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민정음해례본 이야기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이다.
훈민정음해례본은 광흥사 명부전 시왕상의 복장 유물이 도굴된 것이다.
훈민정음해례본 상주본 소장자 배익기 씨가 국회에서 1천억 원을 줘도 내놓지 않겠다고 하였다.
배익기 씨는 감정가 1조 원 국보 1호 급인 훈민정음해례본을 어떻게 소장하게 되었을까?
그는 2008년 자신의 집을 수리하면서 발견했다고 주장하였다.
기사를 본 상주 시내 골동품 주인이 바로 반박하였다. 배익기 씨가 자신의 헌책방에서 고서 몇 권 사면서 훔쳐 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골동품 주인은 도굴범에게 광흥사 명부전 복장 유물 고서 한 박스를 오백만원에 구입하였다. 그 안에 훈민정음해례본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훈민정음해례본은 한글 창제의 의의와 제작 원리를 풀어쓴 훈민정음 사용설명서이다.
지구의 수많은 문자 중에 창제한 사람과 창제 원리가 밝혀진 언어는 한글이 유일한 문자이다.
안동 광흥사는 지난해 훈민정음해례본의 상주본이 도굴된 곳이라고 재판 과정 중에 판결이 나면서 새로운 소유권자로 주목받은 사찰이다.
국가에 소유권을 기증하는 것으로 사건이 일단락되었지만, 실물인 훈민정음해례본은 아직 실체를 드러내지 않고 있다.
안동 광흥사는 신라시대 의상대사께서 창건하신 천년고찰로서 불교 중흥기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에는 왕실의 원당이었던 사찰이다.
1827년의 광흥사 중수기에 따르면 500여간에 이르는 전각이 있었던 규모가 큰 사찰이었다.
어필각에는 세종대왕의 친서인 금자법화경과 영조대왕의 친서인 대병풍 16첩, 어필족자 1점과 왕실의 어필, 어시 등의 소중한 유묵들이 보관되어 있었다.
1952년 11월 동아일보와 경향신문에 실린 기사에 따르면 안동 광흥사에 보관 중이던 훈민정음과 월인석보의 원 판목이 전쟁 중 불에 타버렸다.
판목의 수는 월인석보가 222장, 훈민정음은 400여 장이 넘는다. 또 이보다 20여 년 전인 1929년 동아일보 신문 기사도 희방사와 광흥사가 소유한 월인석보 판목의 존재를 기록하고 있다.
1954년 극락전과 1962년 학서루와 큰 방이 낡아서 무너졌다.
광흥사에는 응진전과 명부전이 남아 있다. 2012년 2월 9일 대구지방법원 상주지원 선고공판에서 훈민정음해례본을 광흥사 명부전 복장 유물에서 도굴하였다는 증언이 나왔다.

해인사에 봉안된 학조대사진영이다. 그는 안동김씨 10세손 김계권의 장남이다. 인수대비의 명을 받아 해인사 팔만대장경 3부질을 인출하였다. 학조대사는 한글창제의 중심인물중 한분이다.
속리산 법주사에서 한글 창제의 핵심 역할을 한 분으로 신미대사를 중심으로 학조대사. 학열대사를 꼽을 수 있다.
그중 학조대사는 안동 출신으로 광흥사로 출가하신 분이다.
국보 70호 훈민정음해례본 간송본도 안동에서 발견되었다.
해례본 상주본 판본은 광흥사 명부전 시왕상 복장 유물로 확인되었다.
위 사실들을 보면 안동 광흥사에서 훈민정음해례본 판본을 만들어 인쇄하여 복장에 봉안하였다는 사실을 추정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