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자존을 지킨 장로니 ‘쏘마’
평등은 동서고금을 가리지 않고 소중한 가치로 인정되어 왔다. 부처님의 가르침 가운데도 평등의 가르침이 있고, 특히 남녀평등에 관한 내용은 눈길을 끈다. 방대한 불전 중 극히 일부에서 남녀평등에 어긋나는 내용이 종종 나타나지만, 그 또한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배경이 부처님 당시의 시대 상황을 반영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여성의 출가를 허락할 당시 부처님은 아난다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수행하는 데 남녀 사이에 아무런 차별이 없다고 밝힌 바 있다. 여성의 출가 허용을 망설인 것은, 아직 도과(道果)를 이루지 못한 남녀 수행자들이 한 공간에서 수행할 경우 발생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문제를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비구 상가가 비구니 상가보다 먼저 형성된 것도 초기 출가자들이 남성들이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당시 잠부디빠[인도]에서 여성의 사회적 위치는 오늘날의 상식으로는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 매우 열악한 것이었다.
쏘마(Somā)도 고따마 부처님의 교법을 만나기 이전에는, 그 스스로 여성이면서도, 여성에 대해 일종의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그 당시 여성의 매우 열악한 사회적 지위 때문에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이기는 하지만, 쏘마는 여성의 제한된 능력으로는 남자들이나 획득할 수 있는 최상의 지혜와 궁극의 경지에 이를 수 없다고 생각했다.
쏘마는 빔비사라 왕 아래에서 제관의 역할을 했던 이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성년이 되었을 때, 마가다 국 라자가하에서 열린 법석에서 직접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확신을 얻어 재가의 여신도가 되었다. 부처님의 교법에 대해 명료한 확신을 갖게 된 그녀에게 출가의 마음이 일어났고, 마침내 인연이 성숙해지자 스스로 비구니 수행처를 찾아가 비구니가 되었다. 비구니 승원에 들어간 그녀는 통찰 수행을 통해 오래되지 않아 분석적인 앎과 거룩한 경지, 즉 아라한과를 성취할 수 있었다. 쏘마는 거룩한 경지를 얻은 후 해탈의 즐거움을 누리며 주로 꼬살라 국의 수도 사왓티 시에 머물렀다.
그런데 쏘마가 고따마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곧바로 확신을 얻어 출가까지 이르게 된 것은 오랜 전생부터 쌓아온 공덕행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쏘마는 많은 생에 걸쳐서 덕성을 닦았다. 각 생마다 해탈을 이루기 위해 착하고 건전한 삶을 살았다. 과거 24부처님 가운데 한 분으로, 모든 존재를 애민하게 여긴 자비로운 부처님으로 알려진 씨킨(Sikhin) 부처님 당시에는 대부호인 왕족의 가문에서 태어나 성년이 되자 아루나 왕의 ‘제1 왕비’가 되었다. 아루나 왕은 어느 날 그녀에게 향기로운 일곱 송이의 청련화(靑蓮花)를 선물했다. 그러자 그녀는 그 꽃을 들고 ‘나에게 이러한 장식이 무슨 소용인가? 이 꽃을 씨킨 부처님께 공양 올리면 어떨까?’라고 생각하며 앉아 있었다. 그때 씨킨 부처님께서 탁발을 하면서 왕의 처소에 들렀다. 그녀는 씨킨 부처님을 뵙고 청정한 믿음의 마음을 일으켜 마중을 나가 그 꽃으로 공양을 올리고 오체투지로써 예경했다. 이 공덕으로 그녀는 천상계와 인간계 등 최상의 세계를 윤회하다가 고따마 부처님이 탄생할 무렵 라자가하 시에서 태어나 ‘쏘마’라는 이름을 얻었던 것이다.
탁발나온 비구들을 향해 합장하고 예의를 표하는 미얀마의 한 여자 어린이. 오랜 전생의 공덕이 있었기에 어린 나이에 비구들을 공경하는 마음이 깃들었을 것이다.(사진=이학종)
앞서 언급한 것처럼 고따마 부처님의 교법을 만나기 이전의 쏘마는 여성이라는 존재에 대해 일종의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여성의 보편적인 사회적 지위 때문에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이기는 하지만, 쏘마는 여성의 제한된 능력으로는 남자들이나 획득할 수 있는 지혜를 향한 도덕적 궁극에 이를 수 없다고 생각했던 여인이었다.
그랬던 그녀가 거룩한 경지, 아라한과를 성취하고 해탈의 즐거움을 누리며 사왓티 시에서 지내던 어느 날 아침 일찍 옷을 입고 발우와 가사를 들고 탁발을 하기 위해 사왓티 시내로 들어갔다. 사왓티 시에서 탁발을 하고 식사를 마친 뒤, 탁발에서 돌아와 대낮을 보내기 위해 ‘안다바나’라고 불리는 숲속 깊숙이 들어가 한 나무 아래 앉았다.
그때 악마 빠삐만이 그녀가 선정에 들어 모든 번뇌와 망상을 멀리 여의는 것을 방해하려고 모습을 감춘 채 다가왔다. 빠삐만은 욕계 6천 가운데 최고의 천상인 타화자재천의 왕으로 욕계천상을 지배하는 존재다. 그는 중생들이 부처님의 교법을 만나 성자의 경지에 들어 자신의 휘하에서 벗어나는 것을 두려워해, 특히 열반에 이르기 직전의 수행자들을 방해하곤 했다. 이날도 빠삐만은 소름 끼치는 공포심을 일으켜 쏘마가 선정에 드는 것을 방해하기 위해 나타난 것이었다. 그는 쏘마에게 가까이 다가가 허공에 서서 시를 읊었다.
성자만이 도달할 수 있을 뿐,
그 경지는 성취하기 어려우니
두 손가락만큼의 지혜를 지닌 여자로서는
그것을 얻을 수가 없네.
그런데 쏘마는 특히 여자를 폄훼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용납하지 않는 단호한 성정(性情)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여성의 능력이나 자질이 남성에 비해 결코 뒤처지지 않는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악마 빠삐만이 읊은 시 가운데 ‘최상이 경지는 두 손가락만큼의 지혜를 지닌 여자로서는 얻을 수 없다’는 것은 당시의 팽배했던 여성에 대한 비아냥거림에 다름 아니었다. 엄지손가락과 집게손가락으로 잴 수 있는 만큼의 크기라는 표현은 아주 작은 양의 지혜를 뜻하는 것이었다. 여성의 열등함을 나타내는 이 비유는 그 당시의 여성들이 물에 쌀을 집어넣어 밥을 지을 때 밥이 다 요리된 것을 알 수 없으므로, 끓는 동안에 쌀을 스푼으로 건져내어 두 손가락으로 눌러보고서야 밥이 된 것을 아는데서 비롯된 여성을 비하하거나 조롱하는 표현이었다.
쏘마는 이 게송을 듣고 ‘이 얼토당토하지 않은 말을 지껄이는 자가 사람인가? 사람이 아닌가? 누가 이 시를 읊조리는가?’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곧 ‘이것은 나에게 소름 끼치는 공포심을 일으켜서 선정에 드는 것을 방해하려는 악마 빠삐만이 분명하다.’라는 생각을 떠올렸다. 수행녀 쏘마는 이런 비천한 비유를 끌어들여 여성 수행자를 무시하는 악마에 대해 다음의 게송을 통해 단호하고 당당하게 반박했다.
마음이 잘 집중되어
최상의 진리를 보는 자에게
지혜가 항상 나타난다면,
여성의 존재가 무슨 상관이랴.
이와 같이 생각하는 사람에게
나는 남자다 또는 여자다
그렇지 않으면 도대체 무엇이라고 말해야 한다면
그는 악마일 뿐이리.
그때 악마 빠삐만은 ‘수행녀 쏘냐가 나에 대하여 알고 있다.’라고 알아채고 괴로워하고 슬퍼하며 바로 그곳에서 사라졌다.
- <쌍윳따니까야> 쏘마의 경. 전재성 옮김
빠삐만이 도망치듯 부리나케 사라진 것은 쏘마가 벌써 아라한의 경지에 이르렀음을 알아챘기 때문이었다. 쏘마의 게송에서 깨달은 자에게 남자냐, 여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며 깨달은 자는 성이나 어떠한 규정도 초월하는 존재라는 일갈에 혼비백산이 되었다. ‘최상의 진리(Sammā dhamma)를 보는 자’라고 표현하면서 쏘마는 스스로 네 가지의 진리, 사성제를 세 번 굴린 열두 가지의 형태(三轉十二行相)로 이루어서 거룩한 경지에 도달한 했음을 선포했던 것이다.
(사진=이학종)
<초전법륜경>에서 사성제는 세 번 굴린 형태로 소개되어 있다. 시전(示轉)은 ‘이다.’라고 표현되는 현재형이다. 권전(勸轉)은 ‘되어야 한다.’현재 진행형을 말한다. 증전(證轉)은 ‘되었다.’라고 하여 완료형으로 되어 있다. 사성제에서 권전형을 보면 ‘그것은 완전히 알려져야 한다. (pariññeyya: 苦聖諦)’ ‘그것은 제거되어야 한다.(pahātabba: 集聖諦)’ ‘그것은 실현되어야 한다. (sacchikātabba: 滅聖諦)’ ‘그것은 닦여져야 한다. (bhāvetabba: 道聖諦)’라고 표현된다.
삼전십이행상을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면 이렇다.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는 궁극적으로 다섯 가지 존재의 다발과 여섯 감역에 대한 것이다. 그것이 완전하게 알려져야 한다. 그것은 나에게 완전하게 알려졌다. 괴로움의 발생의 거룩한 진리는 갈애에 대한 것이다. 그것은 제거되어야 한다. 그것은 나에게서 제거되었다. 소멸의 거룩한 진리는 열반에 대한 것이다. 그것은 실현되어야 한다. 그것은 나에게 실현되었다. 그리고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의 거룩한 진리는 여덟 가지 고귀한 길[팔정도]에 대한 것이다. 그것은 닦여져야 한다. 그것은 나에게 닦여졌다.’
각각의 네 가지 거룩한 진리는 각각 ‘이다.’, ‘되어야 한다.’, ‘되었다.’로 세 번 굴려짐을 의미한다. 여기서 ‘이다’는 견도(見道)를 나타내는 시전이고, ‘되어야 한다’는 수도(修道)를 나타내는 권전이고, ‘되었다’는 무학도(無學道)를 나타내는 증전에 해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