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가지 성스럽고도 바른 길
정찬주(소설가)
삽화 정윤경
마중물 생각
나는 꼭두새벽이 좋다. 눈을 뜬 얼마 동안은 현실의 내가 무장해제된 것 같은 무아의 시간이 흐른다. 소설 작업의 실마리는 주로 이 같은 꼭두새벽에 풀린다. 실마리가 풀리면 마치 레일을 깔아놓은 듯 소설은 하루 종일 저절로 써진다. 레일 위를 기차가 달리듯.
꼭두새벽에 내가 만나는 ‘나’는 공시적(共時的)으로는 ’사회적 자아‘이고, 통시적(通時的)으로는 ‘역사적 자아’인지도 모른다. 그걸 뭉뚱그려서 ‘영감’이라고 하는 것일까. 소설가로서 ‘나 아닌 나’를 만나는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인지 오늘도 경험했다. 그 힘으로 지금도 의자에서 ‘앉아서 버티기’를 흐뭇하게 하고 있다. 나는 나를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무언가 일이 꼬일 때는 새벽의 시간을 이용하라고 권한다.
소설 속에는 다양한 인물이 등장한다. 나는 집필하는 동안 부처님이 제시한 여덟 가지 바른길의 원칙을 대입하곤 한다. 나만의 이 방법을 다른 직종에 있는 이들에게도 권장하곤 한다. 학생의 공부, 회사원의 회사일, 사업가의 사업 등도 부처님이 제시한 여덟 가지 바른 길의 원칙을 응용한다면 뜻하는 바도 이룰 수 있고, 개인적인 수행도 덤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나는 부처님 법이 저잣거리에 사는 내 삶과 동떨어져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다. 깨달음을 얻으려고 출가한 산속의 수행자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고 믿는다.
부처님 말씀과 침묵
어떤 것이 도의 진리(道諦) 인가?
멸에 이르는 방법, 즉 여덟 가지의 바른길(八聖道)이다.
그것은 바른 견해(正見), 바른 생각(正思), 바른 말(正語),
바른 행위(正業), 바른 생활(正命), 바른 노력(正精進),
바른 기억(正念), 바른 선정(正定)이다.
바른 견해란 네 가지 진리를 바로 보는 지혜요,
바른 생각이란 번뇌 망상을 멀리하고 성냄과 원한이 없는 생각이요,
바른 말이란 거짓말, 악담, 이간질, 부질없는 잡담을
떠난 도리에 맞는 참된 말이요,
바른 행위란 살생, 도둑질, 음행을 하지 않고
올바른 계행을 지키는 일이다.
바른 생활이란 출가자의 생활 방법으로 부정한 장사나
점술 따위의 수단을 떠나 정당한 방법으로
의식을 얻어 생활하는 것입니다.
바른 노력이란 아직 일어나지 않은 나쁜 생각을 일지 않게 하고,
이미 일어난 나쁜 생각을 없애버리며,
아직 일어나지 않은 착한 생각을 일게 하고,
이미 일어난 착한 생각은 원만히 키워 나가도록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입니다.
바른 기억이란 생각을 한곳에 집중하여 몸과 마음과
진리를 바로 관찰하고 탐욕에서 일어나는 번뇌를 없애는 것입니다.
바른 선정이란 모든 욕심과 흔들리는 마음을
가라앉혀 선정에 들어감을 말한다.
― 『중아함中阿含 분별성제경分別聖諦經』
갈무리 생각
낮에 손님이 오면 기차가 간이역에서 쉬듯 차를 마시고 정담을 나누기도 한다. 그래도 집필 작업에는 지장이 없다. 간이역에서 잠시 쉬었다가 종착역을 알고 가는 기차처럼. 손님이 가고 나면 나는 다시 집중한다. 집중하면서도 몰입하지 않는 삼매와 비슷한 경험을 한다.
점심은 아내가 라면을 내놓아 맛있게, 더 정확하게 말하면 빠른 시간에 간단하게 먹었다. 산해진미가 부러우랴. 가끔은 라면 한 그릇이면 족하다. 부처님이 제시한 여덟 가지 바른길의 원칙 속에 이루어지는 듯한 행위이니 소박한 식사가 거룩하기까지 하다.
어쩌다가 서울에 간 나는 통유리 안이 훤히 보이는 고급 식당 앞은 되도록 빨리 지나친다. 식탁에서 게걸스럽게 먹는 그 동물적인 모습과 음식을 되새김하듯 하염없이 먹는 그 여유(?)를 봐줄 아량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또, 그 생각에만 매달린다면 바른 생각(正思)에 어긋나는 일이리라. 달빛이 연못에 흔적을 남기지 않듯 흘려버려야 한다.
한 그릇 라면의 포만감으로 30분 정도 휴식하고 꼭두새벽에 깔아놓은 레일을 나는 또 달릴 것이다. 밖에서 내리는 겨울비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 내가 하는 일을 누가 알아주건 말건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있다는 느낌이 들면, 나는 그것으로 이미 정복(淨福)을 받았다고 믿지 않을 수 없다. 바른 노력(正精進)에다 바른 선정(正定)에 든 것 같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