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종나무 아래에서
그림 최수웅
산내리는 마을 앞뒤로 노란 알곡이 알알이 익어 갔습니다.
붉게 익은 감들이 가을이 한참 깊었음을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농사는 올해도 풍년이었습니다. 다른 때 같으면 마을 사람들이 모여 저마다 가을걷이한 알곡들을 서로 나누어 가지는 마을 중앙 마당이 텅 비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늙은 감나무에 매달린 불종이 울렸습니다.
땡땡땡.
땡땡땡.
불종은 마을에 불이 났을 때만 치는 종이었습니다. 산내리 불종은 10년인가 20년 전, 마을에 불이 났을 때 울리고는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노스님과 옹이스님도 그 종소리를 들었습니다.
“오늘 마을 중앙 마당에서 사람들이 모여서 회의를 한단다.”
“무슨 회의요?”
“도둑 때문이겠지.”
“도둑요?”
옹이스님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나도, 너도 가야 된다.”
“어떻게 하려구요?”
걱정이 되어서 옹이스님이 물었습니다.
“도둑을 잡으려고 하겠지?”
“사람들이 모인다고 도둑을 잡을 수 있을까요?”
“어쨌든 가보도록 하자.”
산내리는 마을에 무슨 일이 생기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든 마을 사람들이 종나무 밑에 모여서 앞으로의 일을 의논하였습니다. 아이들도 의견을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태까지 이런 좋지 못한 일로 사람들이 모인 적은 없었습니다. 가을이면 마을 축제를 위해 밝은 얼굴로 모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엔 마을 사람들의 얼굴은 어두웠습니다.
“우리 집은 쌀이 없어졌어.”
“우리 밭에 수수가 없어졌어.”
“이런 일은 한 번도 없었는데.”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서로를 쳐다볼 뿐 별다른 대책이 없었습니다.
수수가 없어졌다는 말을 듣자 옹이스님의 가슴은 마구 뛰기 시작하였습니다. 사람들 한가운데에 한수가 있었습니다. 옹이스님은 한수와 눈을 맞추지 않기 위해 아예 눈을 아래로 깔고 있었습니다. 한수도 고개를 숙이고 있었습니다. 한수의 얼굴은 창백했습니다.
하얀 수염의 마을 촌장님이 말을 꺼냈습니다.
“참 슬픈 일입니다. 우리 마을에 도둑이 있다니요. 그렇다고 바깥에서 오는 사람들도 없는데..... 어떻게 했으면 좋은지 의견들을 내보세요.”
성격이 급한 말구 아저씨가 말했습니다.
“결사대를 세워서 밤이고 낮이고 지키도록 합시다.”
“그러면 농사를 어떻게 짓습니까? 낮에는 산이나 들로 나가야 하는데.”
“그러면 마을 집집을 샅샅이 뒤지도록 하지요. 그러면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말구 아저씨가 여전히 입에 거품을 물었습니다.
“그거 좋은 생각이오. 그럼 아래서부터 한 집 한 집 수색을 합시다.”
“그렇지요. 그러면 반드시 도둑을 잡을 수 있을 거요.”
사람들이 팔을 걷어부쳤습니다.
그림 최수웅
그때 뒤에서 말없이 지켜보던 노스님께서 나섰습니다.
“우리 마을엔 도둑이 없습니다. 어떻게 우리 마을 사람들을 의심할 수 있습니까?”
“노스님, 절은 수색하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말구 아저씨가 손을 불끈 들었습니다.
“그래서 도둑을 잡을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다른 사람들도 말구 아저씨의 의견에 찬성했습니다.
그러나 노스님은 팔을 내저었습니다.
“내가 살아 있는 한 우리 마을에서 절대로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오늘 이때까지 한 가족처럼 지내왔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의 도둑을 잡기 위해 이웃집을 뒤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 우리 마을엔 도둑이 없습니다.”
“노스님!”
말구 아저씨가 노스님의 말을 막았습니다.
“안됩니다, 절대로. 우리가 우리 자신을 도둑으로 의심할 수는 없어요.”
아무리 성격이 급한 말구 아저씨도 더 이상 노스님의 말씀을 듣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다시 촌장님이 나섰습니다.
“그건 노스님 말씀이 맞습니다. 한 사람의 도둑을 잡기 위해 우리가 우리 집을 뒤질 수는 없습니다. 봉출이네 수수가 없어진 뒤부터는 더 이상 잃어버린 물건이 없으니 좀 더 기다려보도록 합시다.”
촌장님의 말에 마을 사람들은 모두 어두운 표정으로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절로 돌아오는 길에 옹이스님이 노스님께 물었습니다.
“노스님, 마을의 집을 몽땅 뒤지면 도둑이 누구인지 알 수 있잖아요?”
“우리 마을엔 도둑이 없다.”
“그 방법을 쓰면 도둑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있잖아요?”
“그건 안 된다. 물건을 잃어버리는 것보다 마음을 잃어버리는 것이 더 큰 손해이기 때문이지. 도둑을 잡겠다고 한 집 한 집 뒤지기 시작하면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는 마음이 생기거든. 그것은 세월이 흘러도 치료가 되지 않아. 잃어버린 쌀이나 보리는 언제든지 다시 채울 수 있지만 사람의 마음은 그런 것이 아니다.”
알쏭달쏭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은 노스님의 말씀을 들으며 옹이스님은 머리가 터질 것 같았습니다. 달래네 집을 뒤지면 한수가 도둑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을 텐데. 어떻게 해야 하나? 노스님께 모든 걸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곧 달래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만약 달래 오빠가 도둑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 달래는 틀림없이 이 마을을 떠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옹이스님의 마음은 너무 불안했습니다.(계속)
