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락객常樂客이 되다2 

겨울 산.

하관에 참여한 사람은 단 몇 사람. 하관이 시작되면 관을 붙들고 오열하는 어머니.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두 소년. 경허와 형이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한 여인. 경허의 눈에 비치는 하늘. 내리는 눈발. 이윽고 청계사에서 머리를 깎는 경허. 경허를 인계하고 떠나는 어머니. 밤낮으로 물 긷고 나무하는 경허. 땅바닥을 칠판 삼아 글을 배우는 경허. 그리고 수도 정진. 몰려드는 학인들. 그곳의 한 여인.

지그시 눈을 뜨는 경허. 여태까지 생과 사가 일여하다고 느끼며 가르쳐왔지만 그것은 관념의 유희에 불과했다. 죽음에 직면한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 초라했다. 지금까지의 모든 경전 문구가 부질없는 메아리로 들렸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그는 결심했다. 진정 살아있음 그 자체로 죽음에 직면하자! 그는 다시 산에 돌아온 뒤 대중들을 흩어 보내며 말했다.

“그대들은 인연 따라 잘들 가게나. 나는 여기 있겠네.” 

그는 문을 폐쇄하고 단정히 앉았다. 창문 밑으로 주먹밥이 들어올 만큼의 구멍만 뚫어놓고, 한 손에는 칼을 쥐고 목 밑에는 송곳을 꽂은 널판자를 놓아 졸음이 오면 송곳에 다치게 장치하여 잠을 자지 않고 정진했다. 

소문이란 화살보다 빠른 법. 이러한 정진력은 절 아랫마을까지 소문이 났다. 그러던 어느 날 학명도일(學明道一)이라는 스님이 아랫마을에 내려갔다가 이처사라는 진사(進士)를 만나 수인사를 하게 되었다.

“스님, 요즘 어떤 공부 하십니까?”

“그저 경이나 읽고 염불하며 가람 수호하는 것이 일과랍니다.”

“스님! 그렇게 공부하다가 소가 되면 어쩌시려구요?”

“그럼 어떻게 하면 소가 안 될까요?”

“소가 되더라도 고삐를 꿸 콧구멍이 없으면 되지요.”

고삐를 꿸 콧구멍이 없는 소. 학명 스님은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어 절에 들어와 대중들에게 물었지만 누구도 대답을 못하였다. 그래서 경허를 찾아가 “소가 되어도 고삐 뚫을 콧구멍이 없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하고 물었다. 경허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도일 스님의 얼굴을 올려보았다. 멍청한 표정이었다. 그런데 그의 뒷머리를 때리는 언어를 발설하고 있었다. 경허는 지그시 웃었다. 무언가 감이 온 것이다. 여태 그의 가슴을 짓누르던 커다란 돌덩이 하나가 부서지는 순간이었다.

그는 여유 있게 물었다.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오?” 

예상대로 도일 스님이 고개를 흔들었다. 경허 또한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나 그의 눈은 이미 활활 타고 있었다. 온 들판을 다 태우고, 온 나라를 다 태우고도 남을 불씨가 돌덩이 대신 그의 가슴속에 자리 잡았다. 그는 스스로에게 조용히 대답했다. ‘콩이 익으면 가을 햇볕에도 콩깍지를 터뜨리는 법!’ 그 순간 마음속에 얽혀있던 모든 의문이 한꺼번에 풀린 것이다. 그는 마침내 주장자를 꺾어 던졌다. 그의 나이  33세. 그는 무심히 다음과 같은 오도가(悟道歌)를 읊었다.  

忽聞人語無鼻孔 

頓覺三千是我家 

六月燕巖山下路 

野人無事太平歌 

문득 콧구멍 없다는 소리에

삼천대천세계가 내 집임을 깨달았네.

유월 연암산 아랫길에

일없는 들사람 태평가를 부르네. 

그는 처음으로 하늘을 보았고, 처음으로 들판을 보았다. 그는 처음으로 햇님을 보았고, 처음으로 달님을 보았다. 세상 모든 것을 본 것이다. 그의 눈에 덧씌워져 있던, 그의 눈을 가로막았던 검은 콩깍지가 소리 없이 날아가 버린 것이다. 이제 거칠 것이 없었다. 이제 머물 곳이 없었다. 떠나서 돌아올 곳도, 돌아가서 다시 떠날 곳도 없었다.

그는 자신이 만들고 자신이 부술 태평가를 부르며 세상을 향해 발길을 옮겼다. 그야말로 물이 되었다. 구름이 되었다. 33살에 그는 비로소 좁은 조선의 운수납자(雲水衲子)에서 은하(銀河)의 상락객((常樂客)이 된 것이다. 이후 그는 전국을 떠돌며 미망 속을 헤매는 대중들을 일갈하고, 오늘날까지도 인구에 회자되는 숱한 일화를 남긴다. 때로는 과장되게, 때로는 배꼽이 터질 정도로 우리를 웃게 만드는 그 일화들이 실은 바로 그의 실체다.

그로 하여 아직도 그에 관한 공과의 논란이 있는 것은, 뒤집어보면 우리 범부들의 눈으로는 그의 깊이와 높이가 측량하기 힘든 경지에 있음이다. 그에게 있어 문서는 무용(無用)이고 허위요 거짓이다. 하여 모든 서전과 불경 또한 그에게는 티끌이요 먼지다. 그는 오직 몸으로 말을 한 사내다. 큰물은 결코 작은 시내를 탓하지 않는다. 큰 산은 결코 누구도 마다하지 않는다. 태산대하(泰山大河), 경허 또한 훗날의 어떤 폄하폄설(貶下貶說)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