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전 진불제자 용흥사 정관스님
산이 좋아 산에서 사노라네
용흥사 가는 길.
또 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 겨울 숲속 계곡을 찾아간다. 봄이면 아름다운 벚꽃잎 배가 떠가는 개울, 지금은 얇은 얼음장 밑으로 돌돌돌 소리만이 들린다. 소리는 존재의 까닭, 무정물임에도 살아있음이다. 기실 우리를 지배하는 하는 것은 무정물들이다. 시인 석정의 말대로 우수 경칩이 멀어도 벌써 가슴이 뛴다. 봄이 가까운 것이다. 오리나무들은 삭풍 끝 가지가지마다 부푼 몽오리들을 매달았다. 저것들은 저렇게 저희끼리 서로 살을 맞대며 볕 짧은 겨울을 이긴다. 그렇게 어둠은 어둠 속으로, 빛은 빛 속으로, 그리고 달력은 어김없이 동그라미 속으로 사라진다. 마치 한편의 동화처럼. 그것이 훗날 빛바랜 사진이 된다.
어느새 2022년 1월의 끝.
역시 쏜 화살보다 세월이 빠르다.
겨울이면서 겨울답지 않은 볕 좋은 날, 상주 연악산 기슭의 산문, 용흥사를 찾았다. 단 두 분의 스님, 속가라면 다정한 형제 같은 정관스님과 범운스님이 사는 곳이다. 거기다 단정한 보살님 한 분. 그야말로 언덕 밑에 몇 칸 그림 같은 집. 그곳이 용흥사다.
(사진=황명라)
그런데 처음 정관스님을 두 번째 진불제자로 예정한 이유가 따로 있다. 지난 늦가을 국수를 먹기 위해 잠깐 들렀던 연악산 초입 식당. 푯말이 보였다. 아슴아슴 그 오랜 옛날의 기억. 의당 흔히 이곳에서는 용절이라고 불리는 용흥사를 참배했다. 그런데? 놀라웠다. 항용 절 마당이야 거개가 깨끗하지만 용흥사는 달랐다. 용이 승천하는 곳이라 샘물 또한 티 없이 맑지만, 마당에도 낙엽 하나가 없었다. 때 없이 산 밑으로 불려왔을 그 많던 낙엽들은 모두 어디로 간 것일까? 그야말로 면경 같은 마당, 비질하는 스님을 만났다.
"아이고 사형스님 때문에 죽을 판이에요."
참으로 소년 같은 범운스님. 첫 인연, 그와 차 한 잔을 나누면서 오늘의 진불제자 정관스님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꼬투리를 잡았다. 부처님 제자 잡기가 하늘의 별 따기보다 무서운 세상, 역병이 그렇게 만들었다. 사람을 만나기가 어려워졌다. 그런데 처음 만난 범운스님이 이상한 말을? 하였다.
"우리 사형스님은 달라요."
"뭐가 다릅니까?"
귀가 솔깃했다.
"주로 부처님 처음을 따라가요."
어렴풋 상황을 알았다.
"그러면 미얀마 쪽?"
그가 빙긋 웃었다.
"그것을 세상에 전하고 싶어 합니다."
아하! 그렇지 않아도 어느 계에서든 다르게 사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더구나 많이 덧칠된 부처님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부처님을 따르는 제자가 간절한 연대. 바로 결심했다. 필요한 사람은 멀리서 찾는 것이 아니라는 어른들의 오랜 말씀.
"곧 주지스님을 만나야겠습니다."
"그런데 다 마음에 드는데 딱 한 가지. 너무 심해요. 흐흐!"
"예?"
정갈이 병이라
정관스님은 부처님 곁의 어지러운 것은 보지 못한단다. 어쩐지 차를 나누는 차방에도 먼지 하나가 없었다. 노오란 옛집의 아름다움, 검박한 시렁이 고왔다. 그 어디 사찰도 이만큼 깨끗하지는 못하다. 언제 어느 때 불자들이 올지 모르는데 그 인연들을 위해 최소한의 도리란다. 그러자면 본인은 물론이고, 함께 있는 사제스님과 보살님이 얼마나 힘들꼬?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어쨌든 본인의 허락은 받지도 않고 약속을 잡았다.
그러나 정관스님은 바빴다. 직지사 총무의 소임을 맡고 있어서였다. 신문사의 연재 상황상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어 마음대로 전날 밤 눈 내린 하얀 겨울 속으로 들어갔다. 언덕 위의 집을 찾아가는 돌길 물길 옆, 찻집에서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귀향>. 그런 곳이 그가 사는 곳이었다.
(사진=황명라)
이제 집으로 돌아가리
연악산 산 고개 넘어 끝없는 나그넷길
이제 쉴 곳 찾으리라
......
......
지나는 오솔길에 갈꽃이 한창인데
갈꽃잎 사이마다
님의 얼굴 맺혀있네
......
......
사랑하는 사람들아
나 초저녁 별이 되리
내 영혼 쉴 때까지
나 소망으로 노래하리
의당 이런 곳에 사는 산문인들의 님은 부처님.
밤하늘에 별이 반짝이지 않아도 별은 늘 그곳에 존재한다. 부처님이 보이지 않아도 부처님은 늘 절집에 상주한다. 아주 없는 것 같아도 이 나라는 아직 부처님을 따르며 부처님께 귀향하고픈 진불제자들의 천지. 하기야 이곳 이름이 지천이다. 그 옛날 어머니와 함께 왔던 기억. 새들도, 물들도, 바람도, 그때처럼 지저귀고, 그때처럼 흘러가고, 그때처럼 나부끼는데, 흘러가 버린 것은 오로지 나만이다. 이곳 세속의 전설이 전설을 낳은 용흥사 뒷전으로 쌓인 눈이 내 머리칼처럼 날리는 행복한 슬픔.
동구에 다 와서야 전화를 걸었다.
당황한 목소리. 전화 저 너머로 들려오는 스님의 음성이 맑다.
"멀리서 보살님들이 찾아와서 조금 늦어도 되겠습니까?"
한참을 기다렸다.
모습은 보이지 않는데 찻방 주위 이곳저곳에서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핸드폰만이 아니라 절 내의 전화기도 쉴 틈이 없다. 서울, 김천, 대구 부산. 그 시간을 범운스님이 대신했다. 이윽고 그가 나타났다. 짐작대로 범운스님과 똑같았다. 나이 먹은 소년들,
바로 들어갔다.
"그저 스님의 세상 사는 이야기 좀 해주시지요?"
"난 대담을 나눌 건덕지가 조금도 없는데......"
"여기 왜 사세요?"
"언덕 위의 하얀집."
그가 비로소 웃는다.
이야기가 시작되자 의외로 술술 세상이 돌아간다. 오로지 법회만 20여 년, 한 마디로 고수다. 지금도 일주일에 한 번은 법회를 주관하고, 토요일은 본 절 회의 등등. 산에서 살지만 산에서 살지 못한다고 한다. 그래서 산에서 살고 싶단다.
"살날이 많은데 무엇을 할까? 할 일이 없었어요.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어요. 공무원 시험 준비도 해보고, 또 다른 일도 했지만, 도무지 나를 유혹하는 세상사가 없었어요. 그러다가 부처님을 만났지요."
세속의 가장 중요한 세 가지.
명예, 권력, 경제.
그러나 그 어느 것에도 관심이 솟지 않았단다. 답답하기 그지없던 시절, 사방이 벽이었던 그때 비로소 부처님이 보였단다. 책으로 시작했다. 그리고 시행에 들어갔다. 부처님 제자가 되기로 한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 세상살이가 어디 그리 녹록한가? 혈기왕성한 청춘이 출가낙발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법. 그야말로 나이 든 어른의 눈으로 출가란 세상의 무덤으로 스스로 들어가는 인식. 그것을 결단하기란 우리 생각처럼 단순하지가 않다.
그의 표정이 아련하다. 흘러간 세월의 무게가 묻어 있다.
"마지막 결심을 하고 아버님을 찾아갔지요."
"뭐라고 하시던가요?"
"니는 그럴 줄 알았다. 아직 늦지는 않았겠지?"
산중출가를 막기는커녕 오히려 걱정을 해주셨다며 슬쩍 웃는다. 그사이에도 전화는 계속 온다. 전화를 받는 음성엔 전화를 준 이에 대한 고마움이 가득하다. 그는 여느 스님과 좀 다른 얼굴이다. 언뜻 스리랑카, 아니면 인도의 초기 구도자들의 모습을 닮았다. 눈이 안으로 깊다. 역시 예상대로 그의 수행 이력은 대승에서 아함으로, 아함에서 니카야로, 그리고 지금의 파옥 스승까지. 그러니까 문경 김용사에서 김천 직지사로, 그리고 지금의 상주 용흥사까지. 미얀마에서 미국, 그리고 한국까지.
"가장 따르고 싶은 부처님 제자는 누구십니까?"
좀 더 흥미 있는 이야기를 끌어내기 위해 던진 말에 그가 바로 반응했다. 그의 눈이 반짝였다. 수줍은 본래 그의 태도가 아니다. 옳지 이제야 제대로 된 구도 이야기를 들을 터. 법회 전문, 그래서 부루나 존자나 경허스님의 이름이 금방 나올 줄 알았다.
(사진=황명라)
그런데 놀랍게도 파옥 사야도!
부끄럽게도 필자는 처음 듣는 이름.
그 스승의 모습만 봐도 가슴이 뛴단다. 그것은 분명 사랑이다. 어째서 그럴 수가 있을까? 그의 짧지만 긴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그의 열정이 대한(大寒)의 한기를 몰아냈다.
"파옥 사야도?"
필자는 금방 유치원생이 되었고, 그는 대학생이 되었다.
단둘만의 법회!
"아함은 전해 온 가르침이라는 뜻이지요. 초기 불교 시대에 성립된 수천의 경전들을 통틀어 이르는 말입니다."
"그러면 위빠사나는요?"
"그 동안 우리가 접해온 위빠사나 수행은 미얀마와 인도, 그리고 태국의 스승들에게서 배운 것입니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나라는 단연 미얀마입니다. 미얀마 이외에서 위빠사나 수행을 접할수 있는 대표적인 나라는 인도와 태국이며, 인도의 고엔카의 스승은 우 바 킨이라는 미얀마의 재가 수행 지도자였고, 태국에서 수행을 지도하는 분들 가운데 미얀마의 마하시 사야도 수행법을 계승한 분들에게 수행을 배운 분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파옥 사야도
"부처님 자신과 승단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분이 나투신 이유는 대중들입니다. 유정물뿐만 아니라 무정물까지 위해서입니다. 우리도 무정물에서 나왔지요. 제가 파옥 스승님께 경도될 수밖에 없는 이유이지요. 그분 사진 하나라도 걸었으면 합니다."
"저도 걸 수 있습니까?"
"참 불교는 재가자와 안 재가자의 구분이 없습니다. 스님들도 재가자에게 배우고, 또한 재가자들도 스님에게 배웁니다. 나와 대담을 나누지 말고 그분과 대담을 나누세요. 책도 많이 나와 있답니다. 이재성 교수께서 쓰신 내용이 간결합니다. 꼭 참고하세요."
사실 부탁이 아니라 거의 행복한 명령이다.
바로 달려갔다.
스님이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우리에게는 종이책을 대신하는 문명의 이기가 있다.
휴대용 컴퓨터.
그리고 당장 파옥 사야도를 소환했다.
19세기 후반까지 미얀마에서 수행은 일부의 수행승들에게 국한된 일이었다. 하지만, 숲속에서 수행에 전념하는 수행승에게 제한되어 있었던 위빠사나 수행 전통은 민돈 왕에 의해 왕궁에서 실천되었다. 1910년대를 지나면서 출가자는 물론 재가자에게까지 위빠사나 수행이 보급되기 시작했다. 왕이 1949년 마하시 사야도를 초빙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미얀마에서 마하시 위빠사나 수행법이 널리 보급되는 데에는 정부의 지원도 있었지만, 반드시 왕궁 배경만으로 마하시 수행 센터가 급속도로 확산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모곡 사야도의 경우를 보면 알 수 있듯이 훌륭한 스승의 가르침을 따르려는 제자들의 힘에 의해서도 수행의 전통은 널리 보급되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전문적인 소수의 수행승들이 숲속의 수행처에서 수행을 했는데 비해, 현대의 위빠사나는 많은 수행자들이 잘 정비된 수행처에서 함께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19세기까지 불교 수행은 교학 연구에 밝고 충분한 연령에 이른 승려들만의 특권이었는데 비해, 현대의 위빠사나운동은 재가자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불교도가 아닌 사람들에게도 개방되어 있다는 점이다.
파옥 사야도는 1934년 6월 24일, 수도 양곤에서 동북쪽에 위치한 힌타다(Hinthada)에서 태어났다. 1944년 10살이 되던 해에 출가하여 아친나(Achinna)라는 법명을 받아 사미가 되었고, 1953년까지 전통 교육을 받으면서 고급 팔리 시험(Pathama Kyi)까지 통과하였다. 1954년 20세가 되던 해에 비구계를 받았으며, 1956년에는 사설법사 시험에 통과해서 법사(Sasanadhajasiripavara-dhammacariya)가 되었다.
1981년 파옥 숲속 수행처의 2대 주지스님이었던 악가판냐(Aggapañña) 스님께서 입적하시면서 이 수행처를 아친나 사야도가 맡아서 지도하라고 유언을 하셨고, 그 이후 현재까지 24년동안 파옥 숲속 수행처에서 경전 연구와 수행 지도를 통해서, 교학(Pariyatti), 수행(Patipatti) 깨달음(Pativedha)이라는 부처님의 정법을 증진시키는 노력을 해오고 있다.
파옥 사야도의 사마타 수행의 단계는 입출식념을 통해서 4선을 이룬 후에, 몸의 32가지 구성 부분에 대한 관찰과 뼈에 대한 관찰 그리고 10가지 카시나 수행으로 이어지며, 이어서 4무량심과 네 가지 보호하는 수행을 닦은 후에 물질(rupa 色)를 그 최소단위인 깔라빠가 보일 때까지 수행한다. 이렇게 물질을 철저하게 관찰한 후에 정신을 관찰하는 수행으로 진행되며, 이렇게 해서 사마타 수행은 위빠사나 수행으로 이어지게 된다. 파옥 수행처에는 선정의 경지에서 행복을 즐기면서 머물러 있는 수행자들도 있다고 할 정도로 선정 수행을 철저하게 지도하고 있다는 점은 미얀마의 다른 수행처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운 모습이다.
그가 닮았다. 그의 스승과 그가 꼭 닮았다. 누구든 간절히 원하는 것과는 닮게 마련이다. 열정이다. 갈 길을 가기 위한 의지다. 아직 먼 길, 그는 그렇게 걸어간단다. 부처님이 처음 밟았던 그 길을 파옥 사야도처럼 행복하게 갈 것이란다. 그게 수행자란다. 구도자란다.
그는 오랜 시간을 미얀마와 태국에서 수련했다. 할!로 대변되는 대승의 불교에서 참나!를 찾아 그것을 회향하는 초기불교의 세계 속으로 들어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단단하게 탬플스테이로 펼치고 있다. 남녘 김용사, 직지사, 용흥사... 그리고 그것이 북녘 보현사, 석왕사까지 이어지는 날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 부처님 이야기를 할 때면 잠잠 미소 짓는 그의 눈빛에 그것이 담겨있다.
"눈으로 볼 수 없는 실제 성품을 관찰하세요. 그게 제 이야기의 끝입니다."
그런데 그 당당한 그가, 사진 기자 앞에서의 표정이 민망하다. 누군가와 대담도 처음이지만 사진도 처음이란다. 겨울 다사로운 햇볕 아래의 마당은 바로 극락정토다. 한동안 초보 불자를 위한 법회로 난감했던 스님의 표정이 시원섭섭하다.
"언제 다시 날짜를 잡으세요. 법회는 많이 열수록 좋습니다."
"또 공부합니까?"
"죽을 때까지 해야지요."
농담으로 던진 질문에 응답이 무섭다.
"사진은 앞보다 뒤가 더 이쁩니다."
"그런가요?"
"실루엣!"
실루엣, 맞다. 그것이 아름다워야 한다. 그것이 아름답지 못해 어지러운 세상, 떠나는 뒷모습, 아니 움직이는 뒷모습이라도. 그것이 아름다워야 한다.
(사진=황명라)
간밤까지 느닷없는 눈보라로 난리를 치던 하늘엔 뭉게구름이 둥둥 떠가고 있다. 꼭 가을 하늘 같은 옥빛 남색의 창공엔 아직도 떠나지 못한 철새들이 떼 지어 날고 있다. 이제 또 시간이 되면 정관. 범운스님들은 어디에 있을까? 언젠가 멋진 공부를 위해 산으로 가겠다고 하는 그들. 언뜻 개마고원 산자락이 적격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그들이 가까이 있었으면 좋겠다. 보이지 않아도 존재하는 부처님처럼 보이지 않아도 내 곁의 산하, 이곳에 항상 같이 있으면 좋겠다. 설날을 앞두고 간간 불자들이 경내를 기웃거린다. 저들, 저들을 위해 환하게 웃으며 법회를 여는 초전 진불제자 정관스님의 웃음을 보고 싶다. 어느덧 해지는 용흥사에 용은 없는데 우리 불가의 용들이 용흥사에는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