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종 칼럼12 

늦봄이 한창이다. 5월이 아니면 초여름이라고 해도 좋을 날씨다. 한낮의 기온은 여름 날씨를 방불케 한다. 내 사는 현묘재의 봄은 꽃 잔치의 연속이다. 이른 봄, 매화와 생강나무꽃의 개화를 시작으로 봄의 향연이 시작된다. 매화는 산골에 집 지으면서 다섯 그루를 심었고, 생강나무는 뒷산에서 옮겨왔다. 매화 향기에 취해 앞뜰을 천천히 거닐고 노랑빛깔 생강나무꽃향기를 킁킁 들이키는 것은 초봄이 주는 큰 선물이다. 매화 꽃망울이 터져 만개하면 그 짜릿한 향기에 정신이 또렷해진다. 매화향기는 청아해서 정신을 혼미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되레 성성하게 일깨워준다. 매화꽃이 차츰 시들면 뒤란의 복사꽃이 뒤를 잇는다. 복사꽃은 묘하게도 바라볼수록 몽환미를 풍긴다. 향기는 유난하지 않지만 다닥다닥 피어난 자태며 분홍색 꽃잎은 매력적이기 짝이 없다. 복사꽃이 피면 꿀벌들도 분주하다. 윙윙거리며 바쁘게 꽃송이를 옮겨가는 녀석들의 모습에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봄바람이 불어와 꽃비처럼 복사꽃잎이 날리면, 꽃밭에 진달래꽃 몽우리가 조금씩 붉어지면서 속내를 드러낼 채비를 한다. 그 뒤를 수선화가 이어가고, 잇따라서 산에서 옮겨다 심어놓은 하늘매발톱이 진보랏빛 꽃을 피운다. 

이때쯤이면 연둣빛 산천은 조금씩 초록을 더하고, 밭둑에 심어놓은 취와 부추, 방풍나물과 참나물, 쑥, 머위 등은 저마다의 향기를 과시하며 밥상을 화려하게 장식한다. 버금채식주의자인 나에게는 1년 중 이때보다 더 행복한 시기는 없다. 상큼하게 향긋한 취나물, 약간은 도발적인 방풍나물 향기, 왜 ‘참’이라는 이름을 얻었는지 알게 하는 고급스러운 참나물 향, 쓴맛 끝에 감도는 단맛이 일품인 머위, 한 그릇이면 밥 한 공기쯤 비우는 걸 식은 죽 먹기로 만드는 쑥국…. 

5월 하순의 꽃밭을 장엄하는 꽃은 단연 작약이다. 고급한 진분홍색 작약꽃을 감상하는 시간은 요즈음의 으뜸 즐거움이다. 이번 주는 유난히 현묘재를 찾아온 손님이 많았는데, 그들은 꽃밭에 활짝 피어난 작약꽃을 보자마자 하나같이 ‘너무 예쁘다!’며 탄성을 지른다. 며칠 동안 틈틈이 작약꽃을 지켜보니, 시나브로 붉은 빛이 바래는 중이다. 오래지 않아 작약꽃이 떨어지고 나면 그 옆에서 대기 중인 백합꽃이 화려하게 등장할 것이다. 이렇게 정신없이 피고 지는 봄꽃들의 향연을 보며 현묘재의 봄날은 간다. 

그러고 보면 자연의 조화는 참으로 오묘하다. 어느 꽃도 만개해서는 열흘을 넘기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는 말이 나왔을 것이다. 화무십일홍은 열흘 동안 붉은 꽃은 없다는 뜻으로, 번성한 것은 반드시 쇠하게 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이 말은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는 말과 함께 등장한다. 권불십년은 아무리 높은 권세를 가져도 십 년, 즉 오랜 세월을 지속하지 못하고 언젠가는 무너지게 되어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언제나 예외는 있는 법. 무려 100일을 지지 않고 피어있다고 해서 백일홍이라는 이름을 가진 나무가 있다. 봄꽃들이 군무(群舞)를 추며 허공으로 산화하며 더위를 몰고 와 심신을 나락으로 떨어뜨릴 즈음인 7~9월에 걸쳐 꽃밭 모서리나, 장독대 뒤, 아니면 산야의 무덤가나 거님길 주변에 우두커니 서서 마치 무녀의 머리에 얹어진 장식처럼 붉은 꽃봉오리를 맺는 배롱나무가 그것이다. 선혈처럼 투명하고 신선한 붉은색에 매료되어 나 역시 좋아하는 나무이기도 하다. 그런데 배롱나무꽃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한번 핀 꽃이 100일 내내 피어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일찍 핀 꽃은 지고 또 새로운 봉오리들이 차례대로 꽃망울을 터트린다. 꽃 하나하나가 차례로 피기 때문에 100일 동안 피어 있는 꽃으로 착각하기가 쉽다. 가지 끝마다 원뿔 모양의 꽃대를 뻗고 굵은 콩알만 한 꽃봉오리가 매달려 꽃을 피울 차례를 얌전히 기다리고 있다가 아래서부터 꽃봉오리가 벌어지면서 꽃이 피어 올라간다. 이어달리기처럼 꽃이 차례로 연달아 피니 사람의 눈에는 한 송이 꽃이 석 달 열흘이나 피어있는 것처럼 보인다. 한결같이 꽃을 피우는 모습이 충절과 절개를 굽히지 않는 선비와 같다고 하여 배롱나무는 선비들로부터 사랑받는 나무가 되었다. 조선의 충신 성삼문도 백일홍을 보고 빼어난 시(詩) 한 수를 남겼으니, 이렇다.

昨夕一花衰

今朝一花開

相看一百日

對爾好銜杯

어제 저녁 꽃 한 송이 지고

오늘 아침 꽃 한 송이 피어

서로 백 일을 바라보니

너를 대하여 좋이 한 잔 하리라.

아무려나, 100일을 피어있어 백일홍이라고 불리는 배롱나무꽃 또한 화무십일홍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다. 

지난 5월 10일 새 정부가 출범하면서 문재인 대통령이 퇴임하고 고향 양산으로 돌아갔다. 문재인 대통령은 퇴임 열흘쯤 전인 지난 4월 30일 서울 조계사에서 열린 조계종 제15대 종정 중봉 성파 대종사 추대법회에 참석하기 직전 불교계 원로들과 만난 자리에서 “남은 기간 동안 최선을 다하고, 자연으로 돌아가서 잊혀진 삶, 자유로운 삶을 살겠다.”고 말했다. 그는 또 통도사에 주석하는 성파 종정 스님에게 “퇴임하게 되면 통도사 옆으로 가게 되어 가까운 이웃이 되는데 자주 찾아뵙고 가르침을 청하겠다.”는 뜻도 전했다. 실제로 문 대통령이 퇴임 후 머무를 경남 양산시 하북면 평산 마을 사저는 성파 종정 스님이 주석하고 있는 통도사와 가깝다. 최고 권력의 지위에 있던 분의 퇴임 후 바람이 ‘잊혀진 삶’이라니, 이 얼마나 소박하면서도 신선하며, 멋진 모습인가! 만에 하나, 그가 여전히 자신의 영향력을 유지하고자 하는 의도를 은연중에라도 보였더라면, 얼마나 진부하게 느껴졌을까. 

꽃이 피면 반드시 지고, 달도 차면 반드시 기운다는 순리를 덤덤히 따르는 것의 아름다움! 세속에서도 보는 이 아름다움을 정작 절집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우니, 갑갑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