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를 뿌리려거든 뿌리소서
정찬주(소설가)
삽화정윤경
봄비가 꽃 피듯 내리고 운무가 골짜기를 구름처럼 오락가락하는 날, 섬진강과 지리산, 보성 봉갑사를 다녀왔다. 몇 년 만에 섬진강을 보고 나서 지리산 산골짜기에서 정진하는 한 지인을 만나 차담을 나누었다. 아내도 동행했다. 때마침 산중에 목련이 피어 눈길을 사로잡았다. 목련을 보니 브라흐민 신분이었던 목련존자가 떠올랐다. 산스끄리띠어로는 목갈라나 존자라고 부른다. 목련 꽃잎에 빗방울이 구르는 순간을 휴대폰으로 잡아 본다. 지금 다시 보니 빗방울이 어머니에 대한 효심이 지극했던 목련존자의 눈물 같다. 관음사를 떠나 이불재로 돌아오는 길에 봉갑사도 들러 각안 주지스님을 뵙고 침향차를 마셨는데, 그 진한 향이 아직도 입안에 남아 있는 듯하다. 모처럼 우중의 외출이 봄비와 운무, 차담과 목련, 침향차 등으로 온전하게 채워진 느낌이다. 서재에 앉아 <숫따니빠다>를 펴놓고 비 오는 날의 분위기에 딱 맞는 부처님 육성을 듣는다.
부처님 말씀과 침묵
소치는 다니야가 말했다.
“나도 이미 밥도 지었고 우유도 짜 놓았습니다.
마히 강변에서 처자와 살고 있습니다.
내 움막 지붕에는 이엉을 덮어 놓았고
집안에는 불을 지펴 놓았습니다.
그러니 신이여, 비를 뿌리려거든 뿌리소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성내지 않고 마음의 두터운 미혹도 벗어버렸다.
마히 강변에서 하룻밤을 쉬리라.
내 움막에는 아무것도 걸쳐 놓지 않았고
탐욕의 불은 남김없이 꺼 버렸다.
그러니 신이여, 비를 뿌리려거든 뿌리소서.”
소치는 다니야가 말했다.
“모기나 쇠파리도 없고
소들은 들판의 우거진 풀을 뜯어 먹으며
비가 내려도 견뎌낼 것입니다.
그러니 신이여, 비를 뿌리려거든 뿌리소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 뗏목은 이미 잘 만들어졌다.
욕망의 거센 흐름에도 끄떡없이 건너
벌써 피안에 이르렀으니, 이제는 뗏목이 소용없다.
그러니 신이여, 비를 뿌리려거든 뿌리소서.”
소치는 다니야가 말했다.
“내 아내는 착하고 허영심이 없습니다.
오래 함께 살아도 항상 내 마음에 듭니다.
그녀에게 어떤 나쁜 점도 없습니다.
그러니 신이여, 비를 뿌리려거든 뿌리소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 마음은 내게 순종하고 해탈해 있다.
오랜 수행으로 잘 다스려졌다.
내게는 그 어떤 나쁜 점도 없다.
그러니 신이여, 비를 뿌리려거든 뿌리소서.”
소치는 다니야가 말했다.
“나는 놀지 않고 내 힘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 아이들은 모두 다 건강합니다.
그들에게는 어떤 나쁜 점도 없습니다.
그러니 신이여, 비를 뿌리려거든 뿌리소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는다.
스스로 도를 터득해서 온 누리를 거닌다.
남에게 속할 이유가 없다.
그러니 신이여, 비를 뿌리려거든 뿌리소서.”
― 『숫따니빠따』
갈무리 생각
마히 강변에서 소치는 다니야의 신분은 귀족계급인 브라흐민이나 끄샤뜨리야는 아니었을 것이다. 노동을 해서 먹고사는 수드라이거나 그보다 낮은 불가촉천민인 것 같다. 그러나 부처님은 소똥 냄새 풍기는 그의 곁으로 가서 다정하게 설법하시고 있다. 다니야와 부처님이 합송(合誦)을 하듯 주고받는 말들이 너무나 정답고 아름답기까지 하다. 천민에게 맨발로 다가선 부처님의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모습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다. 부처님은 신분과 계급이 강고했던 2천5백 년 전에 혁명적으로 평등을 설하셨을 뿐만 아니라 몸소 실천하시고 계시지 않은가! 비가 내린다면 소치는 다니야와 함께 비를 맞겠다는 동체대비심의 자비가 느껴지는 ‘비를 뿌리려거든 뿌리소서.’이다. 두런두런 소리 내어 읽어보면 더욱더 실감이 나는 부처님의 자비로운 인생응원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