 사이에서 그렇게 행복했다. 짧지만 우리의 행성은 그 기적을 선사했고, 언제 끝날지 모르지만 그것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그러나 이제 언제 어느 때 무엇이 우리를 덮쳐,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가 이곳에서 완전히 사라진다 해도 그것은 우주 전체로 볼 때 아무런 사건이 되지 못한다. 그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우리들의 시각, 그것이 전혀 통용되지 않는 곳이 우리가 어디론가로 날아가고 있는 이 지구라는 우주선이요, 끝 모르는 우주의 현실이다.
이런 난만한 8월의 중순, 이 조그만 행성의 한 켠, 빛고을 광주라는 무등산 자락 아래에서 그 옛날, 훤훤장부 꽃다운 청춘은 벌써 지난 초로의 청춘이 날 기다리고 있을 게다.
광륵사.
꼭 4시간 반의 거리, 결코 짧은 거리는 아니다. 아니나 다를까? 길을 나서자마자 갑자기 비가 시작되었다. 비가 비를 적시고, 구름이 구름을 내려깔았다. 낮은 하늘 밑을 퍼붓는 장대비 속 기름 가게가 없는 함양 휴게소에서도 머물고, 참으로 멋진 지리산 휴게소에서도 머물렀다. 운전을 할 수 없었다.
아이쎄여, 내 너를 사랑하노라!
내 기억이 맞다면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의 안톤 슈낙이 비 내리는 고향의 조그만 공동묘지 앞을 지나며 읊조렸던 한 구절이다. 그녀는 슈낙의 단짝 친구.
못나서 <우리를 더 슬프게 하는> 작가인 나도 진불제자로 만나러 가는 빗길에 단짝 친구 하나를 덧붙였다. 아직은 죽지 않아 무덤은 갖지 못했지만, 그 옛날의 초등학교 오랜 여자 친구를. 그녀의 이름은 독일의 아이쎄가 아니라 남조선의 윤희다. 행복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차창으로 비가 쏟아지면 옛날로 돌아가고, 그 비가 그치면 오늘로 돌아왔다.
광륵사 전경(사진=황명라)
그렇게 남원에 와서야 비가 잦아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또 한 시간 국립공원?의 광륵사에 닿았다.
위없는 깨달음을 의미하는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의 무등, 그 무등의 한 골짜기에 <생활인의 불교도량> 광륵사는 위치한다. 몇몇 광주의 불자들에게는 꼭꼭 숨겨져 있는 보석, 의제 허백련로 증심사 옆이다. 그러나 증심사와 광륵사는 의미가 다르다. 광륵사 창건주 여화스님은 먼 훗날의 이 땅이 미륵 부처님의 정토가 되어 미륵의 빛으로 빛나는 광주가 되기를 기원하면서 광륵사 (光勒寺)라고 이름하였다.
수행과 염불 그리고 중생 제도에 정진하던 여화 스님은 과거 19세 때 비명에 타계한 큰아들을 잊지 못하여 서기 1966년 음력 병오년 8월 24일에 그 유해를 광륵사 북측 산중턱의 양지에 이장했으며 아침저녁으로 염불로써 그의 축복을 빌었다. 그리고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마음, 그 자식이 죽어서도 극락왕생을 바라는 마음으로 오늘의 광륵사를 탄생시켰다.
하여 스님은 음력 8일 약사재일 날을 정기법회일로 하고 신도들의 몸과 마음의 병을 고쳐 주는데 많은 정성을 기울였다. 그리고 작금 운좋게도 여화스님의 뒤를 그대로 잇는 열혈수행 두 분의 스님으로 하여 광륵사는 모름지기 목탁사로 지칭될 만큼 올곧아졌다.
그들은 쉼 없이 마구 친다.
좁은 방 한 켠에서 기거하며 밤낮으로 목탁을 휘두른다. 광륵사를 찾아오는 이들을 위해, 그들이 천도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해, 뼈가 부서지도록 하염없이 때린다. 감히 물을 수 있다. 이 나라 사찰에 어디 이런 곳이 있는가? 그런 스님들이 있는가? 나는 그들을 보면 부처님이 원망스럽다. 왜 무슨 연유로 저들을 저렇게 미련하게 만들었는가? 지장보살님과 여화스님이 밉다. 왜 저들이 이룰 수 없는 서원을 세우셨는가?
그들을 만나고 보면 이곳 광륵사가 마치 <오래된 미래 라다크>가 생각난다. 이곳 광륵사에서 별로 바라는 게 없는 그들, 아무 생각 없이 목탁만을 두드리는 그들, 그 순연한 경지를 누가 따라올 수 있는가? 그들은 웅크리지도 않고, 안 웅크리지도 않는다. 그저 비가 오면 우산을 쓰고 눈이 오면 플라스틱 비를 든다.
처마 끝으로 줄줄 나뭇가지 같은 물줄기가 떨어질 때쯤 광륵사에 도착하자, 인행스님이 버선발로 뛰어나와 웃는다. 늘 그러했듯 공양간 한켠의 커다란 알루미늄 상을 가운데 두고 마주 앉았다. 우람한 나무 차탁도 없고, 우아한 찻잔도 없다. 밀봉한 펙 양파즙과 칡즙이 전부다. 내가 대뜸 달달한 칡즙을 물자 혼자 중얼거린다.
"칠즙이 더 낫겠지요."
"양파즙은 스님이 드시지요?"
"그렇지 않아도 저는 양파즙 좋아합니다."
나는 칡즙을 빨고, 양파즙을 음용하는 파리한 그의 얼굴에서 현실의 처연함이 묻어난다.
힐끗, 그의 오른쪽 팔목에 붙은 여러 개의 파스가 보였던 것이다.
"팔은 왜 그렇습니까?"
가슴 아프면서도 짐짓 놀렸다.
"일을 하다 보면 자주 붙여요."
어림도 없는 말씀.
외람되지만 그의 가난한 <목탁 노동자> 생활을 나는 알고 있다. 그 옛날의 그와 나 청춘의 장면들이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친다. 사연 많은 필동에서의 짧지 않은 연월들. 그러나. 그러나.
나는 머리에 흰 눈이 내렸고, 그는 눈썹에 무서리가 내렸다. 생각해 보면 다 같은 곳이지만 충무로였던가? 퇴계로였던가? 그러나 단 한 번도 술잔을 나눈 적이 없었다. 그때 그는 이미 술담배가 오롯이 뼈와 살로 가는 것을 알았던 것일 게다. 현명한 사람. 당연히, 그는 부처님 일을 하느라 바빴고, 나는 잡지 못할 뜬구름 잡느라 바빴다.
전혀.
절대 전혀 오늘의 인터뷰를 약속 않고, 그 먼 길을 찾아와 카메라를 꺼내는데도 그는 그저 빙긋 웃을 뿐이다. 오히려 내가 민망할 지경. 역시 그는 그다. 12월의 물을 닮았다.
"우리 이렇게 앉아본 지 오래지요?"
"오래가 아니라 처음이지요."
맞는 말 그 오랜 세월 서로의 얼굴만 보았을 뿐이었다. 내 못난 사람됨의 근저를 너무나 잘 아는 그는 그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여태 그래왔던 것처럼. 기실 할 이야기가 없다. 하지만 부처님 손바닥은 아니지만 서로의 현실을 너무 잘 알고 있는 터.
인행 스님(사진=황명라)
아무리 반가워도 자주 만나지 못하면 이야기가 있을 수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매일 만나야 매일 이야기가 있을 수 있다. 무얼 물어볼까? 그렇다면 가장 진부하게 다시 또 옛날로 돌아갈 도리 밖에 없다.
"어떻게 부처님을 만났습니까?"
"고등학교 때 몸이 몹시 아팠습니다. 그런데 절에 다니는 누나가 은석사 법화경을 가져다주었지요. 다른 책은 볼 것도 없고 해서 그 책을 본 것이 그만 이렇게 되었습니다. 글자가 아주 크고 두꺼운 책이었습니다."
사람의 인생을 바꾸는 계기는 아주 작고 소소한 것에서 시작된다. 특히 본인은 전혀 알 수 없는 향방으로. 그것이 결국 어느 한 사람의 오늘이 된다. 또 그것이 다름이 아니라 법화경이라면 복이 많은 분이다.
"법화경 어떤 부분이 좋았습니까?"
언제나 진불제자들을 만나면 저지르는 필자의 잘못, 이 세상 좋고 나쁨이 어디에 있는가? 더구나 경전이라면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런데도 자꾸만 잘못을 저지른다.
"그냥 영험록에 있는 이야기들이 모두 진짜로 여겨졌습니다."
할 말이 없다.
"그 마음이 지금까지 변함없습니까?"
"변함 있을 게 없지요."
"그럼, 광륵사에 와서 뭐가 제일 좋으세요?"
또 흰색과 검은색으로 세상을 가르는 질문을 한다. 누구는 무엇을 좋아서 하는가? 그런데도 말꼬리를 잡기 위해 자꾸 토를 달아본다.
"생활인의 도량, 그것이 좋았어요."
광륵사라면 응당 동대 교수였던 병고 고익진 선생의 본향, 물론 그이의 어머님이 창건했지만... 병고 선생의 케치프레이즈가 <생활인의 도량>이었음에. 병고 선생은 '아함 법상의 체계성 연구'라는 논문을 통해 우리나라의 불교계에 '왜 불교학은 아함에서 시작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와 '아함에는 어떤 순서가 있는가'를 제기하여 아함이 불교학의 기본이 된다는 것을 확립시켰다.
처음에는 인도불교학을 전공하였으나 찬술문헌을 정리하고, 또 이어서 한국불교전서 간행의 일을 전담하면서 본격적으로 한국불교학 쪽에 관심을 기울였다. 특히 <한국 고대 불교 사상사>는 그의 학문적인 성과는 물론이고, 한국불교사의 결정체라고 말할 수 있다.
말하자면 이제 한국 불교의 전설이 된 그가 1981년에 일승보살회를 창립하여 많은 재가불자들에게 설법을 하고 생활인의 불교도량으로 발전시켰다. 생활인의 불교 도량의 이념은 고익진 선생이 직접 쓴 발원문에서 알 수 있듯이 아함 반야 법화에서 말해지는 일불승의 깨달음의 길의 추구이며, 그것을 이루고자 노력하는 생활 자세는 '깨달음을 구하면서, 성실하게 일하고, 가정에 충실하며, 사회에 봉사하고, 법회를 봉행하는' 것이다.
광륵사 법당 왼편에 봉안 된 고익진 선생과 여화 스님, 가족들의 부도와 탑비(사진=황명라)
그 일승보살회의 선봉장.
다른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그 또한 병고 선생이 간 길을 그대로 가고 싶어 한다.
"부처님 시절에는 집에서 공부를 할 수가 없었겠지요. 그래서 출가를 권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다릅니다. 집에서도 얼마든지 공부할 수 있습니다. 선생님은 그 부처님 마음을 아신 게지요."
꼭 생전의 병고 선생처럼 말한다.
"우리는 한번 잘못을 저지르면 그것을 하지 말아야 하는데 자꾸 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을 탓합니다."
수줍지만 할 말은 하는 사람.
이미 알고 있는 터다.
"혹시 병고 선생님 외에 길잡이가 되는 분이 있습니까?"
그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글쎄요. 선생님이 워낙 우리가 공부해야 될 것들을 다 정리해놓으셔서 별반... 그렇지만 틱낫한 스님은 염두에 두고 있었지요."
고개가 끄덕여진다.
틱낫한 스님은 1995년, 2003년, 2013년에 우리나라를 방문하여 평화사상과 마음 운동 명상, 법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하지만 우리나라에 제일 큰 반향을 일으킨 것은 화anger에 대한 이야기였다 행복을 위한 한 가지 수행은 무엇보다 화를 다스리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을 설파했다. 언뜻 보면 아주 평범한 이야기. 그러나 그가 화를 이야기 하였기에 이야기가 달랐다. 그만큼 그는 이미 세계적인 수행자였다.
1926년 베트남에서 태어난 그는 16세에 출가하여 여러 수행처에서 불교혁신 운동을 벌이다 1961년 프리스턴대와 컬럼비아대에서 불교를 공부하고 귀국하여 접현종(order of intebeing)을 창립하였다. 그리고 마틴루터킹 목사와 함께 반전운동을 펼쳤다. 이를 빌미로 그는 훗날 조국 베트남에서 영구 귀국 금지를 당하여 40년 동안 망명생활을 하게 된다.
그에게는 오히려 잘 된 일.
그는 1973년 프랑스에 망명하여 1982년 보르도 근교에서 명상 공동체 플럼빌리지(자두마을, 매화마을)를 창설하여 마음의 평화에 대한 수행과 명상법을 설파하여 많은 반향을 얻고 1990년 미국엔 그린마운틴 수행원을 설립했다. 그 후 그는 100여 개가 넘는 저서와 책을 발표해 자신의 사상과 수행법 평화에 대한 이야기를 세계인에게 전했고 한국에서도 한반도 평화와 경청, 마음수행과 행복 화에 대해 이야기했다.
바로 그 스님.
화가 풀리면 인생도 풀린다.
우리의 마음은 밭이며 그 안에는 긍정의 씨앗과 부정의 씨앗이 있으며 어떤 씨앗에 물을 주어 꽃을 피울지는 자신의 의지에 달렸다.
그의 이력상 틱낫한 스님을 존경하는 것은 불문가지.
"그래서 저는 그 스님이 말한 수행 방법을 참고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요?"
"걷는 것이지요. 걸어야 합니다. 그래야 생각을 합니다."
"목탁을 칠 때는 생각을 안 하십니까?"
그가 너무 진지해서 내가 은근 놀렸다.
"그때는 다른 생각은 하지 않고 지장보살님 생각을 합니다."
그렇지. 오래전부터 <업설 지장경>을. 출간하여, 벌써 50만 권...100만 권 출간이 우선 목표라 한다. 삼류이기는 하지만 명색이 작가인 내가 겨우 몇 천권, 많이 팔아야 몇 만권,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는다. 부끄럽다.
"그 외에 하고 싶은 일이 있으시다면요?"
"나름대로 <근본 삼부경 요집>을 출간하고 싶습니다. 그 속에 우리가 원하는 것들이 다 들어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병고 선생은 행복한 사람, 스승이 못다 한 일을 하고자 하는 저런 제자들을 둔 사람은 흔하지 않다. 그와의 대면이 끝나갈 무렵에 왜 자꾸 지장보살의 형상이 생각날까? 그의 맑게 흰 눈썹 때문인가? 부드러운 말씨 때문인가? 아니다. 그가 광륵사를 지키며 일궈내는 무서운 서원과 가열찬 목탁 때림 때문일 것이다.
지장보살은 흔히 삭발한 승려의 모습으로, 머리 뒤에는 서광이 빛나고 두 눈썹 사이에는 백호가 나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그는 또한 한 손에는 지옥의 문이 열리도록 하는 힘을 지닌 육환장(六環杖, 고리가 서로 부딪힐 때 주석 같은 소리를 내어 석장[錫杖]이라고도 함)을, 다른 한 손에는 어둠을 밝히는 장상명주(掌上明珠)를 들고 있다. 지장보살은 고통받는 이들의 요구에 따라 자신의 모습을 바꾸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에 윤회의 여섯 세계, 즉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에 상응하는 6가지 모습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절 마당으로 비는 계속해서 내리는데 그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면서 근처 중국집을 가잔다. 그러나 이미 8시 반이 넘은 시간, 더구나 요즘은 역병으로 거의 모든 식당이 일곱 시만 되면 문을 닫는다. 그동안 전혀 외식을 하지 않았다는 증표다.
"아이구, 그래도 먼 길을 오셨다고 상당히 후하십니다."
"가시지요?"
"이미 문을 닫은 지 오래입니다. 차라리 다음에 우리 마을로 오세요."
"그렇게 마음을 먹고 있는데... 그것이..."
또 마음만. 겸연쩍은 그의 얼굴을 뒤로하고 이제 자리를 떠야 한다. 비 내리는 무등산행에 곡차가 없을 수 없다. 옆의 단짝 친구, 아이쎄 대신 윤희를 쳐다보자 엄지손가락을 올려세운다. 빨리 돌아가 조용하게 한잔하고 싶다는 얘기다.
술을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사람 때문에 술을 좋아하는 친구. 스님과 내가 법담?을 주고받는 사이, 같이 앉아있으면서도 결코 뒷전에 서 있던 친구, 그녀에게 스님은 부처님과 같다. 오랜 불자생활로 단련된 기본기다. 꽤 길어진 스님과 나의 이야기를 아주 수줍게 듣고 있었을 뿐이다. 그 속음이 좋다. 누구를 만나도 언제나 좋은 눈. 스님과 헤어진 직후. 그녀가 슬며시 얘기한다.
"오늘은 정말 시가 있는 날이네요."
그녀의 말에 언뜻.
작은 우산 밑의 물과 나무가 보인다.
누가 죽어가나 보다
차마 다 감을 수 없는 눈
반만 뜬 채
이 저녁
누가 죽어가는가 보다
풀과 나무 그리고 산과 언덕
온누리 위에 스며 번진
가을의 저 슬픈 눈을 보아라.
정녕코 오늘 저녁은
비길 수 없이 정한 목숨이 하나
어디로 물같이 흘러가 버리는가 보다.
오래전 하늘나라로 가버린 김춘수 선생과 함께 돌아오는 길엔 조금 그쳤던 비가 다시 뿌리기 시작한다. 뿌연 차창으로는 벌써 가을이다. 혹여 이 시간에도 문을 열고 주당들을 기다리는 곡찻집이 있지 않을까? 단짝 친구는 눈을 반짝인다. 그러나 어림도 없는 일, 텅 빈 거리에도, 알알 곡식들이 들이찬 들판에도, 온통 가을의 향연만 물씬 풍길 뿐이다. 그러다가 문득, 언제일까? 인행 스님, 그가 만사 제치고 두 팔을 벌리고 나의 산골을 찾아와 줄 그런 행복한 날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